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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들 아래로(Unter den Brücken, Under the Bridges, 1946), 우리들의 시대에(In jenen Tagen, In Those Days, 1947)

그곳에 사람과 영화가 있었다: 헬무트 코이트너(Helmut Käutner)의 전후 독일 영화 두 편

 

1. 전쟁의 심연 속에서 탈주를 꿈꾸다, 다리들 아래로(Unter den Brücken, Under the Bridges, 1946)

  나치 치하에서는 어떤 영화를 만들었을까? 영화가 가진 선전 선동의 힘을 잘 알았던 나치는 Ufa를 설립해서 영화 산업을 국가적으로 통제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시기의 영화들이 모두 프로파간다(Propaganda)였던 것은 아니다. 물론 나치는 영화 제작에 집요한 간섭과 검열을 강제했지만, 그에 맞서는 창작자들도 여럿 있었다. 헬무트 코이트너(Helmut Käutner)도 그런 감독들 가운데 하나였다. 코이트너가 1944년에 만든 '다리들 아래로(Unter den Brücken, Under the Bridges, 1946)'는 매우 서정적인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

  헨드릭과 빌리는 자신들의 바지선으로 운하와 강을 오가며 화물을 운송한다. 절친한 친구 사이인 그들은 우연히 만난 아름다운 아가씨 안나와 동시에 사랑에 빠진다. 두 친구는 안나의 마음을 얻는 사람이 바지선을 포기하고 떠나기로 서로 약속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육지에 정착하고 싶다는 소망과 오래도록 이어온 우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헨드릭과 빌리. 영화는 삼각 관계라는 진부한 틀의 사랑 이야기를 아름다운 풍광 속에 잔잔하게 풀어놓는다. 나치가 패망하기 직전인 1944년 여름에 촬영된 이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정말 저 영화를 찍은 곳이 독일이 맞나 싶은 생각마저 든다. 헨드릭과 빌리의 바지선은 운하 근처의 대도시를 마치 다큐멘터리 필름처럼 담아낸다. 거리의 사람들은 활기가 넘치고, 끊임없이 배들이 오가는 강의 풍경은 평화롭기만 하다. 폭격으로 일부 손상된 건물의 모습이 보이기는 해도, 이 영화에서 전쟁의 그림자를 발견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런 종류의 로맨스 영화는 나치 치하의 독일 관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전시 상황에서 독일 국민들에게는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해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나치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독일의 상업 영화들은 로맨스와 코미디 장르를 중심으로 제작되었다. 헬무트 코이트너의 '다리들 아래로'도 그런 영화들 가운데 하나였다. 온나라가 총력전을 치루고 있는 상황에서 나치는 이런 종류의 영화들에 쉽게 상영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배급과 상영이 보류되었다가 나치 패망 이후에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온 영화들이 다수 존재했다. 그 영화들은 이른바 '변절자 영화(Überläufer Film)'라고 불렸다.

  영화 '다리들 아래로'를 관통하는 주요한 정서는 닫힌 현실로부터 탈주하려는 열망이다. 두 친구가 운행하는 바지선은 흐르는 강물을 따라 이곳저곳을 떠돈다. 바지선 선원인 헨드릭과 빌리, 음식점 종업원인 안나. 이 하층 계급 노동자들이 주인공인 영화에는 도무지 눈요깃감이 될만한 번지르르함이 없다. 그럼에도 코이트너가 보여주는 이 사랑 이야기에는 순수함과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빌리는 안나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헨드릭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기꺼이 뒤로 물러난다. 약속대로라면 헨드릭은 배를 포기하고 떠나야 하지만, 빌리는 헨드릭과 안나를 바지선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 영화의 마지막에 빌리와 헨드릭, 안나는 바지선 위에서 행복하게 미소를 짓고 있다. 그 세 명의 주인공들은 육지가 아닌 물 위의 삶을 택했다. 그들은 배를 타고 원하는 곳으로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 전쟁은 막바지에 달했고, 필시 그것은 독일의 패배로 끝날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만들어진 이 로맨스 영화에는 삶에 대한 의지, 자유에의 갈망이 느껴진다. 



2. 폐허 위에서 돌아보는 나치의 폭정, 우리들의 시대에(In jenen Tagen, In Those Days, 1947)

  이제 전쟁은 끝났다. 독일은 패전국이 되었고, 연합군에 의해 나라는 둘로 나뉘었다. 동독에 주둔한 소련, 서독에 주둔한 미국. 이 두 나라가 영화 산업을 대하는 태도는 판이하게 달랐다. 일찍부터 영화를 체제 선전의 효과적 도구로 파악한 소련은 동베를린에 남아있던 Ufa 스튜디오를 바탕으로 DEFA(Deutsche Film-Aktiengesellschaft)를 설립했다. 소련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독일인들을 재교육시키고 역사적 책임을 각인시키기를 원했다. 검열의 압력이 있었음에도 동독 지역에서 영화 제작은 꾸준히 이어질 수 있었다. 그와는 달리, 미국은 서독을 자국의 헐리우드 영화를 배급, 상영하는 시장으로 파악했다. 그 결과 서독 지역에서의 독일 영화 제작은 매우 어려웠다. 그런 열악한 상황에서 헬무트 코이트너는 '우리들의 시대에(In jenen Tagen, In Those Days, 1947)'를 내놓았다. '잔해 영화(Trümmerfilm, Rubble Films, 1946-1949)'로 불리는 이 시기 일련의 영화들에는 패전 이후 독일이 직면한 여러 사회 문제가 여실히 드러난다.

  영화 '우리들의 시대에'는 주인공이 자동차이다. 의인화된 차는 남성 내레이터의 목소리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폐차 직전의 낡은 자동차에는 이전의 주인들이 남기고 간 소지품들과 흔적이 남아있다. 7개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이 독특한 차의 내력은 나치 독일의 흥망성쇠와 절묘하게 겹친다. 공장에서 멋지게 제작된 새 차가 만난 첫 번째 주인은 시빌이라는 이름의 젊은 여성이다. 시빌은 연인 스테판이 멕시코로 떠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상심한다. 스테판과 헤어지고 오는 길, 시빌의 차는 길을 가득 메운 군중에 의해 나아가질 못한다. 때는 1933년 1월 30일, 그 날은 히틀러가 독일 수상으로 취임한 날이었다. 시빌은 스테판이 멀리 떠나는 이유가 나치 때문임을 알게 되고, 차를 돌려 그와 함께 하기로 마음먹는다.

  차의 두 번째 주인은 작곡가이다. 그의 음악은 나치에 의해 퇴폐 음악으로 찍혔다. 정치적 탄압을 받는 예술가의 좌절에 이어지는 세 번째 이야기는 매우 비극적이다. 오랫동안 액자 공방을 운영해온 노부부는 어디론가 떠나고 있다. 빌헬름의 아내 샐리는 유태인이다. 아내는 자신이 더이상 가게를 운영할 수 없으니 이혼을 하고 남편이 모든 것을 맡아달라고 부탁한다. 1938년 11월 9일, '수정의 밤(Kristallnacht)' 사건이 일어난다. 유태인들이 운영하는 상점과 회당은 무차별적인 테러와 파괴의 대상이 되었다. 이 사건은 나치 치하 유태인 탄압의 신호탄이었다. 절망한 부부는 결국 집에 불을 지르고 삶을 마감한다.

  네 번째 이야기에서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국외로 탈출하려는 연인들이, 그 다음으로는 소련 지역으로 부임하는 독일군 장교가 파르티잔에게 공격받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차의 여섯 번째 주인은 젊은 여자 수리공 에르나이다. 에르나는 연로한 남작 부인을 기차역에 데려다 주려고 한다. 그런데 이 남작 부인의 아들은 히틀러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남작 부인을 구하려는 에르나의 선의는 경찰에 의해 저지된다. 마지막 이야기의 주인공은 미혼모 마리와 군인 요제프이다. 요제프는 우연히 만난 미혼모 마리와 아기를 목적지에 데려다 준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요제프는 탈영병으로 몰리고, 사살될 위험에 처한다. 다행히 선량한 군인이 요제프를 살려준다.

  이 영화에서 단연코 눈에 띄는 부분은 나치의 피해자로서 '선한 독일인'에 대한 묘사이다. 나치의 악행은 독일 국민들을 가해자의 위치에 세웠다. '우리들의 시대에'는 조심스럽지만 명확한 어조로 모든 독일인들이 나치의 동조자는 아니었다고 말한다. 어떤 면에서 영화의 이러한 어조는 교묘한 책임 회피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나치 치하에서 박해를 받았던 헬무트 코이트너의 진정성은 그러한 의구심을 떨쳐버리게 만든다. 이 영화에는 강력한 휴머니즘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들의 시대에'는 전후 폐허의 잔재에서 나치의 폭정을 되새기며, 그 시기에 스러진 죄없는 독일인들을 기념한다.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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