배우 타카미네 히데코는 자신의 영화 인생의 대부분을 나루세 미키오와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과 함께 했다. 거의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없다고 회고한 나루세 미키오 감독과는 달리, 키노시타 케이스케(木下惠介) 감독과는 영화를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서로 상반되는 연출 스타일의 감독들과 작업을 했던 셈이다.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의 1955년작 '먼 구름(遠い雲, The
Tattered Wings)'은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스물 네 개의 눈동자(二十四の瞳, 1954)'를 찍은 이듬해에
다시 타카미네 히데코와 함께 한 작품이다. 영화는 일본 중부에 자리한 기후현의 다카야마시에서 촬영되었다. 당시 촬영 현장을 찍은
주민의 사진을 보니, 촬영 현장은 배우들을 구경하러 몰린 마을 주민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사진 속에는 촬영장에서 담소하는
배우들, 연출 지도를 열심히 하는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의 모습도 있었다. 이 감독이 만드는 촬영장의 분위기가 어떤 것인지 조금은
엿본 느낌이 들었다.
'먼 구름'은 구시대적 인습에 갇혀 고통받는 여성의 초상화를 그려낸다. 이 영화를 보면서 떠오른 한국 영화는 신상옥 감독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였다. 타카미네 히데코가 연기한 주인공 후유코 역시 딸 하나를 둔 과부이다. 후유코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부모의 바램에 따라 부잣집으로 시집을 간다. 그러나 이 남편이란 작자는 바람둥이에 손찌검까지 하는 무도한
인간이었다. 5년의 결혼 생활 동안 고통받던 후유코는 남편이 죽은 후 딸을 키우며 마음의 평화를 되찾는다. 그런데, 옛사랑
케이조가 먼 곳으로 전근가기 전에 고향에 잠시 들르면서 후유코의 일상은 흔들린다. 케이조는 후유코에게 새출발을 하자며 인생의
행복을 찾아주겠다고 말한다. 한편 후유코의 죽은 남편의 동생 슌스케는 형수를 마음에 두고 있다. 과연 후유코는 어떤 선택을 할까?
형사취수(兄死娶嫂). 형제의 사후에 그 처를 아내로 삼는 혼인 풍속이다. 우리의 눈에는 무척 낯설게 보이지만, 일본에서는
자연스럽게 통용되던 습속이었다. 후유코의 나쁜 남편과는 달리 동생 슌스케는 따뜻하고 점잖은 사람이다. 그는 후유코와 조카딸을
책임지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케이조의 등장으로 후유코의 선택을 기다리는 처지가 된다.
"이제는 행복합니까?"
케이조도 슌스케도 후유코에게 그렇게 묻는다. 홀로 딸 키우는 과부에게 행복하냐는 질문은 매우 이상하게 들리지만, 후유코는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후유코는 진짜 행복해서 그렇게 대답한 걸까? 옛연인 케이조에게도, 도련님 슌스케에게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후유코는 홀로 집에 있을 때, 집안을 둘러보며 울음을 터뜨린다. 높은 대들보가 이어진 그 큰 집은 마치 감옥처럼
보인다. 늘 웃는 표정의 후유코가 유일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후유코에 대한 케이조의 마음은 변함이 없다. 케이조의
가족들도 후유코를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함께 떠나자는 케이조의 애원에 후유코는 바깥 세상이 두렵다고 말한다. 고통을
주었던 남편은 이제 곁에 없다. 부유한 시댁의 안주인으로 시아버지를 모시며, 딸 하나 키우는 삶은 별다른 재미는 없지만 그럭저럭
괜찮다. 사랑을 찾아 떠나는 새출발이 행복을 줄 수 있을지 후유코는 생각이 많아진다.
후유코가 케이조와 잠깐 걸으면서 이야기한 것을 보고 마을에는 온갖 소문이 떠돈다. 남의 입과 눈이 아직은 무서운 시대이지만,
그래도 세상은 변하고 있다. 케이조의 여동생이 보여주는 발랄함과 자유분방함, 마을을 찾아온 재즈 악단과 댄서들의 공연 모습은
1950년대 중반 일본 사회의 서구적 변화를 보여준다. 그러나 오랜 관습과 사고방식의 틀은 견고하다.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은
그것을 영화 중간 중간에 넣은 마을의 마츠리를 통해 보여준다. 성대하게 펼쳐지는 마츠리 장면은 자유주의적인 서양의 가치관과
대비되는 일본의 전통을 상징한다. 그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거대하고 단단한 틀 앞에서 후유코는 갈등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다는 욕망과 딸에 대한 모정 사이에서 갈등한다. 케이조가 약속한 새출발에 후유코의 딸 키누코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리고
마침내 케이조가 떠나는 날, 후유코는 작은 보따리 하나 들고 역으로 달려간다.
마침, 일 때문에 출장을 갔던 슌스케가 역에서 형수를 발견하고 떠나지 말라고 간청한다. 후유코는 망설인다. 이 때 후유코가
느끼는 내면의 극심한 갈등과 고통을 타카미네 히데코는 미세하게 떨리는 눈썹으로 보여주는데, 정말이지 이 대배우의 연기는 기가
막힌다. 그냥 오래된 구식 영화겠거니, 하고 보던 관객들이라도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면 후유코를 연기한 타카미네 히데코에게 몰입하게
될 것이다. '먼 구름'은 구식의 시대와 그 시대의 고통받는 여성의 이야기가 담겨있지만, 그것을 다루는 키노시타 케이스케의 연출
방식은 절대로 후진 것이 아니다. 영화의 영어 제목 'The Tattered Wings'는 번역하면 '해진 날개'이다. 케이조는
후유코에게 더이상 해진 날개로 살아가지 말라고, 자신이 새로운 날개를 달아주겠다고 약속한다. 아직은 남자에 의지해서 행복의
날개를 펼쳐야만 하는 시대였다. 어떤 선택을 했더라도 후유코가 자신의 날개로 날아오를 수는 없다는 것을 영화의 마지막에 관객들은
깨닫게 된다.
*사진 출처: filmark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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