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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삶의 압력을 견디다, Anne at 13,000 Ft.(2019)

 

  영화는 다소 혼란스러운 도입부로 시작한다. 어린이집 교사인 앤은 부산스러운 애들을 보살피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런 앤의 모습과 교차 편집된 장면은 절친의 'Bachelorette Party(결혼을 앞둔 신부와 친구들이 하는 파티)'로 스카이다이빙을 준비하는 모습이다. 헝클어진 금발머리처럼 앤의 표정이나 행동은 어딘지 모르게 들뜨고 불안정해 보인다. 캐나다의 감독 Kazik Radwanski의 2019년작 'Anne at 13,000 Ft.'은 불안한 젊은 여성의 삶을 포착한다.

  이 영화에서 존 카사베츠의 흔적을 찾아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핸드 헬드 카메라는 시종일관 거칠게 흔들린다. 관객은 그 화면 속 앤의 모습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곧 알아챈다. 앤은 뜨거운 커피는 아이들에게 위험할 수 있으니 치우라는 동료 교사의 충고를 받는다.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앤은 커피를 개수대에 버리고는 컵을 상대방에게 던진다. 동료 교사는 질책하지만, 앤은 빈 컵을 보여주려는 것 뿐이라고 항변한다. 그런가 하면 친구의 결혼식에서는 축사를 하다 말고 울어버린다. 

  'A Woman Under the Influence(1974)'에서 하층 계급 여성의 내면을 옥죄는 알콜 중독은 이 영화에서 조울증으로 대체된다. 앤은 친구의 결혼 피로연에서 진창 퍼마시고는 화장실에서 구토하고 주정한다. 이는 카사베츠의 'Husbands(1970)'에 나오는 친구들의 화장실 구토신과 닮았다. 어쩌면 감독 카직 라드완스키는 카사베츠 덕후일런지도 모른다. 그래서 카사베츠의 즉흥적이고 자연적인 연출 방식도 흉내낸 것일까? '13,000 피트의 앤'에서 라드완스키는 출연자의 일상을 계속 따라잡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카메라처럼 앤의 모든 것을 근거리에서 담아낸다.    

  집을 얻어 이제 막 독립한 이 젊은 여성의 삶은 어색하고 서툴기 짝이 없다. 결혼 피로연에서 만나 사귀게 된 매트와의 관계도 삐걱거린다. 매트를 엄마에게 소개하는 자리에서는 느닷없이 약혼자라고 말한다. 매트는 어떻게든 앤을 도우려고 하지만 쉽지가 않다. 보육원에서도 아이들을 보살피는 교사라기보다는 매우 불안해 하는 어른 아이 같다. 앤의 근무 태도는 동료들과 상사에게 비판받는다. 통제되지 않은 감정, 지나친 자기 중심성, 기이한 유머 감각, 앤의 모든 것은 정상에서 벗어나 있다.

  카사베츠가 정서적 불안정성을 계급 문제와 결합시켜서 보여주었다면, 라드완스키는 오로지 젊은 여성의 내면에만 집중한다. 아이들을 보살피던 앤이 갑자기 압도되는 감정에 눈물을 흘리며 바닥에 드러누워 버릴 때, 관객은 이 여성의 상태를 진심으로 걱정하게 된다. 좋은 동료, 걱정하는 엄마, 이해심 많은 남자 친구, 그 누구도 앤을 도울 수 없다.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약물 처방을 받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해결책이다. 그런데 앤은 하늘로 향한다.

  스카이다이빙이 앤을 낫게 할 수 있을까? 자의식 과잉의, 감정의 양극단을 오가는 앤의 모습은 입안의 돌가루처럼 서걱거린다. 냉소적인 관객이라면 '그래서 뭐 어쩌라구?', 하고 반문할 것이다. 나 또한 그렇게 심드렁하게 러닝타임 75분의 끝자락에 다다랐다. 긴장된 표정의 앤은 맨 마지막 순서로 낙하한다. 카메라는 텅 빈 비행기 안에서 앤이 사라진 창공을 응시한다. 하강구로 쏟아져 들어오는 무지막지한 바람의 숨결이 느껴진다. 앤의 불안정한 내면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난기류를 만들어낼 것이다. 13,000피트 고도의 압력을 떠안고 시도하는 스카이다이빙처럼, 앤은 불확실한 삶의 여정을 향해 뛰어든다. 나는 비로소 이 젊은 여성을 응원하고 싶어졌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존 카사베츠의 영화 '남편들(Husbands, 1970)'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1/husbands1970-melancholia2011-national.html

너무 늦은 블루스(Too Late Blues, 1961)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1/glenn-miller-story-1954-too-late-blues.html

오프닝 나이트(Opening Night, 1977)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opening-night-197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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