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산 태종대는 해안 절벽의 비경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 태종대에서 극적인 결투 장면을 찍은 홍콩 무협 영화가 있다. 우리에게는 영화 '천녀유혼(倩女幽魂, 1987)'으로 잘 알려진 정소동(程小東) 감독의 데뷔작 '생사결(生死決, Duel to the Death, 1983)'이
그것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소림사 서고에 침입하는 일단의 닌자 무리가 보인다. 그들은 무술 비서를 찾아내어 재빠르게 사라진다.
홍콩 무협 영화에 일본의 닌자들이라니, 뭔가 시작부터 예사롭지가 않다. 때는 명나라 말기, 무림은 10년마다 열리는 중국과 일본
무사의 결투를 앞두고 있다. 중국에서는 소림사의 보청운이, 일본에서는 신음파(新阴派) 무사 미야모토가 낙점된다. 소림사 문파는
무술 종주국의 위엄을 보이고 싶어한다. 한편 일본 신음파도 자신들의 무공이 중국에 뒤지지 않음을 입증할 계획이다. 각자 자신의
나라와 문파의 명예를 짊어진 청운과 미야모토, 과연 누가 승자가 될 것인가...
영화는 시작부터 닌자와 소림사 승려들의 화끈한 대결을 보여준다. 쇼브라더스(Shaw Brothers)의 무협 영화에서 무술 지도를 담당했던 정소동은 자질구레한 부연설명 따위는 하지 않는다. 검은 옷의 닌자들은 칼싸움에서 밀리자 폭약으로 자폭 공격을 감행한다. 그런 다음에 뜨는 오프닝 크레딧에 감독 정소동의 이름과 함께 '생사결(生死決)'의 타이틀이 박힌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결투. 소림사의 보청운은
이 결투에 나가는 것이 영 내키지 않는다. 청운에게 무술이란 자기 수련의 방식이지, 승부로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청운의 주변인들은 그런 그에게 결투의 의지를 불어넣으려 애쓴다. 숲에서 사는 청운의 스승은 별다른 욕심도 없어보이는
걸인의 행색이다. 그런 그조차 청운에게 반드시 이기라고 말한다.
한편 일본의 무사 미야모토도
대결을 앞두고 결의를 다진다. 그의 스승은 변장을 하고 제자를 습격해 그 무술 실력을 점검한다. 스승은 제자의 칼에 죽어가면서
문파의 계명을 외우게 한다. 무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겨야 한다, 하시모토는 스승의 주검 앞에 승리를 맹세한다. 이렇게 두 명의
무사가 대결을 준비하는 동안, 무림과 막부에서는 비밀스런 공모가 진행된다. 막부의 쇼군은 중국의 선진 무술을 탈취해 일본 무술을 부흥시킬 계획을 갖고 있다. 중국 무림의 하후파 수장은 소림파의 청운이 무림 대표로 나간 것에 불만을 품는다. 청운을 없애야 자신의 딸 승남을 결투에 내보낼 수 있다. 그는 막부에 협력한 댓가로 결투의 승리를 보장받아 하후파의 위상을 높이려 한다.
청운과 미야모토의 대결은 이제 순수한 무술 승부가 아니며, 국가와 권모술수가 얽히는 장이 된다. 두 무사는 자신들을 둘러싼
음모에 저항한다. 미야모토는 결투의 진정성을 훼손하려는 닌자들을 처단한다. 그에게는 쇼군의 명령 보다 문파의 승리가 중요하다.
납치된 소림사의 사형(師兄)을 구해내 돌아가려는 청운을 붙잡는 미야모토. 그는 청운의 사형을 죽이고 청운을 마지막 결투에
불러낸다. 마침내 둘은 해안가 절벽에서 맞붙는다. 애국적 정체성에 호소하는 이 홍콩 무협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대결 장면은 한국의 태종대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두 무인의 대결이 국가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무예의 승부를 겨룬다는 점에서 태종대는 오롯이 무국적의 공간으로 인식된다.
'생사결'에서 정소동은 현란한 와이어 액션과 정교하게 짜여진 무술의 합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눈속임이 없다. '생사결'은 무협
영화가 슬로 모션과 CGI로 뒤범벅이 되기 이전의 진정성을 대표한다. 폭약을 비롯해 거대한 연, 분신술을 이용한 닌자들의 싸움
장면에서는 정소동표 무협의 기발한 착상이 돋보인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갖추고 있는 미덕은 절묘한 균형 감각이다. 소림 무사와
일본 사무라이의 대결은 협소한 애국주의의 틀을 벗어난다. 두 주인공은 경계가 없는 '무(武)'에
속해있다. 그 세계에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극한의 무자비함이 존재한다. 죽음을 앞둔 미야모토는 쓰러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발등에 칼을 꽂고 몸을 지탱한다. 청운은 죽음에서 벗어났으나 왼손가락 둘과 오른팔을 잃었다. 이 처절한 결투는 오래도록
이어지는 비감함을 남긴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강호(江湖, Jianghu)에 대한 지아장커의 현대적 해석 영화, 강호아녀(江湖儿女, 2018)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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