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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의 영혼에 사무라이의 시대를 비추어 보다, 대보살 고개(大菩薩峠, The Sword of Doom, 1966)

 

  노인은 손녀딸과 함께 대보살 고개에 다다른다. 손녀딸이 잠시 물을 뜨러 간 사이, 노인은 작은 석탑 앞에서 기도를 올린다. 손녀딸 더는 고생시키지 않게 얼른 이 늙은 몸을 데려가 달라고 되뇌인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인기척이 난다. 방랑승의 복장을 한 남자는 일순간에 칼을 휘둘러 노인의 목숨을 빼앗는다. 손녀딸 오마츠는 할아버지의 시신을 발견하고 오열한다. 아무 이유 없이 노인을 죽인 살인자의 이름은 류노스케(나카다이 타츠야 분). 사무라이인 그는 뛰어난 검술을 지녔으나, 그 영혼은 사악함으로 물들어 있다. 오카모토 키하치 감독의 영화 '대보살 고개(大菩薩峠, The Sword of Doom, 1966)'는 막부 말기, 어지러운 시대 상황 속에서 피와 광기에 사로잡힌 검귀(劍鬼) 류노스케의 행적을 따라간다.

  영화가 시작되면 '1860년 봄, 사쿠라다몬 사건(桜田門外の変, The Sakuradamon Incident) 직후'라는 자막이 뜬다. 그 사건은 막부 대신 이이 나오스케가 존황양이파 사무라이들에 의해 암살당한 일을 가리킨다. 사쿠라다몬 사건은 막부의 권위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이후 막부파와 천황파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막부 시대의 종말을 재촉하는 계기가 된다. 오카모토 키하치 감독의 영화 '사무라이(侍, Samurai Assassin, 1965)'는 바로 그 사건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시대극이다. '대보살 고개'는 '사무라이(1965)'에서 이어지는 막부 말기 시대극 연작같은 느낌도 준다. 천황파의 공세 속에서 막부파라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1863년, 막부를 옹위하기 위해 '신선조(新選組)'가 결성된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면 영화 이해에 도움이 된다.

  죄없는 순례자 노인을 죽인 일은 류노스케의 내면이 심각하게 어그러져 있음을 입증한다. 류노스케는 검술 문파 사이의 평가전에서 상대방을 가차없이 죽인다. 대결 전에 남편을 위해 져달라는 부탁을 하러 간 오하마는 류노스케에게 겁탈당한다. 그 일로 류노스케는 아버지와 문파로부터 쫓겨난다. 류노스케는 신선조에 들어가고, 오갈 데가 없어진 오하마는 류노스케와 함께 하며 아들을 낳는다. 살기를 내뿜는 류노스케의 칼은 그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운명도 뒤흔든다. 할아버지를 잃은 오마츠는 처음엔 영주의 시녀가 되었다가, 결국은 유곽에 팔려 게이샤가 된다. 형을 류노스케에게 잃은 효마(카야마 유조 분)는 복수를 위해 시마다(미후네 토시로 분)의 문하에 들어가 검술을 연마한다.

  영화의 원작자 '나카자토 카이잔(中里介山, 1885-1944)'이 미완성으로 남긴 소설 '대보살 고개'는 불교적 세계관인 '연기(緣起)'를 바탕으로 한다. 영화는 악업을 쌓아나가는 류노스케의 행로를 따라간다. 그의 칼에는 오로지 죽음만이 존재한다. 순례객 노인과 오하마의 남편은 죽일 이유가 없는데도 죽였다. 살인의 광기에 사로잡힌 이 남자는 급기야 자신의 아이를 낳은 오하마까지 죽여버린다. 그런 류노스케의 살인귀적 본성은 혼란한 시대 상황 속에서 오히려 각광을 받는다. 류노스케는 신선조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는다. 영화 속 신선조는 천황파에 대한 무차별적인 테러와 암살을 일삼는 폭력집단에 지나지 않는다. 세리자와와 콘도 이사미는 신선조 내부의 권력을 두고 투쟁한다. 세리자와는 류노스케를 자신의 사냥개처럼 부린다.

  '대보살 고개'가 보여주는 막부 말기의 혼란상은 새로운 시대로의 개벽을 위한 어둠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지배 계급 내부의 주도권 쟁탈전이었을 뿐이다. 신선조의 후원 요청을 받은 영주는 막부파와 천황파 모두 관심이 없다며 거절한다. 이 냉소적인 영주는 시녀 오마츠에게 살벌한 게임을 제안하면서 의미심장한 비유를 한다. 그는 막부와 천황은 철갑으로 무장하고 있으며, 그들을 받치는 사무라이들은 그 무게 때문에 가라앉는 중이라고 말한다. 그 낡은 권력의 껍질이 이제 벗겨지고 있다면서, 영주는 단검으로 오마츠의 기모노를 오비(허리끈)부터 하나씩 잘라내기 시작한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는 8분에 이르는 류노스케의 혈투이다. 류노스케는 자신이 죽인 무수한 이들의 망령(亡靈)에 사로잡힌다. 아무도 없는 빈 방에서 광분하며 칼을 휘두르는 그에게 콘도 이사미의 수하들이 들이닥친다. 폐쇄된 공간 속에 오로지 피와 비명과 죽음만이 존재한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에도 막부 시기 축적된 '무(武)'의 단말마적 최후이기도 하다. 죽어가면서도 류노스케는 칼을 휘두르는 것을 멈출 수 없다. 오카모토 키하치는 이 무시무시한 악인 사무라이의 살기를 정지 화면(freeze frame) 속에 가두면서 영화를 끝낸다. 영화 '대보살 고개'는 악인 류노스케를 통해 죽음이 횡행하는 막부 말기의 폭압적 체제 변화를 통렬하게 부각시킨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에도 막부 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

고샤 히데오 감독, 나카다이 타츠야 주연의 '어용금(御用金, Goyokin, 1969)'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6/goyokin-1969.html

미후네 토시로 주연의 '신선조(新選組, Shinsengumi, 1969)'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8/shinsengumi-1969.html

카와시마 유조 감독의 '막말태양전(Sun in the Last Days of the Shogunate, 1957)'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6/sun-in-last-days-of-shogunate-1957.html


***오카모토 키하치 감독의 사회 비판적인 현대극 '에부리만 씨의 우아한 생활(The Elegant Life of Mr. Everyman, 1963)'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1963.html

나카다이 타츠야는 시대극을 비롯해 현대극에서도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금각사'를 영화화한 '불꽃(炎上, 1958)'에서 이치카와 라이조와 함께 출연했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9/conflagration-1958.html

'대보살 고개'에서 무사 하마 역을 연기한 카야마 유조는 배우 우에하라 켄의 아들이다. 그는 배우 보다는 가수로 더 많은 활동을 했다. 
나루세 미키오 감독, 카야마 유조 주연의 '흐트러진 구름(乱れ雲, Scattered Clouds, 1967)'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8/scattered-clouds-196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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