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결혼 반지(婚約指環, Wedding Ring, 1950), 우리들의 결혼(私たちの結婚, Our Marriage, 1962)

 

1. 사랑에 드리운 군국주의의 그림자, 결혼 반지(婚約指環, Wedding Ring, 1950)

  데이비드 린(David Lean) '밀회(Brief Encounter, 1945)'는 우연히 만난 중년 남녀의 짧은 사랑을 그린 영화이다. 각자 가정이 있는 두 사람은 사랑의 감정을 확인하지만, 일탈 대신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을 택한다. 키노시타 케이스케(木下恵介) 감독의 '결혼 반지(婚約指環, Wedding Ring, 1950)'에도 영화 '밀회'의 남녀 주인공과 같은 처지에 놓인 이들이 등장한다. 도쿄에서 보석상을 운영하는 노리코(타나카 키누요 분)에게는 아픈 남편 미치요가 있다. 남편은 병 때문에 도쿄 근교 바닷가에서 요양중이다. 어느 날, 미치요의 새 주치의 에마(미후네 토시로 분)가 집을 찾는다. 처음엔 단순한 호감이었던 노리코의 감정은 점차 사랑으로 변해간다. 미치요는 그런 아내의 변화를 재빨리 알아챈다. 갑작스런 사랑의 감정에 흔들리는 것은 에마도 마찬가지. 세 사람의 아슬아슬한 감정의 줄타기는 마침내 결단의 순간에 다다른다.

  얼핏 보기에 통속적인 이 삼각 관계에는 어두운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늘 누워서 지내는 미치요의 병은 전쟁터에서 얻은 것이다. 결혼 직후에 징집으로 끌려간 그는 전쟁이 끝나고 2년 뒤에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 아내 노리코는 주중에는 도쿄의 가게를 지키고, 주말에는 아픈 남편을 보살피러 본가로 돌아온다. 남편에 대한 노리코의 애정이 손가락에 낀 다이아몬드 반지만큼 단단한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노리코는 에마가 지닌 생의 활력과 건강함에 순식간에 매혹된다. 병석에 누워있는 남편이 가지지 못한 것을 젊고 매력적인 의사는 가지고 있다.

  노리코가 결혼한 여성이고, 그 남편이 자신의 환자라는 사실은 에마를 윤리적인 딜레마에 빠뜨린다. 그는 미치요를 낫게 해야한다는 직업적 의무감과 노리코에 대한 감정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들 사이에 끼인 남편 미치요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가 떠날까봐 조바심을 내고, 경쟁자인 에마를 향해서는 점잖게 경고한다. 취미로 시를 쓰는 미치요는 자신처럼 시를 좋아하는 에마에게 아내에 대한 사랑의 시를 써서 보낸다. 노리코와 에마는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지만 그들은 각자의 선을 지키기로 마음 먹는다. 에마를 만나러 가는 동안 잠시 빼두었던 결혼 반지는 결국 다시 노리코의 손가락에 끼워진다. 늘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에마는 노리코가 선물한 멋진 구두를 딱 한 번 신었을 뿐이다.

  키노시타 케이스케가 보여주는 이 사랑의 행로에는 욕망 보다는 도덕적인 의무감이 지배적으로 깔려있다. '결혼 반지'는 남녀의 사랑에 새겨진 군국주의의 상흔을 미묘하게 포착해낸다. 전쟁에서 병을 얻은 남편은 무력감에 시달리고, 아내는 그런 남편에게 연민을 느낀다. 역시 징집으로 전쟁터에 끌려갔던 에마는 전쟁 기간 중에 자신이 즐거움의 대상으로 여자를 찾았다고 노리코에게 고백한다. 전쟁이 끝나고 그는 마침내 진정한 첫사랑에 눈을 뜨지만 그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 이 남자의 간절한 소원은 사랑하는 노리코의 무릎에 엎드려 우는 것이다. 그렇게 남자와 여자는 헤어진다. '결혼 반지'가 전후 좌절된 사랑의 초상을 그려냈다면, 시노다 마사히로는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시점에서 새로운 세대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



2. 새로운 전후 세대의 사랑, 우리들의 결혼(私たちの結婚, Our Marriage, 1962)

  러닝 타임이 67분에 불과한 영화 '우리들의 결혼(私たちの結婚, Our Marriage, 1962)'은 매우 간결한 내러티브를 갖고 있다. 영화는 공장에 출근하는 노동자들을 비춰주는 크레인 쇼트로부터 시작된다. 시노다 마사히로(篠田正浩)는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부감 쇼트를 주인공들을 가까이에서 찍은 핸드 헬드 쇼트로 순식간에 전환시킨다. 그들 뒤로는 공장의 거대한 굴뚝이 보인다. 이 감독이 보여주는 이러한 역동적인 화면 구성은 관객을 영화 속 인물들의 현실로 빠르게 끌어들인다. 바야흐로 일본은 패전의 상처를 딛고 고도 경제 성장 체제로 진입하는 길목에 서있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그 경제의 하부 구조를 담당하는 노동 계급의 젊은이들이다. 

  케이코와 사에코 자매는 어촌 마을 가난한 집안 출신이다. 자매는 공장에서 일한다. 사에코는 동료 노동자 코마쿠라를 언니에게 소개하고, 곧 둘은 연인이 된다. 케이코의 월급은 부모의 빚을 갚는 데에 나가버린다. 가난에 진력이 난 케이코가 집을 탈출할 방법은 결혼 뿐이다. 22살인 케이코에게 곧 여기저기서 혼담이 들어온다. 세일즈맨 사츠모토가 케이코의 부모를 통해 결혼 의사를 비춘다. 하지만 케이코의 아버지는 집안 빚을 대신 갚아줄 어촌 계장의 아들을 케이코와 결혼 시킬 심산이다. 가진 것 없는 코마쿠라의 걱정은 커져만 간다.

  영화는 변모하고 있는 일본 사회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담아낸다. 칙칙한 공장 풍경과 대비되는 화려한 도심의 세계도 있다. 새 구두 살 돈을 번번이 집안 생활비로 뜯기는 케이코는 원조 교제의 유혹에 흔들린다. 우연히 만난 동창은 그렇게 해서 맘껏 돈을 쓰고 있다. 케이코가 선망하는 모던 걸의 삶은 돈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공장 경리인 케이코의 월급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사츠모토가 사준 새 구두에 케이코의 마음이 흔들린다. 과거에는 암시장 상인이었지만, 이제 그는 번듯한 회사의 직원으로 돈도 잘 번다.

  "언니가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코마쿠라잖아!"

  동생 사에코는 사츠모토와 결혼하겠다는 언니의 결심을 질책한다. 공장 노동자와 결혼해서 살고 있는 친구 미요코도 돈이 없어도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미요코의 행복 선언은 오래가지 못한다. 케이코와 사에코는 미요코의 남편이 미요코에게 낙태를 종용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들 부부에게는 아이가 태어나도 키울 돈이 없다. 결국 자매는 산부인과에서 나오는 미요코와 마주친다. 그 장면은 하층 노동 계급이 처한 냉엄한 현실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실질적으로 결혼에 이르는 사람은 케이코 뿐이다. 그럼에도 영화의 제목은 '우리들의 결혼'이다. 시노다 마사히로는 눈부신 경제 성장의 이면에 자리한 빈부 격차, 계층적 갈등을 '결혼과 연애'라는 주제로 변주해낸다. 케이코에게 돈은 낭만적 사랑을 압도하는 중요한 명제이다. 그와는 달리 동생 사에코는 사랑없는 결혼은 생각할 수도 없다. 사에코에게 가난은 사랑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케이코는 새 구두를 신고 멋진 정장 차림으로 사츠모토와 함께 떠난다. 사에코는 뒤늦게 자신이 코마쿠라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도입부와 절묘한 댓구를 이루듯 영화의 마지막은 출근하는 노동자들 사이의 코마쿠라와 그 뒤를 바짝 따라가는 사에코의 모습이다. '우리들의 결혼'은 경제 발전이 가속화시킨 전후 세대의 분화, 가치관의 혼란을 가감없이 담아낸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나루세 미키오가 보여주는 결혼의 풍경

밥(Meshi, Repast, 1951)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8/repast-1951.html

아내(Wife, 1953)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wife-1953.html

아내의 마음(A Wife's Heart, 1956)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8/wifes-heart-1956.html

안즈코(Anzukko, 1958)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little-peach-1958.html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전후 일본 영화(Post-war Japan Movie, 1946-1955) 3편: 전후 일본 사회가 마주한 고통과 혼란,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

    노로는 고등학교 선생이다. 그는 과속을 하는 트럭을 피하려다 손을 다친다. 그가 받는 빠듯한 봉급으로 단칸 월세방 돈 내는 것도 힘든데 병원비까지 나가게 생겼다. 그는 학교에서 그의 봉급을 올려주길 기대한다. 하지만 깡패같은 고등학교 이사장은 노로에게 야간 고등학교 강의까지 더하라고 강권한다. 천성이 유약한 노로는 '아니오'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다.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 노로. 그는 자신의 제자가 권유한 반정부 시위에 나가보기로 한다. 시위대는 경찰의 강경대응으로 무참히 진압되었다. 노로는 경찰서에 끌려갔다가 겨우 풀려난다. 하지만 이 일을 빌미로 이사장은 노로를 해고한다. 전후의 어려운 시절, 노로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이치카와 곤(市川崑, Kon Ichikawa) 감독의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는 고등학교 선생 노로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후 일본 사회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원작이 되는 만화가 있다. 만화가 요코야마 타이조(横山泰三)는 1950년부터 1953년  마이니치 신문(毎日新聞)에 4컷 만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를 연재했다. 4컷 만화에 담긴 날카로운 사회비판적 메시지 때문에 만화는 연재 중단의 압력을 받았다. 이치카와 곤은 그 만화에서 영화의 주요한 소재를 차용했다.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는 명확한 서사 대신에 다양한 등장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영화의 그러한 구성은 전후 일본 사회의 여러 면면들을 부각시킨다.    노로는 다친 손의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간다. 그런데 의사는 노로의 몸을 진찰하더니 '영양실조'라면서 잘 먹어야 한다고 처방을 내린다. 젊은 의사는 환자들 대부분이 제대로 먹지 못해 건강이 좋지 않다고 말한다. 노로가 의사에게 손을 치료받고 싶다고 하자, 의사는 병원의 X-ray 기계가 고장나서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장면은 전후

Shirley Clarke의 실패한 타자성 탐구, Portrait of Jason(1967)

  1. 이상한 나라의 Jason Holliday   한 남자가 자신을 소개한다. 자신의 이름이 Jason Holliday라고 말한 그는 본명이 Aaron Payne이라고 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 유명한 재즈 연주자)와도 안다고 말하는 그는 자신이 가진 직업을 줄줄이 늘어놓는다. 그가 말한 직업들 중에는 남창(whore)도 있다. 손에 술잔을 든 그는 심부름꾼(houseboy)으로 시작한 자신의 인생 역정을 늘어놓는다. 미국의 독립 영화 제작자 Shirley Clarke는 1966년 12월 3일, 자신이 머물던 첼시 호텔(Hotel Chelsea) 펜트 하우스에서 제이슨 할러데이의 인생 이야기를 주제로 다큐를 찍었다. 저녁 9시에 시작된 촬영은 12시간 동안 이어졌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Portrait of Jason(1967)'이다.   제이슨은 술에 취해 기분이 아주 좋아보인다. 화면 밖에서 목소리로만 들리는 셜리 클라크는 제이슨에게 질문을 던지며 그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도록 유도한다. 마치 인형극의 조종하는 사람(puppeteer)처럼 클라크는 제이슨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려는 것 같다. 흑인이며 동성애자이기도 한 제이슨에게 미리 준비해놓은 소품으로 작은 공연을 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소품 가방에서 꺼낸 모피 목도리를 두르고는 제이슨은 여성스럽고도 우스꽝스러운 제스처를 취하며 킬킬거린다. 제이슨이 원하는대로 술과 담배가 계속해서 제공된다. 시간이 갈수록 술에 취한 제이슨의 말소리는 알아듣기 어렵게 뭉그러진다.   러닝 타임 1시간 45분의 이 다큐 'Portrait of Jason(1967)'은 보면 볼수록 기이하다. 관객은 'Jason Holliday'라는 인물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도록 초대받지만, 다큐가 끝나고 나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가장 큰 이유는 제이슨이 가진 뛰어난 공연자(performer)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