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대 영화:
글렌 밀러 스토리(The Glenn Miller Story, 1954),
너무 늦은 블루스(Too Late Blues, 1961)
여러분은 음악 영화에서 무엇을 기대하는가? 귀에 착착 감기는 음악, 천부적 재능을 지녔지만 시련과 고통을 겪는 주인공, 결국
실패를 딛고 멋지게 재기하는 결말... 오늘 다룰 영화들은 바로 그 음악이 중심이 되는 영화이다. 여기 서로 다른 색깔을 지닌 두
편의 음악 영화가 있다. 독특한 서부극들을 만든 앤소니 만(Anthony Mann) 감독은 1954년에 '글렌 밀러 스토리'를
내놓았다. 영화는 스윙 재즈 시대(The Swing Era, 1930-1945)를 대표하는 인물들 가운데 한 명인 글렌
밀러(Glenn MIller)의 일대기를 담았다. 주연은 제임스 스튜어트, 그는 앤소니 만 감독과 여러 편의 작품을 함께 했다.
재즈 음악인을 다룬 존 카사베츠(John Cassavetes) 감독의 영화도 있다. '너무 늦은 블루스(Too Late
Blues, 1961)'는 카사베츠가 메이저 스튜디오와 처음으로 작업한 영화이다. 재능을 가졌지만 상처받고 부서지는 젊은 재즈
음악가의 초상을 그렸다.
'글렌 밀러 스토리'는 관객들이 음악 영화에 기대하는 모든 것들을 충실히 담아낸다. 영화의 도입부, 풋내기 재즈 트롬본 연주자인
글렌 밀러는 전당포에 악기를 맡겼다 찾는 일상을 반복한다. 악단 생활로 겨우 생계를 이어가고 있기는 하지만, 밀러에게는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겠다는 꿈이 있다. 영화의 전반부는 밀러의 러브 스토리로 채워진다. 아내 헬렌 버거는 직업 음악가로서의 밀러를
이해하고 지원한다. 그런 아내 덕분에 밀러는 독립 악단을 꾸리고, 새로운 스타일의 재즈 음악을 만들어 나간다. 물론 많은 위인전이
그러하듯 밀러도 단번에 성공의 정점에 오르지 않는다. 밀러의 신생 악단은 어려움 속에 연주 여행을 이어가지만 결국은 파산 위기에
처하고 만다.
'너무 늦은 블루스'의 주인공도 재즈 음악을 한다. 영화의 주인공은 'Ghost'란 별명을 가진 재즈 밴드 리더 웨이크필드(바비
다린 분)이다. 그의 악단은 변두리 마을 회관과 클럽을 전전하며 공연을 이어간다. 어느 날, 고스트는 파티에서 가수 지망생
제스가 노래 부르는 것을 보게 된다. 제스는 고스트의 제안으로 밴드에 합류하고, 둘은 연인이 된다. 그러나 제스를 갈망하는
에이전트 베니는 그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겉으로는 고스트에게 음반 녹음의 기회를 주면서 성공의 길을 함께 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 제스의 등장은 밴드 부원들 사이에 긴장과 질투를 일으키고, 그것은 음반 취입 축하 파티의 예기치 못한
난투극과 얽힌다.
앤소니 만 감독은 짜임새 있는 대본을 바탕으로 신화가 되어버린 재즈 음악인의 삶을 직조해 나간다. 자신만의 음색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밀러는 독자적인 악기 배치와 구성, 편안한 스윙의 음률로 작곡한 곡들로 마침내 정상의 자리에 오른다. 미국 전역에서
밀러의 재즈곡들이 음반과 주크 박스로 쉴 새 없이 흐르게 된다. 그렇게 밀러는 최고의 전성기에 들어선다. 영화의 음악을 담당한
헨리 맨시니는 유려한 편곡으로 밀러의 음악에 빛을 더한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즐거운 부분은 루이 암스트롱을 비롯해 당대
재즈 음악인들의 합동 공연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독보적인 루이 암스트롱의 노래와 연주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영화는
재즈 음악 팬들에게 최고의 선물이 된다.
'글렌 밀러 스토리'의 주인공이 그렇게 성공 신화를 써나가는 것과는 달리, 카사베츠는 자신이 만들어낸 '고스트'에게 그런 장밋빛
미래를 선물해줄 생각이 전혀 없다. 'Shadows(1959)'로 당시 미국 영화계에 이단아처럼 등장한 카사베츠는 관객이 음악
영화에서 기대하는 그 모든 것들을 깨부수기로 마음먹은 것처럼 보인다. 실제 가수이기도 했던 Bobby Darin은 너무나도
유약하고 예민한 음악가 고스트를 연기한다. 제스는 축하 파티에서 자신에게 추근거리는 남자와의 싸움을 피한 고스트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그 곁을 떠난다. 밴드는 해체되고, 고스트는 돈 많은 중년 여성의 애인이 되어 시시한 클럽 연주자의 삶을 이어간다. 베니는
그런 고스트를 조롱한다.
카사베츠의 영화에서 '약함(weakness)'는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테마가 된다. 'Husbands(1970)'의 중년 남자들이
처한 중년의 위기, 'A Woman Under the Influence(1974)'에서 알콜 중독과 우울증으로 무너지는 가정
주부, 늙음과 사그라드는 재능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여배우가 주인공인 'Opening Night(1977)'. 그 영화들 속의
인물들은 그렇게 내면에 자리한 약함과 지리한 싸움을 이어간다. 그들이 가진 '약함'은 '결함(fault)'과는 결을 달리한다.
부족함과 손실의 의미로서의 '결함'은 때로 잘못과 악덕에 가깝지만, '약함'은 그러한 것과는 거리가 있다. 카사베츠는 인간의
내면에 자리한 그 약함이 가져오는 상처와 고통스러운 일면을 부각시킨다. '너무 늦은 블루스'의 고스트는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는
결벽증적이고 유약한 성정(性情) 때문에 자신의 재능을 펼치기도 전에 꺾인다. 그런 고스트와 대척점에 있는 베니는 착취적이고 비열한
유형의 인간으로 세상은 그런 이들에게 더 많이 열려있다.
'너무 늦은 블루스'의 고스트가 자신의 약함으로 몰락의 길을 걷는 것과는 달리, '글렌 밀러 스토리'의 주인공은 엄청난 부와
명예를 '애국'이라는 대의명분 앞에 스스로 내던진다.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그는 38세의 나이로 공군에 입대한다.
당시 많은 재즈 음악인들은 자발적으로 군에 입대해서 군악대 활동으로 시민의 의무를 다했다. 당시 재즈가 미국인의 음악에서
전세계인의 음악이 된 데에는 그렇게 군부대 밴드의 열정적인 활동이 큰 역할을 했다. 밀러는 군에 입대해서 자신의 재즈 음악으로
자유와 평화에 기여하고 싶어했다. 영화는 독일군의 폭격을 받으면서도 군병원에서 위문 공연을 이어가는 밀러와 군악대의 영웅적 행위를
부각시킨다. 밀러의 그러한 애국적 면모는 비행기 사고로 인한 비극적인 죽음과 함께 극의 대미를 이룬다.
시련과 실패를 딛고 일어서 성공의 길을 가던 재즈 음악인의 장렬한 최후, 그렇게 앤소니 만 감독의 '글렌 밀러 스토리'는 당시
미국 관객들의 기대에 부응하며 큰 흥행 성적을 거두었다. 글렌 밀러의 곡들이 담긴 영화 음악 음반도 불티나게 팔렸다. 카사베츠의
음악 영화는 일반 대중들의 취향과는 거리가 있었다. 스튜디오의 제한된 예산과 '한 달'이라는 급박한 촬영일정에 쫓겨서 거의
급조하듯 만든 이 영화를 감독은 평생 증오했다. 파라마운트는 신인 감독에게 새로운 것을 기대했으나 전적인 권한을 주지는 않았다.
제작 과정 내내 파열음을 일으킨 카사베츠는 스튜디오의 상업주의를 경멸했다.
'너무 늦은 블루스'의 주인공 별명이 '고스트(ghost)'인 것처럼, 이 영화를 만든 카사베츠도 메이저 스튜디오의 합작
과정에서 '유령'과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엉성한 내러티브, 대부분 실내 세트 촬영으로 한정된 단조로운 장면들, 영화의 우울한
결말까지 겹쳐서 영화는 겨우 수지타산을 맞추었다. 처참한 흥행 실패를 기록한 United Artists 제작의 'A Child
Is Waiting(1963)'을 끝으로, 카사베츠는 독립 영화 제작자의 길을 걷는다.
나에게 두 영화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나은가를 묻는다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두 영화 모두 각각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다.
'글렌 밀러 스토리'는 비교적 사실에 충실한 전기 영화로서 재즈 팬들에게는 필수 감상 목록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멋진 음악과
루이 암스트롱의 존재감에도 불구하고 제임스 스튜어트의 뻣뻣하고 매너리즘적인 연기는 실망스럽다. '너무 늦은 블루스'는 세련되고 잘
만들어진 음악 영화와는 거리가 멀다. 재능을 가진 약한 인간, 그는 끊임없이 상처받고 결국에는 그저 주변부를 맴도는 인생을
살아간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아는 진짜 현실의 이야기와 더 가까울 것이다. 그렇게 카사베츠가 선사하는 이 씁쓸한 음악 영화는
가슴 아픈 여운을 남긴다.
*사진 출처: tcm.com
**사진 출처: thenewbe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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