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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코미디에 구현된 소련의 국가적 이상, 아가씨들(Девчата, The Girls, 1961)

 

  유리 출류킨(Yuri Chulyukin) 감독의 1961년 영화 '아가씨들(Девчата, The Girls)'의 주인공 토샤를 보고 있으면, 영화 '애니(Annie, 1982)'의 귀엽고 당찬 꼬마 애니가 떠오른다. 토샤가 애니 보다 나이가 더 많기는 하지만, 작은 키에 하는 행동은 순진무구한 아이 같다. 토샤와 애니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고아원 출신이라는 것. 요리 학교를 졸업한 18살의 토샤는 우랄의 목재 회사에 조리사로 일하기 위해 왔다. 토샤의 기숙사 룸메이트들은 모두 연애 중이다. 그곳은 무슨 사랑이 꽃피는 목재회사 같다. 젊은 남녀 직원들은 수시로 열리는 댄스 파티에 참석하는 것을 즐긴다. 과연 천진난만한 장난꾸러기 같은 토샤에게도 남자 친구가 생길까? 영화 '아가씨들'은 빛나는 젊음의 에너지와 청춘의 사랑이 흘러 넘친다.

  원작 소설의 인기에 힘입어 만들어진 이 영화는 주인공 토샤를 두고 여배우들의 치열한 물밑 경쟁이 있었다. 출류킨 감독은 배우인 아내에게 그 역할을 주려고 애썼지만, 결국 그 역할은 나데즈다 루미안체바(Nadezhda Rumyantseva)에게 돌아갔다. 당시 루미안체바의 나이는 서른 살이었다. 이 서른 살 여배우는 나이 따위는 잊어버린 것처럼 18살 소녀 토샤 그 자체를 보여준다. 슬랩스틱에 가까운 연기 동작을 자연스럽게 소화하며, 울고 웃는 모습은 천상 아이 같다. 영화는 외국 영화제에도 출품되어서 좋은 평가를 받았는데, 루미안체바를 두고 '여자 찰리 채플린', '소련의 줄리에타 마시나'라는 호칭이 붙었다. 정말이지 '아가씨들'은 루미안체바를 위한 영화처럼 보일 정도이다.

  영화는 주인공 토샤와 연인 일리야의 사랑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소련의 국가 기간 산업에 종사하는 목재 노동자들의 모습 또한 비중있게 담는다. 일리야와 한 팀을 이루는 3명의 동료들은 틈만 나면 나무를 가장 효율적으로 벌채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한다. 일리야는 뛰어난 능력으로 인정받는 직원으로, 신문에 일리야의 사진과 함께 작업 성과가 실리기도 한다. 이는 영화가 한창 성장하고 있는 소련의 산업 발전을 부각시키고, 그 중심인 노동자들을 강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노동자들의 연애는 어디까지나 새로운 가정을 이루기 위한 건전한 사전 작업이어야 한다. 일리야는 토샤의 룸메이트인 안피사와 사귀고 있었는데, 안피사는 진정한 사랑에는 별 다른 관심이 없고 어떻게 하면 잘 나가는 남자와 사귈까 궁리한다. 안피사는 일리야 대신에 새로 부임한 감독관과 교제를 시작한다. 일리야는 결국 토샤의 진정성과 순수함에 반해서 사귀게 된다. 안피사는 일리야가 토샤와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말에 좌절하는데, 이 여성 캐릭터가 느끼는 불행은 사랑과 결혼의 가치를 비웃는 것에 따른 결과이다.   

  안피사와 대척점에 있는 캐릭터인 토샤가 보여주는 긍정적인 삶의 에너지와 순수함, 그리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소련이 바라는 이상적인 여성상에 부합한다. 일리야는 자신이 거만하다며 춤 신청을 거절한 토샤를 골탕먹이기 위해 동료들과 함께 토샤의 음식을 혹평하며 내다 버린다. 식사 시간에 나타나지 않는 일리야와 동료들을 위해 토샤는 직접 음식통을 들고 벌목장으로 찾아간다. 터무니 없는 냉대에도 끄떡하지 않고 투철한 직업의식으로 기꺼이 음식을 대접하는 토샤의 모습에 일리야의 마음도 움직인다. 일리야는 어쩌면 토샤에게 '충실한 아내'의 모습을 본 것인지도 모른다. 고집세고 제멋대로인 남자는 비로소 토샤와 함께 할 미래를 생각하게 된다.

  '아가씨들'은 그렇게 성실하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소련의 젊은이들의 모습을 담는다. 봄이 되자 목재 회사의 직원들은 새로 결혼할 부부 직원들을 위해 집을 짓느라 분주하다. 열심히 노동하고, 건전하게 연애하며, 결혼하고 가정을 꾸려서 국가에 기여하는 것. 그렇게 고아 출신의 요리사 토샤가 성취하는 사랑 이야기에는 소련의 국가적 이상이 깔려 있다. 알콩달콩한 청춘 남녀의 연애담에 알렉산드라 파흐무토바가 담당한 영화 음악은 정겨움을 더한다. 영화는 개봉 첫해, 3500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흥행 성적을 거두었다. 구 소련 시절의 대표적 흥행작으로 남아있는 '아가씨들'은 경제 성장의 동력을 얻어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던 당시 소련의 자신감이 반영되어 있다. 이 영화는 어떤 면에서는 국가가 젊은 관객들에게 아주 세련된 방식으로 호소하는 노동과 연애, 결혼에 대한 강력한 프로파간다였을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oxvo.ru     토샤 역의 배우 나데즈다 루미안체바

**사진 출처: in-w.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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