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전후 미국 중산층의 불안과 공허, Come Back, Little Sheba(1952)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 1954)'에는 '고도(Godot)'라는 이름의 사람을 기다리는 두 명의 남자 디디와 고고가 등장한다. 이 기념비적인 실존주의 희곡에서 디디와 고고가 애타게 기다리는 그 '고도'는 등장하지 않는다. 다니엘 만(Daniel Mann) 감독의 'Come Back, Little Sheba(1952)'에서도 제목에 나오는 'Sheba'는 영화 속에서 볼 수 없다. 주인공인 중년 부인 롤라는 키우던 강아지 시바를 몇 달 전 잃어버렸다. 너무나 아끼는 사랑스러운 강아지였기에 롤라는 생각이 날 때면 현관 문 앞에서 자신의 강아지를 애타게 부른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고도'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듯, 이 영화에서도 잃어버린 강아지 이름 '시바' 또한 상징성을 가진다.

  영화는 중년의 주부 롤라가 새 하숙인 마리에게 방을 안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반짝반짝 빛나는 젊음과 아름다움을 가진 여대생 마리와 집주인 롤라는 모든 것이 대비된다. 마치 자다가 곧바로 일어나서 손님을 맞이하는 듯한 매무새의 롤라. 척추지압사(chiropractor)인 남편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롤라를 대하는 태도가 매우 냉담하다. 관객은 곧 이들 부부에게 어떤 문제가 있음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그 문제들 가운데 큰 부분이 닥의 알콜 중독과 관련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부부는 알콜 중독자 치유 모임 'AA(Alcoholics Anonymous)'에 참여하는데, 그곳에서 닥은 금주 1주년을 기념하는 케이크를 받는다.

  어렵게 술과 멀리하고 있기는 하지만 닥의 상태는 불안정하게 보인다. 그는 하숙인으로 들어온 마리의 존재에 관심을 갖는다. 그런데 이 발랄한 아가씨는 집안으로 남자 친구를 끌어들이는 것을 별로 주저하지 않는다. 마리의 남자 친구 터크의 잦은 방문은 닥과 롤라 부부의 일상에 기묘한 긴장과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닥은 어느 날 저녁, 거실에서 두 사람이 키스를 나누는 것을 목격한다. 마리에게 자신의 젊은 날과 순수함을 투사했던 닥은 실망하고, 결국 찬장 안에 숨겨둔 술을 꺼내는데...

  극작가 William Inge는 1950년, 2막으로 구성된 첫 희곡 작품 'Come Back, Little Sheba'를 발표한다. 희곡은 곧 무대에 올려졌고, 꽤 인기가 있어서 190회에 달하는 상연 기록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2년 뒤에 영화로 만들어졌다. 연극의 주연 배우였던 셜리 부스(Shirley Booth)가 롤라 역을 그대로 맡았고, 닥 역은 버트 랭커스터에게 돌아갔다. 사실 랭커스터는 그 역을 맡기에는 무척 젊은 나이였다. 상대역인 셜리 부스는 그보다 15살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랭커스터는 배역에 욕심을 냈고, 매우 의욕적으로 연기에 임했다. 좀 낯설게 보이기는 하지만, 랭커스터는 과거에 대한 회한으로 괴로워하는 알콜 중독자 역을 나름대로 잘 소화해 냈다.

  랭커스터가 연기하는 '닥'이라는 인물이 술에 빠지게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영화는 닥과 롤라의 대화를 통해 관객에게 그들의 과거를 알려준다. 의대생이었던 닥은 롤라와 사귀다 아이가 생기는 바람에 억지로 결혼했다. 그러나 아이는 유산되고, 닥은 결혼 때문에 의대를 끝마치지 못하고 척추지압사가 되었다. 닥은 그 모든 불운과 고통을 아내 롤라의 탓으로 여기면서 술에 의지한다. 롤라는 그런 남편에게 매우 의존적이며 순종적으로 행동한다. 별다른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롤라의 일상은 라디오 청취와 이웃들에 대한 관찰과 수다로 채워진다.

  아마도 독자들은 여기까지만 본다면, 이 우울한 부부의 이야기가 무어 그리 대단할 것이 있겠는가 싶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당시 미국 사회를 조망할 수 있는 풍부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영화 속에서 닥은 마리에 대한 자신의 기대가 어긋나게 되자 좌절감에 다시 술에 손을 댄다. 그는 술에 취해 칼을 들고 난동을 부리며 아내를 죽이겠다고 위협한다. 당시 미국 영화의 자율적 검열 기준인 'Hays Code'는 과도한 음주와 관련된 부분 또한 규제의 대상에 넣었다. 그런 면에서 영화의 후반부에 버트 랭커스터가 보여준 알콜 중독자의 적나라한 실상은 당시의 관객들에게 어느 정도 충격적이었다. 이 영화가 다루는 알콜 중독의 문제는 이전에 제작된 1945년작 '잃어버린 주말(The Lost Weekend)'과 궤를 같이 한다. 빌리 와일더 감독의 그 영화도 알콜 중독자가 주인공이다. 

  술은 원작자 윌리엄 잉지를 괴롭혔던 문제이기도 했다. 영화 속의 닥처럼 그도 1948년에 알콜 중독자 치료 모임인 'AA'에 참여했다. 자신의 내면적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잉지는 그즈음에 프로이트 심리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Come Back, Little Sheba'에는 그 시기 잉지의 개인적 경험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영화에 내재된 프로이트 심리학의 흔적은 매우 분명해서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 롤라가 거실에서 틀어놓는 라디오에서 진행자는 나른한 음악으로 일상에서 탈출하라고 말한다. 그 음악으로 채워지는 '15분간의 유혹'을 진행자는 '터부(taboo)'라는 말로 표현한다. 금기시 되는 유혹, 좌절된 과거의 고통과 상처는 닥과 롤라 부부를 중독으로 이끌었다. 닥은 '술'에, 롤라는 '잠과 나태함'에 중독되어 있다.

  그런데 롤라의 무료함과 게으름은 어떤 면에서 개인적인 문제로만 볼 수 없다. 2차 대전 시기에 다양한 산업 분야의 노동자로 종사하며 '국내 전선(Home Front)'을 지켰던 여성들은 종전과 함께 가정으로 복귀했다. 여성들이 떠난 자리는 돌아온 군인들로 채워졌다. 가정은 다시 여성들의 사적 노동의 장소가 되었다. 롤라는 이웃 코프만 부인과 잃어버린 강아지 시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데, 코프만 부인은 그것은 지난 일이니 바쁘게 지내면서 잊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아이 넷을 키우느라 늘 바쁜 코프만 부인이 보기에 롤라의 한탄은 한가로운 잡담처럼 들린다. 그러나 아이가 없는 롤라는 잉여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할지 모른다. 롤라와 같은 중산층 주부의 남아도는 시간은 전후 부흥하는 미국 경제 체제 하에서 소비주의로 이어졌다.  

  'Come Back, Little Sheba'가 보여주는 또 다른 흥미로운 지점은 마리와 터크의 관계로 대변되는 성적인 개방성이다. 마리는 터크를 집으로 데려와 드로잉 모델을 하게 한다. 팔과 다리가 다 드러난 짧은 운동복 차림의 터크를 본 롤라는 당혹스러워 한다. 터크가 들고 있는 창은 길고 뾰족한 모양으로 프로이트 심리학에서의 '남근 상징(phallic symbol)'에 속한다. 영화에서는 마리가 터크의 집요한 유혹을 거부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그 드로잉 장면은 둘의 관계에 대한 은유적인 단서를 드러낸다.

  닥은 터크의 존재에 불만을 터뜨리며, 롤라에게 마리가 잘못되면 모두 롤라 탓이라고 엄포를 놓는다. 혼전 관계로 생긴 아이 때문에 억지로 결혼한 그들 부부에게 과거는 오점으로 남아있다. 닥이 술로 난동을 피운 후, 롤라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아버지의 방문을 요청하지만 거절당한다.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부부는 롤라의 부모에게 용인되지 못한다. 롤라와 부모의 단절된 관계는 당시 기성 세대가 혼전 관계에 매우 보수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제 관객들은 왜 롤라가 집 현관 앞에서 '시바야, 어서 돌아오렴!', 하고 그토록 애타게 잃어버린 강아지를 불렀는지 알게 된다. 시바는 단순한 강아지의 이름이 아니라, 롤라가 잃어버린 모든 것이다. 불운하게 잃은 아기, 젊음, 남편의 사랑, 그리고 생에 대한 열정까지... 시바처럼 그 모든 것들이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롤라는 애절하게 외친다. 롤라 그 자체를 연기한 셜리 부스는 첫 출연한 이 영화로 그해 아카데미와 골든 글로브, 칸 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평생을 알콜 중독과 우울증으로 씨름했던 원작자 윌리엄 잉지는 예순이 되던 해,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그는 'Come Back, Little Sheba'에 전후 미국 사회와 중산층의 불안하고 공허한 내면 풍경을 심리학적 상징과 함께 펼쳐 놓는다.



*영화화된 William Inge의 작품: 1번과 2번은 희곡 원작, 3번은 오리지널 시나리오

1. 피크닉(Picnic, 1955): 윌리엄 홀덴 주연. 마을을 찾은 낯선 방문자가 일으키는 파문.
2. 버스 정류장(Bus Stop, 1956): 풋내기 로데오 선수의 사랑 찾기. 마릴린 먼로는 과거를 가진 술집 댄서로 나온다.
3. 초원의 빛(Splendor in the Grass, 1961): 나탈리 우드, 워렌 비티 주연. 청춘의 상처와 그늘을 담아낸 영화.



**알콜 중독과 관련된 전후 할리우드의 주목할 만한 작품

1. 잃어버린 주말 (The Lost Weekend, 1945): 빌리 와일더 감독. 알콜 중독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1940년대 할리우드의 대표작.
2. 고독한 영혼(In A Lonely Place, 1950): 니콜라스 레이 감독. 험프리 보가트가 다혈질의 시나리오 작가로 나온다. 그의 심리적인 문제는 알콜 의존증과 깊은 관련을 가진다.


***사진 출처: britannica.com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

황량하고 고독한 결혼의 풍경, 아내(妻, Wife, 1953)

  *이 글에는 '아내(妻, 1953)'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카가와와 미네코는 결혼 10년차 부부다. 영화는 부부 각자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관객은 결혼 10년 동안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서로 푸념하는 부부의 속내를 듣게 된다. 이 부부에게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그들은 별다른 소통도 하지 않고 얼굴을 바라보는 일도 거의 없다. 아내에게 마음이 멀어진 남편은 사무실의 여직원에게 마음이 기운다. 무뚝뚝하며 돈에 집착하는 아내와는 달리, 여직원 사가라는 사근사근하고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성품을 지녔다. 아내가 아닌 새로운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나카가와. 아내는 남편의 변화를 눈치채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해 남편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한다. 과연 이 부부는 같이 살아갈 수 있을까? '아내(Wife, 1953)'는 나루세 미키오의 '방랑기(1962)' 원작자이기도 했던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의 '갈색의 눈동자'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영화는 위기에 처한 부부를 통해 결혼 생활의 황량하고 고독한 풍경을 그려낸다.   나카가와는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사무실에서 점심으로 먹는데, 밥에서 머리카락이 나온다. 미네코는 확실히 살림에는 별 뜻이 없는 듯하다. 그들 부부의 화해를 위해서 미네코의 친구는 장을 봐와서 식사 준비를 하려고 한다. 그런데 친구가 본 미네코의 주방은 제대로 된 칼도 없고, 그나마 그 칼도 무딘 상태다. 친구는 자취생의 주방 같다고 말하고, 나카가와는 아내의 음식은 맛이 없다고 답한다. 이 아내는 그렇다고 남편의 심기를 잘 헤아리는 것도 아니다. 저녁에 책 좀 읽고 자려는 남편 옆에서 과자를 우적우적 소리를 내며 먹는다. 식사하고 나서는 젓가락으로 이를 아무렇지 않게 쑤시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아내에게 나카가와는 마음이 멀어진다. 그렇다면 미네코의 삶의 낙은 뭘까? 교외에 2층 단독 주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세를 놓아 살림에...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의 삶과 작품 세계를 다룬 다큐 세 편

  1. BBC 다큐 'Francis Bacon : A Brush with Violence(1997)', 1시간19분 2. The South Bank Show 제작 'Francis Bacon(1985)', 55분 3. 미국 휴스턴 미술관(The Museum of Fine Arts, Houston) 제작, Francis Bacon: Late paintings(2020), 55분 * 위 세 편의 다큐들은 모두 유튜브에서 검색 가능함.   1945년, 런던의 전시회에 걸린 그의 삼면화(triptych, 세 개가 이어진 그림으로 주로 가톨릭의 제단화에 쓰였음)는 관객들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2차 대전이 막 끝난 직후여서 사람들은 가급적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들을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화가는 기괴하게 변형된 신체와 인물의 이미지들을 자신의 그림 속에 계속해서 변주해 나갔다. 그는 동성애자였으며, 술과 도박에 빠져 지냈고, 그림으로 누릴 수 있는 명예와 부를 생전에 다 누렸다. 죽어서도 그의 그림을 비롯해 쓰레기 같은 잡동사니 소장품이 엄청난 가격에 팔리고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아마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도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를 무시무시한 이미지로 그려낸 초상 연작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1997년에 BBC에서 제작한 다큐는 화가 베이컨의 일대기와 작품, 그의 주변 지인들의 인터뷰를 충실하게 담고 있다. 이 다큐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화가의 작품 세계에 입문하려는 이들에게 아주 좋은 안내자가 되어준다. 거칠고 폭력적인 아버지와의 불화, 베를린과 파리에서 지냈던 20대 초반의 시절,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시작했던 경력의 초창기,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하는 30대, 그리고 그의 동성 연인들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베이컨은 자신의 성적 지향을 드러내는 것에 무척 솔직했다. 동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