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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중파(戰中派) 세대의 비판적 성찰, 에부리만 씨의 우아한 생활(江分利満氏の優雅な生活, 1963)

 

  '재미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남자가 있다. 양주 회사에 근무하는 서른 여섯의 샐러리맨 에부리만(Everyman의 일본식 발음)은 모든 일에 지루함을 느낀다. 그의 유일한 위로는 '술'이다. 어느날 우연히 술자리를 함께 한 잡지사 편집자들로부터 글쓰기를 제안받는다. 떠밀리다시피 잡지 기고 작가가 된 에부리는 자신의 삶과 주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수필로 써나간다. 잡지에 실린 에부리의 글은 의외로 독자들의 호응을 받고, 급기야 '나오키 문학상'후보에 오른다. 회사에서 별다른 존재감도 없고, 술이나 좋아하는 사람으로 여겨졌던 에부리의 평판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나오키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된 그는 축하의 술자리에서 마음속 깊이 감추어둔 울분과 고통을 털어놓는데...

  오카모토 키하치 감독의 1963년작 '에부리만 씨의 우아한 생활(The Elegant Life of Mr. Everyman)'은 나오키상 수상작인 야마구치 히토미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이다. 영화의 초반부는 에부리와 가족의 일상을 코미디의 느낌을 담아 보여준다. 에부리는 빠듯한 살림살이에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느라 허리가 휠 지경이다. 구멍이 난 낡은 런닝셔츠와 암시장에서 파는 군복을 개조한 양복에 대해 설명할 때에는 웃음이 터진다. 그러나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관객들은 에부리가 전중파 세대(戰中派, 2차 대전기에 청소년기를 보낸 세대)로 겪었던 삶의 역경들을 알게 된다. 오직 자신만 아는 철없는 아버지의 뒤치다꺼리도 에부리를 힘들게 한다. 키하치 감독은 영화의 서사를 에부리의 내레이션과 함께 애니메이션 장면을 중간 중간 넣어서 보여주는 파격을 선보인다.   

  Everyman. '평범한 사람'을 뜻하는 '에부리'를 별칭으로 택한 주인공의 자전적 고백은 처음에는 웃음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시대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에부리가 나오키상 수상자로 결정되자 그는 회사 사람들과 술자리를 함께 하는데, 마치 봇물터지듯이 쏟아지는 과거 회상에 주위 사람들이 다 가버린다. 오직 남은 두 명의 회사 직원만이 새벽 4시까지 에부리의 이야기를 들어줄 뿐이다. 그는 일본의 침략 전쟁 시기에 젊은이들에게 애국과 참전을 부르짖었던 군국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을 쏟아낸다. 냉혹하고, 비정하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무고한 젊은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이들을 용서할 수 없다고 열변을 토한다. 감정에 북받친 그는 종전을 앞두고 필리핀 전장에서 죽어간 병사의 옷에서 나온 편지를 읽는다. 일순, 영화는 반전 영화로 급변하면서 끝을 맺는다.

  전중파 세대는 일본 제국주의의 교육을 받았으나, 종전과 함께 국가에 대한 신념이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겪었다. 원작자 야마구치 히토미는 자신의 소설에서 전중파 세대가 가진 통렬한 사회 비판 의식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그러나 이것은 그 세대가 가진 보편적인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한국 전쟁을 계기로 경제 부흥기에 접어든 일본은 전후 자기 반성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 장면은 에부리의 회사 점심시간에 건물 옥상에서 펼쳐지는 젊은 직원들의 다양한 여가 활동 모습이다. 춤과 노래, 운동을 즐기는 그들을 에부리는 지루한 표정으로 홀로 떨어져 바라본다. 그는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과거 침략 전쟁을 수행한 국가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할 줄 아는 지식인들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의 관객들에게도 이 영화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 영화였다.

  제작사 도호는 이 영화를 가벼운 코미디물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영화를 찍기로 되어 있었던 가와시마 유조 감독의 급사로 자리를 대신하게 된 키하치는 영화의 방향을 자신의 맘대로 틀어버렸다. 나중에 영화의 완성본을 본 제작 담당자가 길길이 날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영화는 결국 2주만에 영화관에서 내려졌다. 도호 소속의 감독이었던 키하치는 상당 기간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는 이 영화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 단서는 키하치 감독의 젊은 시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가 영화계에 입문하고 감독 수업을 받고 있을 때, 일본은 전쟁 막바지에 다다랐다. 강제로 징집된 키하치는 육군 예비 학교에 복무했는데, 폭격으로 자신의 동료들이 참혹하게 죽어간 것을 목격했다. 그런 그에게 이 영화의 원작이 보여주는 반전 메시지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예술적 신념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면에서 일본의 영화계는 키하치의 그러한 신념에 빚을 지고 있다. '에부리만 씨의 우아한 생활'은 전중파 세대의 치열한 사회 비판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이정표로 남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관객들은 작가 의식을 가진 감독의 시대를 향한 진정성 있는 외침을 듣게 된다.



*사진 출처: archive.ica.art 주연 배우 고바야시 케이주


**사진 출처: berlinale.de 감독 오카모토 키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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