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PBS 3부작 다큐멘터리 Ken Burns의 '금주법(Prohibition, 2011)' 3편

 

1편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1/pbs-3-ken-burns-prohibition-2011-1.html
2편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1/pbs-3-ken-burns-prohibition-2011-2.html



되찾은 자유의 감각

3편: A Nation of Hypocrites 1시간 45분


  콜럼버스, 워싱턴, 링컨, 볼스테드. 누군가 미국 역사는 이 네 명의 인물로 요약될 수 있다고 말했다. 볼스테드 법은 금주법의 시대를 열었다. 무려 13년 동안 미국인들에게 음주는 불법이었다. 자유롭게 술을 마실 권리, 이제 누군가는 그 대의명분을 위해 나서야만 했다. 1926년 6월, 뉴욕의 공화당 의원은 기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기자들 앞에서 '시원하게 맥주 한 잔을 들이켰다'. 정치인들도 금주법이 가진 폐해에 공감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표를 주는 유권자들의 마음이 변했던 것이다. 1920년대의 미국은 급변하고 있었다. 대도시들이 급속도로 성장했고, 문화적인 면에서도 자유의 분위기가 흘러 넘쳤다. 흑인 음악으로 시작한 재즈가 일반 대중의 삶으로 스며들었다. 클럽은 재즈 음악과 춤추는 젊은 남녀들로 미어터졌다. 거기에 술이 빠질 수 없었다. 물론 몰래 파는 술이었다.

  주류 산업은 지하 세계에서 번성하고 있었다. 금주법이 시행되던 1920년대에 70만개의 증류소에 50만 명이 그 사업에 종사했다. 'speakeasy'라고 불리는 무허가 술집이 얼마나 많은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뉴욕의 밤문화를 지배한 비밀 술집은 경찰의 단속에 의해 사라졌다가 다른 곳에서 문을 열기를 반복했다. 술집에는 남자 손님만 있지는 않았다. 젊은 독신 여성들에게도 술은 인기였다. 금주법 이전 시대에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여성은 매춘부로 여겨졌다. 세대가 변했고, 여성들은 훨씬 더 술에 관대해졌다.

  시카고에서는 한바탕 피바람이 일었다. 카포네는 경쟁자 Bugs Moran을 제거하는 데에 혈안이 되었다. 1926년과 1927년에 갱단원들은 시카고 도심 한복판에서 총격전을 벌였다. 살인자들은 기소되었으나 그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배심원들을 비롯해 검사와 판사 모두 돈을 받았다. 증인들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로 일관했다. 언론에서는 증인들이 'Chicago amnesia(시카고 기억상실증)'를 앓고 있다고 조롱했다. 다른 대도시 갱단 리더들에게도 시카고는 기막힌 곳이었다. 뉴욕을 지배하던 갱단 일파의 우두머리 Lucky Luciano는 시카고를 둘러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여긴 진짜 미친 도시야(a real goddamn crazy place)!'

  카포네는 어둠 속에서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매우 미디어 친화적(!)인 독특한 마피아였다. 그는 기자들을 불러 모아 회견도 자주 했다. 기자들이 써내는 기사에서는 카포네로부터 받은 돈이 흘러다녔다. 사람들은 신문에서 카포네의 생각을 읽었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화제가 되었다. 그는 악당이면서 동시에 인기스타였다. 사람들은 카포네를 보기 위해 그가 가는 곳마다 몰려다녔다. 시카고는 사실상 그가 지배하는 거대한 제국이었다.

  점차 많은 미국인들이 금주법에서 돌아설 무렵인 1928년, 미국의 31대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치뤄졌다. 민주당 후보는 뉴욕 주지사였던 Al Smith, 공화당은 Herbert Hoover를 내세웠다. 앨 스미스는 금주법 폐지론자였다. 후버도 금주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금주법을 찬성하는 지지자들의 표 또한 소중했다. 안티 살롱 리그는 스미스의 낙선 운동에 열을 올렸다. 법무부 장관 빌레브란트는 아예 대놓고 앨 스미스를 비난하며 노골적인 선거 운동을 했다. 금주법 옹호의 여전사로서 빌레브란트는 큰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후버가 당선이 되면 자신의 공을 알아줄 것이라 생각했다.

  토사구팽(兔死狗烹). 대통령이 된 후버의 새 내각 명단에 빌레브란트의 이름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후버는 금주법이 끝물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것을 알게된 빌레브란트는 사표를 던지고 공직을 떠났다. 그리고 곧 새로운 직함을 얻었다. 포도 농축액 회사의 법률 자문이었다. 그곳은 포도주를 만들 수 있는 포도 원액을 제조하는 회사였다. 금주법 투사는 전직 공무원의 이해상충이라는 비난도 가볍게 무시해 버렸다. 퇴직 관료로서의 명예보다 소중한 것은 돈이었다.

  1927년, 웨인 휠러가 세상을 떴다. 그는
'Anti-Saloon League'를 이끌며 금주법을 구체적으로 설계한 인물이었다. 빌레브란트의 퇴진과 함께 금주법 지지자들에게 휠러의 죽음은 뼈아픈 손실이었다. 그들은 구심점을 잃었다. 금주법은 점점 쪼그라드는 풍선처럼 되어갔다. 그와는 달리 금주법을 폐지하자는 이들의 목소리가 커져가고 있다. 그 중심에는 한 명의 여성이 있었다. Pauline Sabin, 매우 부유한 뉴요커였던 사빈은 공화당 지지자로서 후버의 선거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후버가 금주법에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자 과감하게 돌아섰다. 사빈은 '전국 금주법 개혁을 위한 여성 단체(WONPR)'를 설립했다. 금주법의 제정에 앞장섰던 이들도 여성이었고, 그것을 없애기 위해 가장 역동적으로 움직였던 이들도 여성이었다.

  처음엔 자신의 두 아들에게 금주법이 지배하는 세상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부유층의 여성 인사는 그렇게 금주법 폐지의 선봉장이 되었다. 1929년에 세워진 이 단체의 회원은 곧 150만 명에 달했다. 이 숫자는 반대 진영의 여성 단체 'WCTU'의 3배였다. 'WONPR'은 사빈이 가진 유명 인사로서의 아우라에 기대고 있었다. 중산층 주부들에게 그곳은 부유하고 지적인 이들의 모임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마치 팬클럽에 가입하는 것처럼 많은 여성들이 사빈의 단체에 회원이 되었다. 사빈이 이끄는 'WONPR'은 이후 금주법 폐지 운동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렇게 금주법 폐지를 외치는 깃발이 휘날릴 무렵, 'Scarface' 알 카포네의 좋은 시절도 끝나가고 있었다. 라이벌 벅스 모란과의 일전은 그 유명한 1929년의 '발렌타인 데이의 대학살(Saint Valentine's Day Massacre)'로 정점을 찍었다. 1931년, 카포네는 탈세 혐의로 기소된다. 결국 카포네는 감옥에 갇혔다. 미국 대도시 갱단 리더들의 이권 다툼은 갈수록 치열해졌다. 그들에게 금주법은 계속해서 돈을 쏟아내는 화수분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그 화수분은 어느 날 갑자기 금이 가버렸다. 1929년, 미국에 대공황의 강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후버 정부는 대공황의 여파를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늘어나는 실업자들을 구제하고,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재정이었다. 안정적인 세수(稅收)의 확보가 시급했다. 재정이 쪼들리는 판국에 금주법 단속에는 여전히 돈이 나가고 있었다. 금주법을 폐지하면 주류 산업이 합법화되면서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고, 세금도 거둘 수 있었다. 금주법 폐지를 당론으로 내건 민주당 의원들이 상원과 하원에서 점차로 세를 불려나갔다. 1932년, 금주법 폐지를 공약으로 내건 민주당의 프랭클린 D. 루즈벨트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수정헌법 21조는 금주법을 명시한 수정헌법 18조를 폐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미국 헌정 사상 다른 헌법 조항을 폐지하기 위해 새로운 헌법을 만든 경우는 전무후무했다. 1933년 12월 5일, 수정헌법 21조가 미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13년 10개월 18일' 동안 미국인들의 삶을 지배했던 금주법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많은 이들이 술집에서 환호하며 자축했다. 금주법과 함께 흥했던 암흑가 갱단들에게 그 소식은 폐업신고서 같았다. 주 수입원의 상실로 그들의 세력 확장은 잠시 중단되었다. 그들은 이후 '마약 밀매'라는 새로운 사업 수단으로 눈을 돌린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금주법이 미국 내 범죄 조직을 고착화시킨 주요한 요인이라고 평가한다.

  술을 자유롭게 마실 수 있는 권리. 이제 술로 인한 문제는 법이 아니라 개인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다. 여전히 알콜 중독자들은 사회 문제로 남아있었다. 1935년, 알콜 중독자들을 위한 치료 모임 'AA(Alcoholics Anonymous)'가 민간인들에 의해 결성되었다. 미국인들은 과도한 음주가 가지는 위험성과 함께 그것을 국가가 강제적으로 해결하려고 나섰을 때의 폐해 또한 목격했다. 과연 금주법이 미국인들에게 남긴 유산은 무엇일까? 금주법 시대를 거치면서 미국인들의 주류 소비량은 상당 부분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미국인들은 되찾은 '자유의 감각'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국가가 결코 침해할 수 없는 '개인의 소중한 권리'에 대한 자각이야말로 금주법이 미국인들의 내면에 남긴 가장 강렬한 흔적이었다. 

 


*사진 출처: pbs.org  후버의 대통령 당선을 도왔지만 결국 외면당한 금주법 여전사 빌레브란트

 

**사진 출처: pbs.org     '잘 가라, 금주법!'   금주법 폐지에 환호하는 시민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

황량하고 고독한 결혼의 풍경, 아내(妻, Wife, 1953)

  *이 글에는 '아내(妻, 1953)'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카가와와 미네코는 결혼 10년차 부부다. 영화는 부부 각자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관객은 결혼 10년 동안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서로 푸념하는 부부의 속내를 듣게 된다. 이 부부에게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그들은 별다른 소통도 하지 않고 얼굴을 바라보는 일도 거의 없다. 아내에게 마음이 멀어진 남편은 사무실의 여직원에게 마음이 기운다. 무뚝뚝하며 돈에 집착하는 아내와는 달리, 여직원 사가라는 사근사근하고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성품을 지녔다. 아내가 아닌 새로운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나카가와. 아내는 남편의 변화를 눈치채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해 남편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한다. 과연 이 부부는 같이 살아갈 수 있을까? '아내(Wife, 1953)'는 나루세 미키오의 '방랑기(1962)' 원작자이기도 했던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의 '갈색의 눈동자'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영화는 위기에 처한 부부를 통해 결혼 생활의 황량하고 고독한 풍경을 그려낸다.   나카가와는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사무실에서 점심으로 먹는데, 밥에서 머리카락이 나온다. 미네코는 확실히 살림에는 별 뜻이 없는 듯하다. 그들 부부의 화해를 위해서 미네코의 친구는 장을 봐와서 식사 준비를 하려고 한다. 그런데 친구가 본 미네코의 주방은 제대로 된 칼도 없고, 그나마 그 칼도 무딘 상태다. 친구는 자취생의 주방 같다고 말하고, 나카가와는 아내의 음식은 맛이 없다고 답한다. 이 아내는 그렇다고 남편의 심기를 잘 헤아리는 것도 아니다. 저녁에 책 좀 읽고 자려는 남편 옆에서 과자를 우적우적 소리를 내며 먹는다. 식사하고 나서는 젓가락으로 이를 아무렇지 않게 쑤시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아내에게 나카가와는 마음이 멀어진다. 그렇다면 미네코의 삶의 낙은 뭘까? 교외에 2층 단독 주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세를 놓아 살림에...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의 삶과 작품 세계를 다룬 다큐 세 편

  1. BBC 다큐 'Francis Bacon : A Brush with Violence(1997)', 1시간19분 2. The South Bank Show 제작 'Francis Bacon(1985)', 55분 3. 미국 휴스턴 미술관(The Museum of Fine Arts, Houston) 제작, Francis Bacon: Late paintings(2020), 55분 * 위 세 편의 다큐들은 모두 유튜브에서 검색 가능함.   1945년, 런던의 전시회에 걸린 그의 삼면화(triptych, 세 개가 이어진 그림으로 주로 가톨릭의 제단화에 쓰였음)는 관객들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2차 대전이 막 끝난 직후여서 사람들은 가급적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들을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화가는 기괴하게 변형된 신체와 인물의 이미지들을 자신의 그림 속에 계속해서 변주해 나갔다. 그는 동성애자였으며, 술과 도박에 빠져 지냈고, 그림으로 누릴 수 있는 명예와 부를 생전에 다 누렸다. 죽어서도 그의 그림을 비롯해 쓰레기 같은 잡동사니 소장품이 엄청난 가격에 팔리고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아마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도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를 무시무시한 이미지로 그려낸 초상 연작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1997년에 BBC에서 제작한 다큐는 화가 베이컨의 일대기와 작품, 그의 주변 지인들의 인터뷰를 충실하게 담고 있다. 이 다큐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화가의 작품 세계에 입문하려는 이들에게 아주 좋은 안내자가 되어준다. 거칠고 폭력적인 아버지와의 불화, 베를린과 파리에서 지냈던 20대 초반의 시절,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시작했던 경력의 초창기,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하는 30대, 그리고 그의 동성 연인들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베이컨은 자신의 성적 지향을 드러내는 것에 무척 솔직했다. 동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