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바실리 슉신이 보여주는 러시아의 영혼, 붉은 가막살 나무(Калина красная, The Red Snowball Tree, 1973)

 

*이 글에는 '붉은 가막살 나무(Калина красная, 1973)'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교도소에서 합창 공연을 펼치는 재소자들의 모습에서부터 시작한다. 절도죄로 형기를 마치고 나온 예고르(바실리 슉신 분)는 펜팔로 알게된 여자 친구 류바를 찾아간다. 평화롭고 한적한 농촌 마을에서 류바는 노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 류바와의 미래를 꿈꾸는 예고르. 그러나 그는 전과자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냉대와 편견과 마주하고 실망하게 된다. 과연 예고르는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평범한 일상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바실리 슉신(
Vasily Shukshin) 감독의 1973년작 '붉은 가막살 나무(Калина красная)'는 구 소련 영화들 가운데 경이적인 흥행 성적을 거두었다. 개봉 첫해의 관객은 6250만명에 달했다. 소련은 국가가 영화사를 설립하고 운영했으며, 영화의 상영 및 배급도 국가의 관리하에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로 인한 수익은 모두 국고로 귀속되었는데, 소련 영화의 수익률은 대략 900%정도 였다. 당시 소련 관객들에게 높은 인기를 누렸던 장르는 '코미디'였다. 코미디 영화의 감독들은 높은 수익을 내는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에 대우도 남달랐다. 그런 현실 속에서 슉신의 영화가 이룬 성취는 특별해 보인다. 출소한 재소자의 귀향이야기를 담은 영화에 왜 소련의 관객들은 그토록 호응했던 것일까? 사실 러시아인이 아닌 외국인의 시선으로 이 영화를 해석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예고르는 류바의 마을에 와서 붉은 가막살 나무 숲속을 거닐며 새들에게 말을 건넨다. 그는 그 나무를 무척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 붉은 가막살 나무는 자작나무처럼 흰색의 목질부를 갖고 있으며 작고 붉은 열매들이 열린다. 러시아어로 '칼리나 크라스나야(Kalina krasnaya, 영화의 제목이기도 함)'라고 불리는 이 나무는 러시아 민속문학에서 매우 중요한 상징성을 띤다. 특히 열매의 '빨강색'은 사랑과 아름다움, 젊음과 열정, 슬픔과 고통에 이르는 정서까지 폭넓게 포함한다. 영화 속에서 예고르는 붉은색 셔츠를 입고 나온다. 그것은 가막살 나무의 열매색이다. 예고르에게는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의미하는 색이며, 농촌 출신인 그의 근원으로서의 자연을 떠올리는 색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붉은색은 예고르에게 슬픔이기도 하다. 그는 류바에게 자신의 별명을 '슬픔(grief)'으로 소개하는데, 이것은 범죄와 이어진 어두운 과거와 정상적인 삶의 경로에서 벗어난 이의 고통과도 맞닿아 있다. 

  그 고통은 예고르가 류바와 함께 자신의 어머니를 찾아간 장면에서 정점을 이룬다. 그는 류바에게 사회복지사인 것처럼 위장해서 노파의 안부를 물어달라고 부탁한다. 아들 세 명을 전쟁에서 잃은 노파는 나머지 아들 하나는 20년 동안 만날 수 없었다고 말한다. 차마 어머니의 얼굴을 볼 수 없었던 예고르는 나중에서야 류바에게 사실을 털어놓고 흐느낀다. 원래 예고르의 어머니 역할을 하기로 했던 배우가 있었으나, 늙은 배역의 연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슉신은 마을 주민 가운데 한 명을 섭외했다. 실제로 아들 셋이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못한 노파는 자신의 이야기를 그대로 했고, 슉신은 그것을 자연스럽게 영화 속에 담았다. 자식을 잃은 슬픔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노인의 연기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소련 당국이 '애국 전쟁'이라는 명칭을 붙이며 영광스런 승리로 포장한 그 전쟁은 많은 소련인들에게 고통스러운 과거였다. 노파는 아들의 죽음으로 자신이 받는 연금에 대해서도 말하는데, 그것은 너무나도 적은 액수였다. 그 장면에 대해 검열 당국은 불편한 심기를 보였고, 슉신은 편집 과정 내내 당국과 지루하고 치열한 싸움을 이어가야만 했다.

  출소한 범죄자가 착실하게 갱생의 길을 가면서 희망적인 미래를 보여주는 것, 그것이 당국이 원하는 이상적인 그림이었다. 그러나 슉신은 예고르를 예정된 비극으로 이끈다. 과거 조직원들은 자신들과 함께 하지 않으려는 예고르를 응징한다. 그가 막 트랙터로 씨를 뿌린 밭의 가장자리 풀숲에서 예고르는 피를 흘리며 류바의 품에서 숨을 거둔다. 흰색의 셔츠를 붉게 물들이는 예고르의 피는 그렇게 '칼리나 크리스나야' 열매색이 가진 또 다른 의미인 슬픔과 고통에 도달한다. 슉신의 아내이기도 했던 류바 역의 배우 리디아 페도세예바는 죽어가는 예고르를 안고 통곡하는데, 그 장면이 더 슬프게 보이는 이유가 있다. 이듬해인 1974년, 새로운 영화를 촬영 중이던 슉신이 사고로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

  '붉은 가막살 나무'에는 전쟁의 상처, 좌절된 꿈, 거기에 국경 지대의 소박한 농촌 마을과 자연의 풍광이 더해져 있다. 슉신 자신이 각본을 쓴 이 영화는 경제 불황의 터널을 지나는 당시의 소련인의 감성과 크게 공명했다. 영화의 엄청난 흥행에는 당시 관객들의 관객성, 거기에 러시아인들만이 느낄 수 있는 근원적 정서도 작용했다. 그런 이유로 이 영화를 외국인의 시선으로 단지 영화적 의미만을 분석하는 것은 피상적인 작업에 그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영화 속 예고르를 통해 슉신이 보여주였던 자연과 땅, 농촌의 소박한 사람들에 대한 깊은 애정은 언어와 민족성의 장벽을 뛰어넘어 전달된다. 그렇게 오늘날의 관객은 시인이며 소설가, 배우이며 감독이었던 바실리 슉신의 유작 '붉은 가막살 나무'를 통해 러시아의 정신과 만난다. 


*사진 출처: mosfilm.itcenter.pro   영화 '붉은 가막살 나무' 촬영 현장의 바실리 슉신(붉은색 셔츠)과 아내 리디아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

황량하고 고독한 결혼의 풍경, 아내(妻, Wife, 1953)

  *이 글에는 '아내(妻, 1953)'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카가와와 미네코는 결혼 10년차 부부다. 영화는 부부 각자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관객은 결혼 10년 동안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서로 푸념하는 부부의 속내를 듣게 된다. 이 부부에게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그들은 별다른 소통도 하지 않고 얼굴을 바라보는 일도 거의 없다. 아내에게 마음이 멀어진 남편은 사무실의 여직원에게 마음이 기운다. 무뚝뚝하며 돈에 집착하는 아내와는 달리, 여직원 사가라는 사근사근하고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성품을 지녔다. 아내가 아닌 새로운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나카가와. 아내는 남편의 변화를 눈치채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해 남편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한다. 과연 이 부부는 같이 살아갈 수 있을까? '아내(Wife, 1953)'는 나루세 미키오의 '방랑기(1962)' 원작자이기도 했던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의 '갈색의 눈동자'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영화는 위기에 처한 부부를 통해 결혼 생활의 황량하고 고독한 풍경을 그려낸다.   나카가와는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사무실에서 점심으로 먹는데, 밥에서 머리카락이 나온다. 미네코는 확실히 살림에는 별 뜻이 없는 듯하다. 그들 부부의 화해를 위해서 미네코의 친구는 장을 봐와서 식사 준비를 하려고 한다. 그런데 친구가 본 미네코의 주방은 제대로 된 칼도 없고, 그나마 그 칼도 무딘 상태다. 친구는 자취생의 주방 같다고 말하고, 나카가와는 아내의 음식은 맛이 없다고 답한다. 이 아내는 그렇다고 남편의 심기를 잘 헤아리는 것도 아니다. 저녁에 책 좀 읽고 자려는 남편 옆에서 과자를 우적우적 소리를 내며 먹는다. 식사하고 나서는 젓가락으로 이를 아무렇지 않게 쑤시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아내에게 나카가와는 마음이 멀어진다. 그렇다면 미네코의 삶의 낙은 뭘까? 교외에 2층 단독 주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세를 놓아 살림에...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의 삶과 작품 세계를 다룬 다큐 세 편

  1. BBC 다큐 'Francis Bacon : A Brush with Violence(1997)', 1시간19분 2. The South Bank Show 제작 'Francis Bacon(1985)', 55분 3. 미국 휴스턴 미술관(The Museum of Fine Arts, Houston) 제작, Francis Bacon: Late paintings(2020), 55분 * 위 세 편의 다큐들은 모두 유튜브에서 검색 가능함.   1945년, 런던의 전시회에 걸린 그의 삼면화(triptych, 세 개가 이어진 그림으로 주로 가톨릭의 제단화에 쓰였음)는 관객들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2차 대전이 막 끝난 직후여서 사람들은 가급적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들을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화가는 기괴하게 변형된 신체와 인물의 이미지들을 자신의 그림 속에 계속해서 변주해 나갔다. 그는 동성애자였으며, 술과 도박에 빠져 지냈고, 그림으로 누릴 수 있는 명예와 부를 생전에 다 누렸다. 죽어서도 그의 그림을 비롯해 쓰레기 같은 잡동사니 소장품이 엄청난 가격에 팔리고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아마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도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를 무시무시한 이미지로 그려낸 초상 연작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1997년에 BBC에서 제작한 다큐는 화가 베이컨의 일대기와 작품, 그의 주변 지인들의 인터뷰를 충실하게 담고 있다. 이 다큐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화가의 작품 세계에 입문하려는 이들에게 아주 좋은 안내자가 되어준다. 거칠고 폭력적인 아버지와의 불화, 베를린과 파리에서 지냈던 20대 초반의 시절,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시작했던 경력의 초창기,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하는 30대, 그리고 그의 동성 연인들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베이컨은 자신의 성적 지향을 드러내는 것에 무척 솔직했다. 동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