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신구라(忠臣蔵)'는 억울하게 죽은 주군을 대신해 복수를 하는 47명의 가신(家臣) 사무라이들의 이야기이다. 일본 영화와 드라마를 좀 챙겨보는 이들이라면 익숙한 이야기인데, 이걸 극화한 것이 무척 많다. 그만큼 일본인들에게 '추신구라'는 어떤 의미에서는 정체성을 상징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와 쌍벽을 이루는 '신선조(新選組)'이야기 또한 문학과 영화에서 자주 다루어졌다. 특히 2004년에 방영된 NHK 대하드라마 '신센구미!'는 젊은 세대의 관객들에게 신선조를 새롭게 각인시켰다. 사와시마 타다시 감독의 '신선조(Shinsengumi, 1969)'는 막부 말기 쇼군의 친위 부대였던 신선조의 결성과 몰락의 과정을 그린다. 신선조를 이끌었던 콘도 이사미 역은 당시 일본 영화의 간판 스타였던 미후네 토시로가 맡았다. 그는 제작자로도 참여했으므로 영화는 사실상 미후네 토시로가 지배한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비교적
충실하게 재현해 낸다. '신선조'에 대해서는 인터넷에 잘 정리된 자료들이 많으므로 참조하면 영화 감상에 도움이 된다. 막부 말기,
교토는 천황을 옹립해 새로운 일본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존왕양이(尊王攘夷)파와 쇼군을 지켜야 한다는 막부파가 대립하는 혼란스런
격전지였다. 신선조는 쇼군을 호위하기 위한 하급 무사들의 집단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던 것이 무사들 뿐만 아니라 농민을 비롯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들게 된다. 콘도 이사미 또한 농민이었다. 그러나 그는 부농 집안 출신으로 일반 농민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신선조를 이끌었던 이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막부의 시각에서 봤을 때, 신선조의 존재는 적당히 써먹고 버려도
좋은 '사냥개' 정도의 의미였을 것이다. 진짜로 신선조가 했던 일은 그러했다. 존왕양이파를 주도했던 초슈 번과 그 일당들에 대한
가차없는 암살과 처단으로 신선조는 자신들의 존재를 부각시켰다.
미후네 토시로가 연기한 콘도 이사미는 쇼군과 막부를
옹호하는 신선조의 수장이다. 농민 출신인 그가 처음부터 지도자의 위치에 올라선 것은 아니었다. 영화는 신선조의 첫 수장이었던
세리자와의 알콜 중독과 상인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살상 행위를 보여준다. 신선조는 초창기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좋게
말하면 후원이고, 나쁘게 말하면 상인들에게 '삥'을 뜯어야 했는데 상인들 입장에서는 막부파와 천황파 사이에서 줄타는 것이 꽤나
힘들었을 것이다. 세리자와는 자신의 무력을 너무 함부로 휘둘렀으므로 곧 제거의 대상이 된다. 콘도 이사미는 결격 사유를 지닌
전임자와 그 일파를 제거하고 정당한 수장 자리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는 신선조를 이끌며 천황파의 막부 타도 음모를
분쇄하는데, 미후네 토시로는 과감하고 결단력 있는 지도자의 모습을 연기한다. 특히 존왕양이파들의 회합 장소를 습격해서 처단한
이케다야 사건 장면은 비좁은 공간에서의 처절한 결투를 잘 보여준다.
어느 조직이나 그렇듯, 막부의 인정을 받고 잘
나가는 신선조에도 분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엄격한 규율의 적용과 반복되는 살상행위에 회의를 느끼는 신선조원들. 그들은 자신들이
피에 굶주린 막부의 개가 아니라며 항변한다. 그렇게 나가는 이탈자들에게 자비란 없다. 그러나 콘도 이사미는 그들에 대한 무자비한
처단을 명령하는 악역으로 비춰지지는 않는다. 그는 어디까지나 중용의 미덕을 지닌 인물로, 신선조의 엄혹한 교조주의적 입장을
대변하는 히치카타가 기꺼이 악역을 대신한다. 미후네 토시로는 자신이 돈 들여 만든 영화에서 나쁜 모습은 하나도 보여주지는
않는다.
이런 시대극에서 여성 캐릭터는 별로 말할 거리가 없다. 대의를 위해 자신과 어린 딸을 놔두고 떠나는
남편에게 '결심한 것을 축하드린다'고 말하는 콘도 이사미의 아내, 언제든 쉴 수 있는 안식처로 평생 기다리겠다고 말하는 게이샤
연인은 그저 영화 속 악세사리일 뿐이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당시의 그런 역사적 전환기의 혼란 속에서 민중의 삶이란 바람 앞의
촛불 같은 것이었다. 여성의 삶은 더 어려웠다. 결국 남편의 죽음을 마주하거나(콘도 이사미의 아내), 연인이 억울한 죽임을
당하거나(게이샤의 여동생), 기약없이 만날 날을 기다리는(신선조원 오키타의 정인) 일이 그들의 몫이었다.
막부가
천황에게 모든 권력을 이양하는 대정봉환(大政奉還) 이후에도 신선조는 끝까지 저항한다. 쇼군의 친위부대에서 하루아침에 반란군이
되어버린 신선조. 그들이 근대 일본 탄생의 걸림돌에서 무사도의 화신으로 변모하는 과정의 열쇠는 신선조의 부대 깃발에 새겨진
'마코토(誠)'에서 찾을 수 있다. 극중 콘도 이사미는 몰락해 가는 막부의 모습을 목도하고도 신선조로서 '마코토'의 마음가짐을
지키겠다고 말한다. 영화는 신선조를 수구 권력의 시대착오적 저항의 이미지가 아닌, 격동의 시대에 충심을 다한 무사의 후광을
씌운다. 일본 시대극(時代劇) 영화, 그리고 미후네 토시로의 팬이라면 이 영화는 놓칠 수 없는 선택이 될 것이다. 신선조의 백과
사전 항목을 보는 듯한 밋밋한 느낌이 있기는 하지만, 의외로 인물들의 내면적 갈등과 한 집단의 흥망성쇠를 잘 그려낸
작품이다.
*사진 출처: zh.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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