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PBS 3부작 다큐멘터리 Ken Burns의 '금주법(Prohibition, 2011)' 1편

1편: A Nation of Drunkards 1시간 34분


1. 들어가며
 
  영화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 2008)'의 조커를 특징짓는 것은 입 가장자리부터 눈가에 이르는 긴 흉터이다. 금주법 시대의 악명높은 갱 '알 카포네(Al Capone)'에게도 그와 같은 흉터가 있었다. 그가 풋내기 갱이었던 시절, 젊은 형제 일행과 시비가 붙었는데 그 일로 카포네의 얼굴에는 조커와 비슷한 흉터가 생겼다. '스카페이스(Scarface)'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한 카포네는 말 그대로 금주법 시대를 대표하는 '무법자'였다. 그는 온 나라가 술을 금지하는 시대에 술로써 자신의 제국을 세웠으며, 결국 그 술로 인해 몰락했다. 'Prohibition'이라는 영단어를 '금주법'을 의미하는 고유명사로 만든 시대. 미국인이 아닌 국외자의 시선으로 보아도 그 시대는 매우 기이하고도 흥미로운 시대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 자신의 역사이기도 했던 현대의 미국민들에게도 그러하다.

  "지금을 사는 미국인들에게도 금주법의 시대란 놀랍게 느껴져요. 어떻게 국가가 나서서 전국민의 음주를 금지시킬 수 있었을까요? 정말이지 그런 정신나간, 미친 시대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인지 궁금해지거든요."

  그 시기는 무려 13년 동안 이어졌다. 미국의 다큐멘터리 제작자 Ken Burns는 미국의 공영방송 PBS와의 협업을 통해 미국 역사에 대한 일련의 다큐멘터리들을 선보였다. 재즈 음악의 연대기를 다룬 10부작 'Jazz(2001)'와 서부 개척기를 다룬  8부작 'The West(1996)'는 그의 대표작이다. '금주법(Prohibition, 2011)'은 3부작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 러닝 타임이 5시간이 넘는 이 다큐를 통해 번즈는 많은 미국인들이 그다지 들여다 보고 싶어하지 않는 그 '정신나간 시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얼핏 보기에 도무지 말이 안되는 '금주법'의 시대는 어떻게 도래했으며, 그 시기 미국인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누군가는 그 시대를 진정으로 반기고 환호했으며, 다른 누군가는 불만과 고통 속에서 견뎌야 했다. 이제 그 시대를 살았던 다양한 목소리들이 켄 번즈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흘러나온다.


2. 금주법으로 향하는 여정

  미 의회에서 금주법이 통과된 것은 1919년의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어느 날 아침에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시작점에는 무려 한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절주 운동(Temperance Movement)'이 있었다. 왜 '술과 음주의 절제'가 사회 운동의 화두로 등장했던 것일까? 미 동부 연안에 처음 발을 내딛었던 이주민들의 '메이플라워호(Mayflower)'에 가득 실렸던 것은 다름 아닌 맥주였다. 술은 초창기 미 개척지 역사에서 매우 중요했다. 낯선 곳에서의 삶은 예측하기 어려운, 고되고 힘든 것이었다. 술이야말로 일상의 희노애락을 함께 하며 고통을 견딜 수 있게 만드는 음료였다. 많은 미국의 도시에서 하루에 두 번 'Grog-time(술 한 잔 하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약한 도수의 술은 1800년대에 이르기까지 점차 독해졌다. 술을 마시는 인구도 늘어났다. 1830년대에 이르면 미국인 한 명이 1년에 소비하는 위스키는 88갤런으로, 그것은 오늘날 현대 미국인이 마시는 소비량의 세 배에 달하는 양이었다. 그야말로 그 시대의 미국인들은 술을 '너무나도 많이' 마셨다.

  주취자에 의한 가정 폭력, 아동 학대, 매춘, 간경화로 인한 높은 사망률...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술이 자리하고 있었다. 첫 움직임은 '교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Lyman Beecher 목사는 여신도들의 고통에 개탄했다. 술 취한 남자들은 일도, 가정 생활도 꾸려나갈 수 없었다. 술은 만악의 근원으로 지목되었다. 1840년, 'Society of reformed drunkards'가 조직되었다. 개신교는 본격적으로 절주 운동을 교회 밖으로 확장시켰다.

  거기에 여성 운동가들도 동참했다. Susan B. Anthony는 그 운동의 선구자였다. 술을 마시는 남편으로 인해 가장 고통받는 이들이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곧 주를 비롯해 의회에 청원 운동을 전개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1851년, 메인주의 포틀랜드에서 시장 Neal Dow에 의해 처음으로 금주법이 시행되었다. 당연히 많은 이들이 반발했고, 시위가 잇따랐다. 그럼에도 술은 의사의 처방에 의해서만 가능한 '의약품'이 되었다. 밀주 판매자들은 자신들의 옷 속에 술을 숨겨서 팔았다. 'Boot-Leggers'라는 단어는 그렇게 생겨났다. 1860년대에 이르면 몇몇 주들이 포틀랜드를 따라 금주법에 동참했다.

  그런 움직임을 중단시킨 것은 '전쟁'이었다. 'Civil War', 미국은 남과 북이 갈리어 치열하게 싸웠다. 전쟁의 공포와 슬픔, 고통을 달래기에 술만한 것은 없었다. 술 소비는 다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재건을 위해 부족한 세수()를 메꾸려는 연방 정부에게도 술은 효자였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국으로 쏟아져 들어온 이민자들은 자신들의 술 문화도 함께 가져왔다. 특히 독일 이민자들은 맥주 제조 비법을 가지고 양조장 사업에 뛰어들었고, 그것은 곧 그들에게 안정된 부를 약속했다. 1870년대에 이르면 맥주 제조업자들은 본격적으로 단체를 세워 정부를 상대로 적극적으로 로비를 하기에 이른다. 맥주는 그렇게 미국인들의 삶에 자리잡는다.

  드디어 여성들이 들고 일어서기 시작했다. 1876년, 오하이오 주지사의 딸 Eliza Jane Thompson은 목사였던 아들이 알콜 중독으로 사망한 것에 충격을 받았다. 톰슨은 오하이오 여성 금주 십자군을 조직했다. 그리고 술집 앞에서 시위대를 이끌고 기도를 하며 연설을 했다. 1883년에는 뛰어난 여성 운동가이며 리더였던 Frances Willard가 'WCTU(Woman's Christian Temperance Union)'를 설립했다. 이후 금주법의 제정을 위해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될 단체였다. 여성 참정권 운동(Suffragette)과 금주법 청원 운동은 궤를 같이 했다. 그들은 과감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공립 교과서에 금주 교육 메시지를 싣는 대가로 리베이트를 주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결과 아이들은 일주일에 세 번, 학교에서 금주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남자들의 사회 생활에 있어 술은 매우 중요했다. 술집(Saloon)을 중심으로 사교와 모임, 정보의 교환이 이루어졌다. 특히 이민자들에게 술집은 고된 노동의 일상을 달래주는 활력소였다. 노동자 계층과 중산층 백인 개신교도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자신들만의 술집을 가지고 있었다. 포주와 깡패, 정치인들도 술집을 끼고 돈을 벌었다. 곳곳에서 알콜 중독자들이 쏟아져 나왔고, 술은 곧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많은 이들은 술집을 없애는 것을 그 해결책으로 생각하게 된다.

  '캐리 네이션(Carry Nation)'이란 이름의 여성이 포문을 열었다. 네이션은 매우 기구한 인생 이력을 갖고 있었다. 어머니는 정신병으로, 첫 남편은 알콜중독으로 죽었다. 재혼은 이혼으로 끝났다. 자신의 고통스런 삶이 모두 '술' 때문이라 생각한 네이션은 기도 중에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모든 술집을 없애는 것'이었다. 네이션의 무기는 '손도끼(hatchet)'였다. 네이션은 가는 술집마다 닥치는 대로 깨부수었다. 네이션이 사는 캔자스주에서는 이미 금주법이 실행되고 있었으나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그것을 네이션은 진짜 실행으로 보여주었다. 체포와 석방이 반복되는 동안 네이션의 이름은 열광과 비웃음을 동시에 받는 대명사가 되었다.

  1893년, 목사 Howard  Russell이 'The Anti-Saloon League'를 조직한다. 성공회를 제외한 개신교 교파들의 금주 연합 단체였다. 루터파 교회들은 참여를 거부했다. 독일계 개신교도들에게 '맥주'를 죄악시한다는 것은 터무니 없는 일이었다. 기민한 조직가이며 행동가였던 Wayne Wheeler는 안티 살롱 리그를 이끌며 정치적 힘을 키워나갔다. 맥주 제조업자들의 힘은 갈수록 커졌다. 맥주 제조업자 Adolphus Busch는 대통령을 친구로 둘 정도였다. 그러자 한편에서는 술이 이민자들의 문화이며 미국적인 것이 아니라는 반감의 정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13년에 이르는 기간에 금주법에 찬성하는 주들이 점차 늘어났다.

  1차 세계 대전은 미국 내 반독일 정서에 불을 붙였다. '독일' 딱지가 붙은 모든 것은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독일계 학교가 파괴되었고, 심지어 독일 견종 닥스 훈트가 돌에 맞아 죽는 경우도 빈번했다. 맥주 산업은 직격탄을 맞았다. 그러나 금주법으로 향하는 여정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우선 48개주의 헌법 제정 청원이 있어야 했다. 하원과 상원에서는 제적 인원 3/2의 찬성표가 필요했다. 그럼에도 그 어려워 보이는 과정은 마침내 1919년에 마침표를 찍었다.

  금주법을 명시한 수정헌법 18조는 1년 후인 1920년부터 시행될 예정이었다. 과연 그 법은 정말로 시행될 것인가? 많은 미국인들은 모든 것이 잘 굴러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법을 제정하는 것과 현실에서 적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미국인들의 낙관적인 감각과는 달리 그들 앞에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진 출처: pbs.org   캐리 네이션을 풍자한 만평과 금주법의 의회 통과 기사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전후 일본 영화(Post-war Japan Movie, 1946-1955) 3편: 전후 일본 사회가 마주한 고통과 혼란,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

    노로는 고등학교 선생이다. 그는 과속을 하는 트럭을 피하려다 손을 다친다. 그가 받는 빠듯한 봉급으로 단칸 월세방 돈 내는 것도 힘든데 병원비까지 나가게 생겼다. 그는 학교에서 그의 봉급을 올려주길 기대한다. 하지만 깡패같은 고등학교 이사장은 노로에게 야간 고등학교 강의까지 더하라고 강권한다. 천성이 유약한 노로는 '아니오'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다.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 노로. 그는 자신의 제자가 권유한 반정부 시위에 나가보기로 한다. 시위대는 경찰의 강경대응으로 무참히 진압되었다. 노로는 경찰서에 끌려갔다가 겨우 풀려난다. 하지만 이 일을 빌미로 이사장은 노로를 해고한다. 전후의 어려운 시절, 노로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이치카와 곤(市川崑, Kon Ichikawa) 감독의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는 고등학교 선생 노로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후 일본 사회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원작이 되는 만화가 있다. 만화가 요코야마 타이조(横山泰三)는 1950년부터 1953년  마이니치 신문(毎日新聞)에 4컷 만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를 연재했다. 4컷 만화에 담긴 날카로운 사회비판적 메시지 때문에 만화는 연재 중단의 압력을 받았다. 이치카와 곤은 그 만화에서 영화의 주요한 소재를 차용했다.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는 명확한 서사 대신에 다양한 등장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영화의 그러한 구성은 전후 일본 사회의 여러 면면들을 부각시킨다.    노로는 다친 손의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간다. 그런데 의사는 노로의 몸을 진찰하더니 '영양실조'라면서 잘 먹어야 한다고 처방을 내린다. 젊은 의사는 환자들 대부분이 제대로 먹지 못해 건강이 좋지 않다고 말한다. 노로가 의사에게 손을 치료받고 싶다고 하자, 의사는 병원의 X-ray 기계가 고장나서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장면은 전후

Shirley Clarke의 실패한 타자성 탐구, Portrait of Jason(1967)

  1. 이상한 나라의 Jason Holliday   한 남자가 자신을 소개한다. 자신의 이름이 Jason Holliday라고 말한 그는 본명이 Aaron Payne이라고 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 유명한 재즈 연주자)와도 안다고 말하는 그는 자신이 가진 직업을 줄줄이 늘어놓는다. 그가 말한 직업들 중에는 남창(whore)도 있다. 손에 술잔을 든 그는 심부름꾼(houseboy)으로 시작한 자신의 인생 역정을 늘어놓는다. 미국의 독립 영화 제작자 Shirley Clarke는 1966년 12월 3일, 자신이 머물던 첼시 호텔(Hotel Chelsea) 펜트 하우스에서 제이슨 할러데이의 인생 이야기를 주제로 다큐를 찍었다. 저녁 9시에 시작된 촬영은 12시간 동안 이어졌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Portrait of Jason(1967)'이다.   제이슨은 술에 취해 기분이 아주 좋아보인다. 화면 밖에서 목소리로만 들리는 셜리 클라크는 제이슨에게 질문을 던지며 그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도록 유도한다. 마치 인형극의 조종하는 사람(puppeteer)처럼 클라크는 제이슨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려는 것 같다. 흑인이며 동성애자이기도 한 제이슨에게 미리 준비해놓은 소품으로 작은 공연을 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소품 가방에서 꺼낸 모피 목도리를 두르고는 제이슨은 여성스럽고도 우스꽝스러운 제스처를 취하며 킬킬거린다. 제이슨이 원하는대로 술과 담배가 계속해서 제공된다. 시간이 갈수록 술에 취한 제이슨의 말소리는 알아듣기 어렵게 뭉그러진다.   러닝 타임 1시간 45분의 이 다큐 'Portrait of Jason(1967)'은 보면 볼수록 기이하다. 관객은 'Jason Holliday'라는 인물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도록 초대받지만, 다큐가 끝나고 나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가장 큰 이유는 제이슨이 가진 뛰어난 공연자(performer)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