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의 내 머릿속에는 예술과 음악으로 가득찼었는데, 내 나이 서른 여섯, 이젠 오로지 돈 생각만 할 뿐이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쁜 궁핍한 극작가 월러스는 약간은 어색하고 불편한 저녁 식사 약속을 앞두고 있다. 연극계에서 잘 나가던
연출가 앙드레는 처자식을 내버려두고 어느날 갑자기 잠적했다. 월러스는 그가 티벳이며 세계 이곳저곳을 떠돈다는 이야기만 들었다가,
최근에 지인으로부터 앙드레를 봤다는 소식을 듣는다. 자신의 희곡을 무대에 올려준 예전의 인연도 있고, 그가 어떻게 지냈는지 안부도
궁금해진 월러스는 앙드레와 저녁을 같이 하기로 한다. 1시간 50분에 달하는 러닝타임은 고급 레스토랑에서 그 두 사람이 저녁을
먹으며 나누는 대화로 이루어진다. 영화 속 등장인물 월러스와 앙드레는 실제 연극계 종사자로 실명으로 등장한다. 월러스는 친구
앙드레와 나눈 대화를 희곡으로 써서 연극으로 올릴 생각이었으나 영화가 더 낫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 소식을 들은 루이 말은
감독을 자청했고, 그렇게 '앙드레와의 저녁 식사'가 만들어졌다.
월러스는 딱히 할 말도 없고, 질문을
계속 던짐으로써 앙드레가 이야기를 들려주도록 유도한다. 처음에는 머뭇거리던 앙드레의 말문이 터진다. 영화는 거의 앙드레의
1인극처럼 보일 정도다. 월러스는 중간 중간 추임새를 넣다가, 식사가 끝날 무렵에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 그런데 앙드레, 이
양반이 들려주는 방랑기가 정말 골때린다. 앙드레는 자신의 절친 그로토프스키의 연극 세미나에 대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일반인 40명과 숲속에서 진행된 기이하기 짝이 없는 그 연극 캠프는 하루종일 노래를 부르거나,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지내는 일종의
실험적 연극 캠프였다. 앙드레는 계속해서 그로토프스키의 이름을 언급하며 그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런데 어째 그 이름이
낯설지가 않다. 예전에 연극 수업에서 들었던 이름이다. 그렇다. 그로토프스키(Jerzy Grotowski)는 폴란드 출신의 유명한
연출가로 일명 '가난한 연극'으로 연극 연출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사람이다.
앙드레 그레고리는 그로토프스키가
미국에서 3년 남짓 체류할 때, 실제로 무척 가깝게 지냈고 그의 미국 정착을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수동적 관객의 존재를
배제하고, 연극의 원초적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는 그로토프스키의 급진적 연극론은 시간이 갈수록 미국에서 별다른 호응을 얻어내지
못했다. 그는 미국 체류를 끝내고 이태리로 건너가 그곳에서 자신의 연극적 실험을 이어갔다. 나중에는 일반적 연극 연출은 포기하고,
자신과 가까운 친구와 연극 관계자들만을 초청한 연극 세미나를 이끌었다. 영화에서 앙드레가 말하는 숲속 연극 캠프 이야기는 그렇게
초청받아 참가한 경험에서 나왔을 것이다. 불 없이 숲에서 지내기, 아침에 직접 빵 구워보기를 비롯해 파놓은 구덩이에 참가자를
들어가게 해서 머리만 내놓고 흙으로 덮기 등등, 일반인의 시각에서는 기상천외한 실험 연극적 시도가 이어졌다. 영화에서 앙드레가
친구들이 자신을 구덩이에 내던져 파묻었다가 나중에 꺼냈다는 이야기도 결코 허황된 것만은 아니다.
아무튼 이
특이하기 짝이 없는 연출가의 방랑은 폴란드의 숲, 스코틀랜드의 핀드혼, 사하라 사막 등등 세계 곳곳으로 이어진다. 도대체 앙드레는
왜 그런 곳을 다니며 무엇을 찾아 헤맸던 것일까? 매일매일 쌓이는 공과금 고지서와 씨름하고, 자신의 희곡을 올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목구멍이 포도청인 월러스에게 앙드레의 기행은 팔자 늘어진 유람처럼 보인다. 앙드레는 자신의 삶의 본질, 존재의 진정한
자각을 찾아 떠났다고 온갖 철학적인 수사를 늘어놓는다. 웨이트리스로 맞벌이하는 여자친구와 같이 저녁을 먹을 수 있기를 꿈꾸는
월러스는 앙드레가 찾는 인생의 의미가 머나먼 나라들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녁에 마시다 놔둔 커피를 아침에 마시려는데
바퀴벌레가 없으면 만족한다는 월러스. 그가 뉴욕의 추운 겨울을 견디게 해준 전기 장판이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하자 앙드레의 반응은
이렇다.
"전기 장판이 주는 안온함은 실재를 인식하는 것을 방해한다구. 그건 우리가 '추위'를 느끼지 못하게 만들지. 그런 것 없이 사는 것이 진짜 세계와 대면하는 거야."
이미 전기 장판 없이 살 수 없는 몸뚱이가 되어버린 뉴요커 월러스는 황당한 표정으로 앙드레를 바라본다. 월러스는 앙드레가 말하는
결정론적 세계관, 운명, 무의식 같은 것에 별로 동의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리하여 마침내 식사가 끝나고 커피를 마실 때쯤
월러스는 앙드레의 이야기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털어놓는다. 아마 앙드레도 월러스가 말하는 일상의 행복과 과학적 합리주의를
받아들일 생각은 없을 것이다. 레스토랑의 손님들이 이미 1시간 전에 다 나가고 문 닫을 시간까지 이어진 대화는 그렇게 마무리된다.
집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탄 월러스는 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새로운 느낌을 받는다. 늘 별
생각없이 바라보던 차가운 콘크리트 건물들에서 어릴 적 자신과 아버지의 추억을 떠올린다. 어쩌면 앙드레와의 대화가 월러스의 세계를
조금은 바꾸어 놓았는지도 모른다. 때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낯설고 기이한 사람들과의 만남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다. 새삼 오래전 서양 현대 철학사를 한학기 동안 머리 아프게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 강의가 결국 내게 남긴 것은
후설(Edmund Husserl)의 현상학 한 조각이었다. 나의 지평과 너의 지평이 만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것, 월러스의
지평은 앙드레의 지평과 만나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간다. 그건 앙드레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앙드레와의
저녁 식사'를 재미있는 영화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화로만 이루어진 이 이상하고 지루한 영화를 통해 자신의 영화적 지평을
넓히려는 이들은 언젠가 재생 버튼을 누르게 될 것이다.
*사진 출처: criteri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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