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모킹 재킷(Smoking Jacket)이라는 것이 있다. 말 그대로 담배 피울 때 입는 옷이다. 서구 영화 속에서 대저택의 주인이 서재에서 입는 편안한 실내복을 생각하면 된다. 벨벳과 실크 소재로 만든 이 옷은 매우 고급스럽다. 해롤드 핀터(Harold Pinter, 1930-2008)의 희곡 '관리인(The Caretaker)'에서
노숙자 데이비스는 공짜로 스모킹 재킷을 얻는다. 거리에서 떠돌던 노숙자가 상류 계층이 입는 스모킹 재킷을 걸친 모양새는 영
어색하기만 하다. 데이비스에게 그 재킷을 가져다준 사람은 애스턴이다. 그는 건달에게 흠씬 얻어맞을 뻔한
데이비스를 구해주었다. 애스턴은 오갈 데 없는 데이비스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기까지 한다. 재워주는 것만 해도 대단한 호의인데, 데이비스는
신발이 닳았으니 괜찮은 구두 하나 내놓으란다. 끊임없이 욕설과 상스런 말을 내뱉는 데이비스. 그런 노숙자에게 관대함을 보여주는
애스턴. 그리고 애스턴의 동생 믹. 해롤드 핀터는 비좁은 방에서 이 세 명의 인물이 나누는 이야기로 3막의 희곡을 만들어 냈다.
클라이브 도너(Clive Donner) 감독의 '관리인(The Caretaker, 1963)'은 해롤드 핀터의 동명 희곡 'The Caretaker(1960)'를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러닝타임 1시간 45분. 좁은 방에서 도대체 세 명의 남자들이 나누는 대화로 어떻게 시간을 채워가나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천재적인 극작가 핀터는 그걸 아무렇지 않게 해낸다. 애스턴의 호의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데이비스의 행태는
뻔뻔함 그 자체이다. 애스턴이 구해온 신발에 끈이 없다며 불평하고, 끈을 찾아서 주니까 색깔이 마음에 안든다고 말한다. 애스턴이
데이비스의 잠꼬대 때문에 잠을 못잤다고 하자, 옆방에 사는 외국인들이 내는 소리라며 억지를 쓴다.
왜 애스턴은
무례한 노숙자 데이비스를 인내하는가? 아마도 그 단서는 애스턴의 방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물이 떨어지는 천장에는 양동이가
매달려 있다. 방에는 오래된 신문과 폐지 뭉텅이가 높다랗게 쌓여있다. 오만 잡동사니로 채워진 그 방은 겨우 몸을 움직이고 침대에서
잠만 잘 수 있다. 애스턴에게는 분명 문제가 있다. 애스턴은 데이비스에게 고통스런 과거의 기억을 들려준다. 정신병원에 강제로
끌려갔던 그는 전기 충격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그 치료에 동의한 사람은 애스턴의 모친, 그 일 이후 애스턴은 사회와 담을 쌓고
폐쇄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의 동생 믹은 형과 같이 살지는 않지만, 가끔 들러서 형을 챙긴다. 믹은 형의 방에 낯선 손님,
아니 침입자가 왔음을 알게 된다.
어떤 면에서 애스턴의 비좁고 어지러운 방은 1950년대 영국 사회의
축소판이다. 데이비스가 쏟아내는 인종차별적 언사는 전후 영국으로 유입된 외국인들에 대한 영국인들의 두려움을 반영한다. 사회의
최하층 극빈자 데이비스는 잠깐 함께 살던 아내가 도망간 이후로 가족을 가져본 적이 없다. 저속하고 야만적으로 행동하는 이 노숙자는
자신의 불만을 모두 외부의 탓으로 돌린다. 말끝마다 늘어놓는 Sidcup은 그가 만들어낸 견고한 망상의 체계를 입증한다.
데이비스는 Sidcup에 자신의 신원을 증명해줄 모든 서류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남자는 '맥 데이비스'라는 이름 말고도 '버나드
젠킨스'라는 이름도 쓰고 있다. 도무지 신뢰할 수 없는 남자 데이비스는 애스턴의 영역을 점차로 침범해가며 애스턴을 착취하려고
든다.
데이비스가 꼭 가겠다고 말하지만 결코 가지 않을 'Sidcup'처럼, 애스턴의 환상은 언젠가 지을 '창고'로
표현된다. 동생 믹은 형이 살고 있는 건물을 멋지게 리모델링할 꿈을 가지고 있다. 같이 살지도, 거의 대화도 나누지 않는 이
형제는 데이비스의 존재를 매개로 소통한다. 애스턴은 데이비스에게 건물 관리를, 믹은 데이비스에게 건물 인테리어 공사를 제안한다.
데이비스는 애스턴을 배제하고, 자신보다 권력의 우위에 선 믹에게 기댈 궁리를 한다. 이 불안정한 관계는 데이비스가 믹에게 애스턴을
'정신이상'으로 폄하하는 발언을 한 이후로 무너진다.
믹은 데이비스를 사기꾼으로 부르며 떠나라고 말한다.
애스턴 또한 자신의 공간에서 주인 행세를 하려드는 데이비스를 거부한다. 애스턴은 데이비스가 풍기는 썩은 내와 잠꼬대를 견디지
못한다. 데이비스는 자신에게서 구린내가 난다는 것을 끝까지 부인한다. '냄새'로 표현되는 계층간의 근원적 이질감은 결코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냄새와 계층에 대한 흥미로운 은유를 봉준호의 영화 '기생충(Parasite, 2019)'에서도 볼 수 있다.
니콜라스 뢰그(Nicolas Roeg)의
효율적이고 정교한 촬영, 물 떨어지는 소리를 비롯해 끊임없이 신경을 긁는 Ron Grainer의 독특한 사운드, 믹 역의
Alan Bates를 비롯해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 이 모든 것이 영화 '관리인'을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관리인'에는
1950년대 영국 사회의 정체된 분위기, 외국인에 대한 적대적 감정, 과거의 환상에 매몰되어 현실을 살아내지 못하는 병리적 인간이
묘사되어 있다. 이 작품에서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 1953)'의 흔적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데이비스가 가려는 'Sidcup', 애스턴이 지으려는 '창고', 믹이 꿈꾸는 '멋진 건물', 그 세 명의 인물들이 원하는 것들은 디디와 고고가 기다리는 '고도'와도 같다. 해롤드 핀터는 방향성을 상실한 전후 세대의 내면적 공허를 부조리극 '관리인'에 압축적으로 담아낸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Nicolas Roeg 감독의 영화 'Walkabout(1971)'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walkabout197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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