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망가진 삶을 재건하는 용기, To Leslie(2022)


  영화가 시작되면 오래된 뉴스 화면이 보인다. 싱글맘 레슬리는 이제 막 복권에 당첨되었다. 상금 액수가 무려 19만 달러. 기쁨과 흥분에 휩싸인 레슬리는 당첨금으로 집을 사고 13살 아들이 원하는 것을 해주겠다고 외친다. 그로부터 6년 후, 레슬리는 장기 투숙 중인 모텔의 숙박비를 내지 못해 쫓겨난다. 잡동사니 짐들과 함께 길바닥에 나앉은 이 여자의 몰골은 비참하기 그지없다. 퀭한 눈빛, 비쩍 말라버린 몸, 너저분한 옷차림. 레슬리는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그곳은 죽기보다 더 가기 싫은 곳이다. 고향 사람들이 알콜 중독자가 되어버린 자신을 경멸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영화 'To Leslie(2022)'는 알콜 중독자 여성의 지난한 재활의 여정을 그린다. 영화에서 재미를 추구하는 관객이라면 이 영화는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니다. 밑바닥으로 전락한 하층 계급 여성의 삶이 다큐멘터리처럼 펼쳐지기 때문이다. 러닝타임이 2시간에 가까운 이 영화를 보는 일은 어떤 면에서는 지루하며 내내 가슴을 저리게 만든다. 어떻게 해서 레슬리가 복권 당첨금을 날려 버렸는지, 어린 아들은 어떻게 자랐는지 영화는 알려주지 않는다. 이제 19살이 된 아들 제임스는 막노동을 하며 살고 있다. 그래도 엄마에 대한 연민을 지닌 아들은 엄마를 내치지는 못한다. 제임스는 자신의 집에서는 술을 먹어서는 안된다고 엄마에게 일러둔다. 하지만 그것이 레슬리에게 불가능한 일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난다. 레슬리는 아들의 집에서도 쫓겨난다. 유일한 짐인 작고 지저분한 분홍색 여행 가방과 함께.

  중독의 나락에 떨어진 이 여성이 범죄와 착취의 그물에 얽히는 건 시간 문제다. 굶주리고 잘 곳도 없으며 술을 갈망하는 레슬리에게 불순한 의도를 지닌 남자들이 다가온다. 술 한 잔, 햄버거 하나, 레슬리에게는 그 모든 것이 절실하다. 추행 당할 위기에서 용케 벗어난 레슬리가 다다른 곳은 허름한 모텔. 그곳 주인 스위니가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사람 좋은 이 남자는 레슬리에게 일자리를 제안하고 술과 멀어지도록 돕는다. 하지만 술에 절은 삶의 관성이 그렇게 쉽게 바뀔 리가 없다.

  존 카사베츠(
John Cassavetes)'영향력 아래의 여자(A Woman Under the Influence, 1974)'는 정서적 취약성을 지닌 하층 계급 여성이 알콜 중독의 악순환에 갇히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가난한 싱글맘 레슬리에게 다가온 행운은 손가락을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곧 사라진다. 여자는 집도 사지 못했고, 아들을 제대로 키우지도 못했다. "나도 좋은 엄마가 되고 싶어!" 레슬리는 이제는 다 커버린 아들에게 그렇게 말하지만, 그건 공허한 울림과도 같다. 아들은 알콜 중독자 엄마를 거칠게 밀어낸다. 이 여자는 이제 사회의 제일 밑바닥으로 급전직하한다.

  그런 레슬리를 고향 친구와 지인들은 거리낌없이 조롱하고 모욕을 퍼붓는다. 영화는 알콜 중독의 수렁에 빠진 하층 계급 여성의 현실을 담담히 따라간다. 좌절된 꿈과 추락해 버린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들다. 어떤 이들은 그 구부러진 삶의 길목에서 중독의 구덩이에 빠지기도 한다. 레슬리는 그 잘못된 여정을 돌이키려고 애를 쓴다. 겨우 술로부터 멀어진 레슬리는 우연히 보게 된 위스키병을 품에 꼭 끌어안는다. 레슬리가 조심스럽게 마개를 열어 그 향을 맡을 때, 우리는 중독자에게 재활이란 그렇게 위태롭게 이어지는 과정임을 직관한다.

  감독 Michael Morris는 중독으로 삶이 망가진 레슬리를 연민과 동정의 대상으로 그리지 않는다. 놀랍게도 이 영화는 레슬리의 외롭고 고통스러운 내면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우리 모두는 부서진 꿈의 조각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원치 않는 삶을 꾸역꾸역 살아내야할 때도 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자신에 대한 믿음을 놓치지 않는 것. 레슬리가 힘겹게 스스로의 삶을 재건해내는 과정은 잔잔한 감동을 준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생동감있게 만드는 일등공신은 레슬리 역의 배우 Andrea Riseborough이다. 이 여배우는 알콜 중독자를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알콜 중독자의 삶을 살아낸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마른 몸, 핏기 없는 얼굴, 희망이 느껴지지 않는 눈빛, 휘청거리는 걸음걸이. 앤드리아 라이즈버러는 불안과 절망이 체화된 중독자 레슬리의 캐릭터를 온전히 구현해낸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삶의 불안정성과 중독을 다룬 영화들

13, 000 피트의 앤(Anne at 13,000 Ft, 2019)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4/anne-at-13000-ft2019.html

밤으로의 긴 여로(Long Day's Journey into Night, 1962)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2/long-days-journey-into-night-1962.html

Come Back, Little Sheba(1952)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1/come-back-little-sheba1952.html


***Ken Burns의 3부작 다큐 금주법(Prohibition, 2011)

1편 'A Nation of Drunkards'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1/pbs-3-ken-burns-prohibition-2011-1.html
2편
'A Nation of Scofflaws'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1/pbs-3-ken-burns-prohibition-2011-2.html
3편 '
A Nation of Hypocrites'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1/pbs-3-ken-burns-prohibition-2011-3.html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

자작시: 다래끼

  다래끼 무지근한 통증은 너와 함께 온다 나는 네가 절대로 그립지 않다 너 없이도 잘살고 있다 하지만 너의 부드러운 눈길을 기억한다 아주 약한 안약에서부터 센 안약까지 차례대로 넣어본다 나는 너를 막아야 한다 나은 것 같다가 다시 아프고 가렵다 나는 조금씩 끈기를 잃어가고 있다 너는 물기를 머금은 염화칼슘처럼 끈덕지게 내 눈가를 파고들며 묻는다 이길 수 있니? 곪아서 터지게 내버려둘 자신이 없으므로 열심히 눈을 닦아주며 온기를 불어넣는다 그대로 그렇게 잠들어 줄 수 있다면 그래, 우리는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어

자작시: 하이엔드(high-end)

  하이엔드(high-end) 싸구려는 항상 냄새가 나 짜고 눅진한 부패의 냄새 썩은 감자의 냄새는 오천 원짜리 티셔츠의 촉감과 비슷해 등고선(等高線) 읽는 법을 알아? 만약 모른다면 안내자를 찾는 것이 좋아 안내자의 등에 업혀 이곳에 올 수도 있지 더러운 수작, 아니 괜찮은 편법 차별하고, 배제하고, 경멸을 내쉬어 우리가 서 있는 곳 우리가 가진 것 우리들만의 공론장(公論場) 즐겁고 지루한 유희 불현듯 당신들의 밤은 오고 부러진 선인장의 살점을 씹으며 낙타가 소금 바늘귀를 천천히 바수어내는 하이엔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