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영화 '테마(The Theme, 1979)'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구 소련 영화들과 관련된 자료를 검색하다 보면 자주 보게 되는 문구가 있다. 'stack on the shelf', 우리말로
번역하면 '창고에 처박아 두었다' 정도쯤 될까? 대개는 검열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거나, 당국의 최종 시사에서 상영 불가 판정을
받은 영화들이다. 소련의 예술 창작 원리인 '사회주의 리얼리즘(Socialist realism)'에 맞지 않는 영화들의 운명은
버려지고 잊혀지는 것이었다. 글렙 판필로프(Gleb Panfilov) 감독의 1979년작 '테마(Тема)'의 경우도 그러했다.
영화는 심한 검열로 누더기처럼 되었고, 결국은 상영이 금지되었다. 당국의 입맛에 맞지 않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테마'는 그렇게
창고에서 잠자고 있다가, 고르바초프 집권기인 1987년이 되어서야 소련 관객들은 이 영화를 만날 수 있었다.
저명한 극작가인 킴 예세닌(미하일 울리야노프 분)은 자신의 애인, 동료 극작가와 함께 볼가강변의 수즈달을 찾는다. 새로 집필할
역사극의 자료를 찾기 위해서이다. 예세닌 일행은 한적한 소도시 수즈달에서 은퇴한 여교사 마리아의 환대를 받는다. 거리를 돌아다니다
우연히 들어간 지역 박물관에서 가이드 샤샤를 보게 된 예세닌은 호기심을 느낀다. 마리아의 집 만찬에서 예세닌은 샤샤를 다시
만나게 되는데, 샤샤는 마리아의 제자로 어릴적부터 예세닌의 작품을 좋아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정작 저녁 식사 자리에서
샤샤는 예세닌의 최근 작품들은 별로이며 형편없는 것이라고 혹평한다.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글이 아닌, 정부 당국이 원하는
이야기만을 적당히 타협하면서 써온 예세닌은 샤샤의 그런 말에 자괴감을 느낀다. 그 일로 샤샤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진 예세닌은
밤늦게 샤샤의 아파트로 찾아가는데...
예세닌은 작가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혜택을 당으로부터 받고 있다. 개인
별장, 자가용, 아파트, 그리고 작가로서의 명성까지 그에게 부족한 것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작가로서의 정체성에
회의를 느끼고 있는 중이다. 예술성이 있는 작품이 아니라, 당의 노선에 부합하는 글만을 계속 쓰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에 대한
깊은 조예를 지닌 샤샤는 예세닌의 글이 가진 공허함을 알아챈다. 샤샤는 잊혀진 농민 시인 치지코프의 작품들에 매혹되어 있다.
소박한 농민의 언어로 보통 사람들의 삶에 대해 노래했던 시인에 대한 책을 쓰려고 준비중이기도 하다. 예세닌에게도 치지코프에 대해
열광적으로 소개하는 샤샤. 그러나 예세닌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샤샤를 꼬실 수 있는가에 있는 듯하다. 이혼한 아내에게 아들을 밴드
활동이나 하는 머저리로 잘못 키웠다며 전화로 광분하는 이 다혈질 작가는 달리 마음 둘 데가 없어 보인다. 아직은 마음만 먹으면
샤샤 정도는 넘어오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웬걸, 도도한 시골 아가씨는 그에게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자의식 과잉의 예술가, 그의 음주벽과 여성 편력, 예술에 대한 시시하기 짝이 없는 대화들, 홍상수의 영화들에서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이야기다. 아니, 소련 영화에서 홍상수식 감성을 느끼다니... '테마'는 비정형적인 소련 영화의 면모를 보여준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간간이 터지는 웃음들은 과연 이 영화가 1979년에 소련에서 만들어질 법한가 싶은 의문을 남기기까지 한다. 글렙 판필로프
감독은 확실히 삐딱선을 탔다. 구 소련 시절의 모든 영화는 국가의 자본으로 만들어진 '국영 영화'였다. 반체제 인사와 이민자에
대한 교훈적인 메시지를 담은 영화를 만들라는 지시에 다른 감독들은 골치아픈 주제라며 고사했다. 그러나 판필로프 감독은 그걸
자신만의 방식으로 비틀어서 보여준다. 공산당의 노선에 충실한 어용작가의 내면적 갈등과 연애담을 내세우면서, 정부 비판의 메시지를
슬쩍 끼워넣는다.
예세닌이 밤늦게 찾아간 샤샤의 아파트는 열려 있다. 아무도 없는 집을 둘러 보던 그는 샤샤와
애인이 집에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황급히 부엌에 숨는다. 무려 20여분에 달하는 샤샤와 애인과의 대화는 어떤 면에서 이 영화의
뼈대이기도 하다. 샤사는 결별을 통보하는 애인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그의 애인은 당국을 비판하는 의견을 내서 반체제 인사로
찍혔다. 학자였던 그는 연구소에서 쫓겨나 묘지에서 무덤파는 일로 연명하고 있다. 미국이나 이스라엘로 망명할 생각을 하고 있는 그를
샤샤는 붙잡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판필로프는 반체제 지식인이 무덤파는 일을 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소련의 현실을 에둘러
비판한다. 원래 당국의 뜻대로라면 이 영화는 체제를 비판하는 이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주었어야 했다. 그러나 '테마'는
선로에서 이탈한 기관차처럼 달려간다. 애인과의 결별에 혼절한 샤샤를 내버려두고, 예세닌은 모스크바로 급히 떠난다(문 앞에 쓰러진
샤샤를 넘어가는 예세닌의 모습은 홍상수의 '해변의 여인(2006)'에서 김승우가 문간에 취한 채 잠든 고현정을 넘어가는 장면을
떠올리게 만든다).
나는 원래 영화에 관한 글을 쓸 때, 결말은 가급적 언급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어쩔 수 없이 결말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 검열과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추운 겨울밤,
정신없이 차를 몰던 예세닌은 갑자기 샤샤가 걱정되기 시작한다. 가던 길을 돌아서려는 순간, 차가 뒤집힌다. 그는 겨우 빠져나와
근처 공중전화에서 샤샤에게 전화를 건다. 말을 잇지 못하고 쓰러진 그를 도로 순찰 경찰이 발견하고 차에 싣는 정지 화면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원래 판필로프 감독이 찍었던 장면은 예세닌이 사고로 죽는 결말이었다. 그러나 검열 당국은 주인공의
'죽음'이 결코 바람직한 결말이 아니라며 삭제할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타협한 결말에서는 예세닌의 생사를 알 수 없게 처리했다.
그럼에도 영화사 창고에 쌓이는 신세가 된 영화가 다시 빛을 본 것은 7년 후의 일이었다. 개혁 개방의 바람을 타고 관객과 드디어
만난 '테마'는 그 진가를 인정받았고, 베를린 영화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다.
영화의 초반부, 수즈달로 향하는
차 안에서 예세닌은 슈베르트의 가곡 '겨울 나그네'를 틀어놓는다. 동행한 작가 친구는 슈베르트는 청승맞기 짝이 없다며 다른 걸
틀으라고 소리친다. 그러나 예세닌은 그럴 생각이 없다. 억압적인 체제에서 자신의 뜻대로 글을 쓸 수 없는 극작가, 체제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로 나라를 떠나야 하는 샤샤의 애인, 그들은 모두 쓸쓸한 겨울 나그네 같다. 사랑했던 여인의 결별에 상심한
겨울 나그네는 추위와 고독 속에 헤매며 죽음을 예감한다. 가곡에 담긴 그 음울하고 고통스러운 여정을 '테마'는 소련의 현실에
빗대어 영화적으로 변주한다. 관객들은 검열의 칼날에 맞서 자신의 작가적 목소리를 낸 판필로프의 의지를 '테마'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영화 '테마'의 포스터. 뭔가 SF적인 느낌이 들지만, 권력에 영합하는 작가의 허상이 부서지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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