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하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생각해 보면 여러가지 방법이 있겠지."
남자의 직업은 지하철 검표원. 그의 일상은 지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는 업무가 끝나고도 집에 가지 않고 지하철 승강장에서
잔다. 마음에 드는 처자가 커피 한 잔 산다며 카페에 가자고 해도 선뜻 가지 못한다. 카페는 지상에 있기 때문이다. 지하를
벗어나면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는 걸까? 그의 전직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예전의 동료와 우연히 만나서 하는 대화를 들어보니,
자신의 분야에서 아주 잘 나갔던 사람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안정된 직장도 그만두고 이렇게 지하 인간이 되어버렸을까? 무언가 비밀을
가진 듯한 남자의 이름은 볼츄. 지하에 자신을 유폐시키는 삶이 싫어진 그가 친한 선배에게 묻는다. 미국 태생의 헝가리 감독
님로드 안탈(Nimród Antal, 헝가리식 이름 표기는 성을 먼저 쓰므로 '안탈 님로드'로 표기함)의 2003년작
'Kontroll'은 부다페스트 지하철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독특한 심리 스릴러물이다.
볼츄의 주 업무는 승객들의
지하철 표를 검사하는 것(Kontroll)이다. 그는 하루종일 천차만별(이라고 쓰고 실상은 골때리는)의 승객들과 티켓 실랑이를
벌인다. 무임승차 승객들에게 얻어맞고 골탕먹는 것은 별 것 아닌 일상. 볼츄가 일하는 지하 공간에서는 그보다 더한 일도 일어난다.
승객들의 투신 자살은 낯설지 않다. 어쩌면 볼츄와 그 동료들이 보여주는 또라이 같은 행동은 지하 생활자로서 생존하기 위해 터득한
특성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날, 볼츄는 동료를 놀려먹고 달아난 젊은 승객을 뒤쫓는다. 그런데 갑자기 검은 두건을 쓴 남자가
젊은 승객을 지하철이 들어오는 철로로 밀쳐서 죽게 만드는 장면을 목격한다. 두려움 때문에 두건 남자를 잡지 않은 볼츄는 졸지에
승객 살인범으로 몰린다. 얼마 후, 새벽에 몰래 열리는 지하철 파티에서 볼츄는 두건 살인범과 마주친다. 과연 그는 살인범을 잡을 수
있을까?
'Kontroll'은 빠르고 역동적인 편집과 강한 록 비트의 음악이 돋보인다. 특히 헝가리 인디 밴드
'Neo'가 들려주는 음악은 음울하고 기이한 지하 공간의 느낌과 아주 잘 맞아떨어진다. 거의 20년 전 영화인데도, 이 영화가
보여주는 화면과 그것이 담고 있는 정서는 전혀 낡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님로드 안탈은 관객들로 하여금 지하 세계의 구석구석을
탐험하게 만든다. 지하철을 드나드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모습, 거대한 전동차의 무시무시한 속도, 미로처럼 얽힌 선로들, 그리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탈과 범죄... 안탈이 형상화한 지하 공간은 도시인들의 온갖 욕망이 충돌하며, 그들의 무의식이 하수구처럼
모이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내면이 피폐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영화는 직원들이 지하철 공사의 정신과
주치의와 면담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기면증과 편집증을 비롯해 다양한 불안과 고통을 호소하는 직원들의 모습은 코믹하게 묘사되었지만,
그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매우 현실적인 문제이다. 볼츄의 동료 직원이 승객과 말다툼 끝에 칼부림을 하는 장면은 지하 공간의
병리성을 부각시킨다.
그런 지하 공간을 주인공 볼츄는 편안한 안식처로 생각한다. 그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지상의 삶에서 도피한 사람이다. 지상과 그 현실의 삶과 마주하지 못하는 그의 내면에는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다. 검은
두건의 지하철 살인마는 어떤 면에서 볼츄의 두려움이 형상화된 실체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그와 마주쳤을 때, 볼츄는 눈을 감고 그가
지나가는 것을 외면한다. 저돌적인 볼츄의 성향으로 보았을 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자신이 싫어하는 직원 곤조와의
Railing(전동차가 들어오는 선로에서 목숨을 걸고 하는 달리기 시합)에서 볼츄는 지지 않는다. 그런 그가 눈 앞의 살인마를
보고 얼어붙는다. 볼츄는 그런 자신의 모습에 심한 분노와 자괴감을 느낀다. 그리고 이어진 두건 살인마와의 재대면. 그것은 지하의
삶에 스스로를 가두는 자신의 내면과도 마주하는 일이다.
님로드 안탈은 'Kontroll'에 코미디, 스릴러,
로맨스, 액션을 맛깔나게 버무려 놓는다. 거기에는 지하 공간에 대한 그의 독창적인 사유와 그곳의 사람들에 대한 심리적 탐구가
지도처럼 펼쳐져 있다. 관객들은 안탈이 그려낸 지도를 따라 부다페스트의 지하 세계를 만나게 된다. 지하 인간으로 살면서 그곳에서
벗어나기를 꿈꿨던 볼츄는 과연 방법을 찾았을까? 영화의 마지막에 볼츄는 연인과 함께 지상으로 나가는 에스컬레이터 앞에 선다.
볼츄의 지상으로의 비상처럼, 새로운 세대의 헝가리 감독 님로드 안탈의 첫 영화도 그렇게 떠올랐다.
*사진 출처: eef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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