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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된 F1 영웅의 서사, 세나(Senna, 2010)

 

  어제 저녁에 클래식 FM 실황 음악회에서는 올해 조르주 에네스쿠 콩쿨 수상자 특집을 방송해주었다. 요새 떠오르는 젊은 연주자들은 모두 다 뛰어난 기량을 지녔지만, 내게 그렇게 깊은 인상을 준 이들은 없었다. 다들 잘 하네, 하고 듣다가 바이올린 부문 연주에서 깜짝 놀랐다. 무슨 예전 거장의 음반을 틀어놓은 줄 알았다. 3위를 차지한 독일 출신의 타실로 프로브스트란 이름의 연주자는 이제 19살이 되었을 뿐이었다. 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재능, 그것도 아주 순전한 재능을 가진 연주자였다. 저런 연주자가 노력과 성실성을 겸비한다면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다. 아시프 카파디아(Asif Kapadia) 감독의 2010년도 다큐 '세나(Senna)'에도 카레이싱에 놀라운 재능을 가진 이가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아일톤(Ayrton), 세나는 그의 어머니가 결혼하기 이전의 성에서 따왔다. 그는 198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포뮬러 원(Formula One)을 지배했던 카레이서였다. 다큐는 그의 초기 경력, 영광의 순간, 라이벌과의 암투,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그의 생애를 다룬다.

  다큐의 구성은 지극히 단순하다. 106분의 러닝타임 가운데 포뮬러 원의 경기 장면이 40분에 이른다. 나머지 장면은 세나의 가족이 소유한 개인 비디오 화면과 뉴스를 비롯한 자료 화면이 채운다. 내레이션도 없고, 가족과 주변 지인들과의 인터뷰도 대부분 목소리로만 나오는 아주 절제된 구성이다. 자동차 경주에 별다른 관심도 없고, 세나가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도 이 다큐는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다. 감독 아시프 카파디아도 다큐를 만들기 전까지 세나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그는 '세나'라는 인물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드러내는 대신, 이 인물의 삶을 3막 구조의 서사 영화로 구성하는 데에 촛점을 두었다(2011년 wired.com과의 인터뷰 참조). 그가 보기에 이 인물의 생애는 영화만큼이나 극적이다. 우승을 다투는 적대적 경쟁자 알랭 프로스트(Alain Prost), 정치적이고 편파적인 FISA(포뮬러 원 주관 단체)의 회장 장 마리 발레스트르(Jean-Marie Balestre), 3연속 챔피언을 차지한 후의 내리막길, 경기 중의 사고로 인한 비극적 죽음... 카파디아는 마치 영웅의 신화를 구술하는 음유시인처럼 '세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포뮬러 원의 영웅은 특히 비 오는 날의 경주에서 더 뛰어났다. 세나가 경기 도중 비가 내리는 것을 보며 손가락을 위로 들어 환호하는 차량 내부 화면은 이 사람이 가진 재능의 특출함을 보여준다. 운전하는 사람이라면 싫어할 '비'라는 악조건이 세나에게는 축복이 된다. 그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편파적인 협회의 결정에도 맞선다. 1989년 일본 그랑프리, 세나는 라이벌 알랭 프로스트와 충돌한 후에 1등으로 들어왔음에도 승리를 취소당한다. 오히려 프로스트에게 반칙을 했다는 이유로 벌금과 자격 정지 6개월의 처분을 받는다. 그렇지만 그는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 프랑스 국적의 프로스트와 돈독한 사이였던 프랑스인 발레스트로 회장의 편파적인 영향력에 항의를 표명하고, 자신에게 부과된 불합리한 경기 조건을 거부한다. 그리고 그는 계속된 승리로 포뮬러 원에서의 자신의 역사를 써나간다. 놀라운 능력을 가진 영웅과 그와 반대편에 선 적대자들. 이처럼 이야기의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질 수 있을까? 영화처럼 구성된 흥미진진한 다큐는 흥행에서도 성공했다.

  다큐에서 세나를 괴롭히는 나쁜 경쟁자처럼 나오는 알랭 프로스트 입장에서는 이 다큐가 불편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달성한 포뮬러 원에서의 4번의 챔피언 기록 보다는 세나와의 반목과 갈등이 그를 규정짓기 때문이다. 프로스트는 다큐가 세나와 자신이 동료로서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해가며 경력의 마무리를 짓는 과정을 누락시켰다며 불만을 표명하기도 했다. 어쨌든 세나의 장례식에서 관을 운구하기도 했던 프로스트와 세나의 마지막 관계가 어떠했는지 이 다큐의 관객들은 알지 못한다. 프로스트는 마치 피터 셰퍼의 희곡 '아마데우스'의 영원히 미움받는 살리에리처럼 낙인이 찍혀버린 것 같다. 궁정 음악장인 살리에리는 모짜르트와 경쟁 관계가 아니었다. 그는 모짜르트 사후 미망인 콘스탄체와 모짜르트의 아들에게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관대하고 명망 높은 음악가였음에도 셰퍼의 희곡에서는 악의적으로 묘사되었다. 프로스트에게 다큐 '세나'는 오래되고 무거운 짐짝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다큐만 보면 세나는 자동차 경주의 영웅으로 암담한 현실의 조국 브라질에 주어진 커다란 희망, 브라질 아이들의 복지를 위해 애쓰는 자선 사업가, F1 선수들의 안전을 위해 고민하고 노력하는 인물이다. 이처럼 완벽한 영웅은 비극적인 죽음으로 생을 마감함으로써 신화가 된다. 자동차 부품의 기계적 결함으로 최종적으로 판명이 난 사고의 원인을 다큐는 깊이있게 파고들지는 않는다. 그저 그 모든 비극은 '자동차 경주 산업이 만든 것이다'라는 말로 두루뭉실하게 언급될 뿐이다. 국가적으로 치루어진 세나의 장례식 장면으로 영웅의 죽음은 마무리된다. 이 다큐는 자료 화면을 제공한 포뮬러 원(물론 다큐 제작시 큰 돈을 내고 구매한 것이다), 세나의 일상이 담긴 홈 비디오 화면을 제공한 세나의 유가족들과 사전에 철저히 조율되었다. 과연 그렇게 잘 재단된 한 인물의 다큐가 진실과 근접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세나의 개인 비디오에 함께 나오는 여성들은 매번 얼굴이 다른데 그가 사귄 여성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 나는 오히려 '세나'를 보고나서, 진짜 세나는 어떤 사람이었을지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세나'는 다큐멘터리 제작자의 관점이 제거된, 영화화된 자동차 경주 영웅의 이야기이다. 아시프 카파디아는 어떤 면에서 자료 화면을 영혼없이 이어붙인 편집자처럼 보인다. 그런 그가 2015년에 만든 다큐 '에이미(Amy)'에서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삶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을 보여준 것은 놀랍다. 적어도 한 인물의 다큐에는 제작자의 어떤 관점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대중의 호응, 또는 극심한 반발을 가져오는 것일지라도 하나의 관점을 채택한다는 것은 다큐 작가로서의 발언인 셈이다. '세나'는 아주 흥미있는 다큐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이렇듯 잘 만들어진 영웅의 신화에는 영웅의 인간적 모습이 들어있지 않다. 그렇게 '세나'는 인간적인 숨결을 제거해버린 영웅의 감동적인 서사로 남았다.


*사진 출처: wire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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