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노 다케시의 '자토이치(座頭市, 2003)'는 원작 영화가 있다. 미스미 켄지 감독의 '자토이치 이야기(座頭市物語, 1962)'가 바로 그것이다. 다케시 본인이 주연까지 한 2003년 영화에서 보여지는 맹인검객은 다소 거친 인상의 비범하고 날렵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1962년 영화의 가츠 신타로가 분한 자토이치는 뭔가 어수룩하면서도 친근한 모습의 외양을 하고 있다. 뭐랄까, 관객이 뛰어난 검객에게 기대하는 어떤 원형의 모습에서 벗어나 있다. 미스미 켄지는 그 영화로 큰 인기를 끌었고, 그것은 일련의 시리즈 영화 제작으로 이어진다. 그의 영화 작품 대부분은 그런 검객 영화로 채워져 있다.
1964년에 만든 '무숙자(無宿者)'와 '검(劍)'은 모두 이치카와 라이조가 주연을 맡았다. 유명 가부키 집안의 양자로 들어가 1950년대와 60년대에 걸쳐 일본 영화계에서 독보적인 경력을 쌓은 그는 37세의 젊은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떴다. 그는 특히 검객 영화에 많이 출연했는데, 미스미 켄지 감독과도 여러 작품을 함께 했다. 평범한 얼굴 속에 깃든 강직함과 단아함을 보여주는 이치카와 라이조는 '무숙자'에서는 정의로운 사무라이, '검'에서는 순수함과 열정을 가진 검도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미스미 켄지가 '무숙자'와 '검'에서 보여주는 화면 구성은 매우 경제적이고 정갈하다. 매 쇼트 하나 하나를 보다 보면 뭘 허투루 낭비하는 법이 없다. 마치 필름을 올바르게 사용하기 위해서 가계부라도 쓰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무숙자'의 액션은 관객들에게 보기좋게 시원한 액션을 선사하지 않는다. 주인공 잇뽄 마츠는 큰 무리의 악당 패거리와 맞서 싸우는데, 그 싸움들은 현실적이어서 대부분은 '막싸움'이다. 싸움이 이루어지는 장소도 비좁은 집들 사이, 앞마당 정도다. 그래서 통쾌한 활극을 기대한 관객들은 이 영화에 실망하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 '무숙자'의 서사는 군데군데 비어있고, 이야기 전개는 꽤나 성급하게 보이는 구석도 있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아버지의 원수를 찾아 아들은 유랑의 길을 나선다. 그가 우연히 다다른 마을은 악인에 지배당해서 마을 사람들은 크나큰 고통을 겪고 있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악인과 대면하고 보니, 그는 바로 자신의 아버지다(스타워즈의 루크와 다스베이더가 일견 떠오른다). 아버지가 정의로운 관료로 살다 죽었다고 믿는 아들은 흑화한 아버지의 변신을 믿을 수가 없다. 아버지는 자신의 더러운 사업에 아들의 참여를 권유하지만 아들은 단호히 거절하고, 고통받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를 죽이려 한다. 마침내 부자간의 대결이 이루어지지만,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것이 결코 쉬울 리가 없다.
'무숙자'에서 미스미 켄지가 보여주는 대결은 꽤나 큰 윤리적인 곤혹스러움을 수반한다. 자신이 괴물이 된 것은 돈만 아는 더러운 세상 때문이라고 강변하는 아버지, 그리고 그런 아버지의 존재를 도저히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아들. 단순한 불의와 정의의 대결이 아니다. '혈육'이란 이름이 그 대결에 부여되었을 때, 관객들은 그 누구의 편에 서기도 어렵게 된다. 그러나 검의 세계에서 승부는 필연적이다. 자신을 차마 죽이지 못하는 아들을 위해 아버지는 스스로 칼에 몸을 던진다. 그렇게 미스미 켄지는 검의 정의를 실현한다.
'검'에서의 대결은 인물대 인물의 구도이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검도부 주장 고쿠부가 지향하는 무예의 순수함과 그렇지 못한 세상과의 대결이다. 뛰어난 실력과 검도에 대한 열정을 가진 고쿠부 지로는 대학 검도부의 주장이 된다. 그의 엄격하고 단호한 지도는 후배들의 반감을 사는데, 고쿠부에 밀려 주장이 되지 못한 동기 가가와는 특히 열등감과 패배감에 시달린다. 가가와는 전 일본 대회를 앞두고 떠난 합숙 훈련에서 후배들을 선동해 고쿠부에게 반기를 들게 만들고, 자신의 지도자로서의 권위와 자격에 의문을 품게된 고쿠부는 결국 극단의 선택에 이른다.
미시마 유키오의 단편 소설 '검'에 큰 인상을 받은 미스미 켄지는 시대극이 아닌 현대극에 대결의 세계를 펼쳐 놓는다. 역동적이고 빠르게 진행되는 서사는 무척 흡인력이 있는데, 그것은 원작자의 소설이 가진 장점에서 기인한다. 그 어떤 더러움과 약함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고쿠부의 세계를 주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의 단호한 이분법적인 세계, 즉 순수와 비순수, 검의 세계와 바깥 세상 사이에 중간 지대는 없다. 검도부 후배들과 가가와, 고쿠부의 실력을 인정하는 감독마저도 고쿠부는 세상을 모르는 '아이'라며 은근히 폄하한다.
결국 고쿠부가 지향하는 이상향은 더럽혀지고, 그를 유일하게 따른 후배 미부마저 등을 돌린다. 그는 그 모든 것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고쿠부의 마지막 선택은 그에게는 나름의 명분을 가진 것이지만, 관객은 그가 추구한 엄격한 이분법의 세계가 불러일으킨 극단적 비극에 놀라움과 당혹스러움을 느낄 수도 있다. 고쿠부가 택한 결연한 죽음의 방식은 실은 미시마 유키오가 자신의 삶의 마지막에 행한 것이기도 했다. 자위대 본부에 들어가 총감을 인질로 잡고 자위대 총궐기와 일본 헌법 개정을 외쳤던 그는 결국 할복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가면의 고백'과 '금각사'와 같은 그의 문학 작품에서 보여주었던 탐미주의적이고 수려한 문학 세계의 결말은 그토록 끔찍했다. '검'은 어떤 면에서 미시마가 추구한 삶의 본질, 그 지향점을 보여주는 간결한 서사이기도 하다. 미스미 켄지는 고쿠부로 대변되는 강함과 순수함이 있는 검의 세계, 그리고 세상의 더러움과 결코 타협할 수 없다고 믿는 고쿠부의 내면을 명확하게 구현해 낸다. 이치카와 라이조는 그러한 대결의 세계가 가진 비정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캐릭터를 훌륭하게 연기한다.
물론 이러한 영화들에서 여성 캐릭터는 전적으로 소외되어 있다. '무숙자'의 오세이나 하루 같은 여성 캐릭터들은 사랑을 갈구하며 유랑 검객 잇폰 마츠가 정착하길 바라지만, 그들의 바램은 좌절된다. '검'에서 고쿠부를 좋아하는 에리도 마찬가지다. 고쿠부는 자신의 수련에 방해가 된다며 에리의 애정을 단호히 거절한다. 사실 그러한 검의 세계에서 여성 캐릭터가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은 한정될 수 밖에 없다. 아마도 그 예외라고 할 수 있다면, 후지타 토시야의 '수라설희(修羅雪姫, 1973)'가 있겠다. 타란티노의 '킬 빌(Kill Bill, 2003)'에 영감을 준 바로 그 영화다. 그 밖에도 시대극에서 좀 더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가 있다면 '붉은 모란 도박사' 시리즈 정도일 것이다.
미스미 켄지가 '무숙자'와 '검'에서 보여주는 대결의 세계는 단호하며 명쾌하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기에 사람들은 그토록 무협과 검객의 세계에 매력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검의 세계는 승부와 직결되어 있고, 패배는 곧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은 그 세계가 가진 냉혹함을 보여준다. 그것은 분명 매혹적이지만 잔혹스럽기도 하다. 불의에 맞서기 위해서 정의로운 자가 치루는 댓가는 상실과 고통일 수 있다는 사실을 관객들은 칼의 움직임과 그 명징한 소리를 들으며 어쩔 수 없이 깨닫게 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japansociet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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