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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사랑했던 이의 삶은 이어진다, 두 사람(ふたり, Chizuko's Younger Sister, 1991)

  

  미카는 늘 언니인 '치즈코의 동생'으로 불린다. 언니는 못하는 것이 없다. 공부는 물론이고, 피아노와 연기, 달리기까지 다 잘한다. 그런 언니와는 달리 미카는 모든 것이 서툴러 보인다. 무언가를 잘 빼먹고, 덤벙대는 미카를 보며 주변 사람들이 언니 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완벽한 언니 치즈코가 어느 날, 갑작스런 사고로 세상을 뜬다. 치즈코의 동생 미카는 그렇게 언니를 잃었다. 오바야시 노부히코(大林宣彦) 감독의 1991년작 '두 사람(ふたり, Chizuko's Younger Sister)'은 언니의 죽음을 마주하게 된 중학생 소녀의 내적인 여정을 그린다. 

  영화는 온갖 물건들이 제멋대로 놓인 미카의 방을 비춰주면서 시작한다.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미카의 방은 미카의 내면과도 닮아있다. 미카는 언니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미카의 상태만 불안한 것이 아니다. 미카의 엄마 또한 영 기운이 없어 보이고, 아파 보이기까지 한다. 그나마 집안의 가장인 아빠는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회사 업무 때문에 자주 출장을 가야하는 아빠. 아빠는 미카에게 엄마를 잘 보살펴야한다는 당부를 하지만, 자신을 추스리기도 힘든 미카가 그걸 잘 해낼 수 있을까? 그런데 미카에게는 수호천사가 있다. 미카의 눈에만 보이는 언니의 혼령이 미카를 돕는다. 언니는 미카가 밤길에 치한을 만났을 때 처음으로 나타나서 도움을 준다. 그렇게 미카의 곁에 머물게 된 언니는 미카의 일상을 함께 한다. 피아노 연주회에서는 긴장을 풀어주고, 운동회에서는 느리게 뛰는 미카를 격려해서 1등으로 들어오게 한다. 연극의 주연을 맡았지만, 언니만큼 잘 해낼 수 없어 상심한 미카를 위로하기도 한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만, 아직은 동생을 떠날 수 없는 언니 덕분에 미카는 서서히 충격과 상처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 영화의 러닝 타임은 무려 2시간 반이나 된다. 1989년에 아카가와 지로가 발표한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했는데, 원작을 충실하게 보여주느라 영화가 늘어진 감이 없지않아 있다. 당시로서는 꽤나 공들였을 특수 효과는 오늘날 관객들의 기대에는 당연히 미치지 못한다. 운동회에서 미카와 함께 뛰는 치즈코의 허술한(!) 모습은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다소 산만하고 지루한 내러티브를 오바야시 노부히코 감독은 등장인물들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보여주는 연출력으로 극복한다. '두 사람'의 중심을 이루는 뼈대는 갑작스런 언니의 죽음으로 힘들어하는 미카의 내적인 여정이지만, 그 여정에는 미카의 부모, 미카의 성실한 친구 하세베, 언니의 남자 친구 토모야도 함께 한다.

  아마도 이 영화의 후반부에서 뜻밖의 사건은 미카의 아빠에게 생긴 일일 것이다. 딸의 죽음이 준 충격에서 회복하지 못하는 아내를 바라보는 일에 지친 것일까? 미카의 아빠는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뺏긴다. 원작자 아카가와 지로는 슬픔을 극복하는 소녀의 이야기에 아버지의 불륜 이야기를 넣어야 하느냐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아이의 삶에는 실제로 다양한 일이 생길 수 있으며, 자신은 그것을 쓰고 싶었다고 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가까운 이의 '죽음'이 산자들의 삶에 끼치는 지속적인 영향과 변화에 대한 것이다. '두 사람'의 등장 인물들은 각각의 방식으로 그 고통을 마주하고 견딘다. 이것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심리적 회복탄력성(psychological resilience)'과도 관련이 있다. 그것은 삶을 위기에 빠뜨리는 사건과 마주했을 때, 이전으로 빠르게 돌아갈 수 있는 정신적 대응능력을 일컫는다. 미카의 엄마가 딸의 죽음을 겪으면서 보여주는 정서적인 붕괴는 기질적인 문제에 더해진 낮은 심리적 회복탄력성에 의한 것이다. 미카는 언니의 도움으로 일상에 안착하지만, 미카의 아빠는 위기를 극복할 적절한 방식을 찾는 데에 실패한 것인지도 모른다.

  "언니를 데려간 것은 하늘의 뜻이야. 너에게는 그 언니의 몫까지 살아내야할 의무가 있는 거야."

  무엇이든지 잘 하고 영민한 언니 대신에 자신이 죽는 것이 맞지 않냐고 미카는 친구 하세베에게 말한다. 그 말에 화가 난 하세베는 미카에게 그렇게 일러준다. 미카는 항상 의지했던 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살아내는 연습을 해나간다. 그 여정의 끝에서 언니는 미카에게 작별을 고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 언니가 세상을 떴을 때의 나이가 된 미카의 뒷모습은 언니 치즈코와 닮아있다. 미카는 언니에 대한 글을 쓰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미카가 사랑했던 언니의 삶은 기억되고, 미카를 통해 이어진다. 오바야시 노부히코는 소녀 미카의 내적 성장과 치유의 여정을 항구도시 오노미치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 잔잔하게 풀어낸다. 히사이시 조가 담당한 영화 음악은 다소 과한 느낌이 있지만, 영화 속 치즈코의 테마라 할 수 있는 '풀의 마음(草の想い)'은 오랫동안 여운을 남긴다.


*사진 출처: blog.goo.ne.jp   미카 역의 이시다 아키라와 치즈코 역의 나카지마 토모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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