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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스 다신이 보여주는 1940년대 뉴욕의 풍경, The Naked City(1948)

 

  영화는 도입부부터 특이하다. 항공 촬영으로 뉴욕 도시를 조망하는 장면과 함께 남성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 영화의 제작자 마크 헬린저(Mark Hellinger). 그는 관객에게 앞으로 보게 될 영화에 대한 대략적인 소개를 한다. 영화의 제목과 감독, 시나리오 작가와 배우 소개 등등... 그러고 나서 이어지는 설명과 함께 뉴욕의 무더운 여름날, 새벽 1시에 일어나는 살인 사건 현장으로 관객을 끌고 들어간다. 젊은 여자는 두 명의 남자에 둘러싸여 죽임을 당한다. 한 명의 얼굴은 보이지만, 다른 한 명은 등을 보이고 서있다. 다음날, 여자의 집으로 출근한 가정부는 시신을 발견한다. 사건이 신고되고, 그때부터 형사들의 범인찾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죽은 여성은 진 덱스터란 이름의 모델. 과연 누가, 왜 이 여자를 살해했을까?

  오늘날의 관객에게 70년 전의 범죄 수사 과정을 보는 것은 나름대로 흥미롭다. 사건 현장에 출동한 형사 반장 멀둔은 현장에서 발견된 증거물인 남자 잠옷을 아무렇게 않게 들어서 살펴 본다. 당시의 과학 수사라는 것이 기껏해야 검시와 지문 채취라는 전통적 방법이 전부라는 사실은 형사들의 어려움을 짐작하게 만든다. 살인범을 잡으려는 형사들은 뉴욕 바닥에서 바늘 찾는 형국으로 탐문 수사와 미행에 시간과 노력을 쏟는다. 사실, 이 영화에서 범인을 검거하기까지의 과정은 일반적인 필름 느와르 영화와 비교해 그다지 특출난 점이 없다. 그러나 '네이키드 시티'에는 제목에 들어 있는 '시티', 즉 뉴욕의 사람들과 그곳의 다채로운 풍광들이 담겨져 있다는 점에서 여느 범죄 추리물과 차별점을 갖는다. 마차에 실려 배달되는 우유, 아침에 미어터지는 뉴욕의 지하철, 범죄 소식을 알리는 신문 매체의 유통 과정, 사람들이 식사하는 카페와 번잡한 시장, 아이들이 자유롭게 뛰어다니며 노는 여름의 노상 도로... 영화는 1948년의 뉴욕이란 도시를 다큐멘터리처럼 담아낸다. 특히 일반 시민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은 눈에 띄지 않는 소형 카메라로 찍은 것이다. 

  영화의 그러한 사실주의적 면모는 거대 도시에서 일어나는 잔혹한 범죄와 도덕적 타락, 도시인의 익명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죽은 모델 진 덱스터는 장물아비와 공모해 보석을 훔쳐 화려한 생활을 유지하는 부도덕한 인물이다. 수사가 진행될수록 등장인물들의 불륜, 절도, 사기, 거짓말이 속속 드러난다. 돈을 추종하는 남자가 약혼녀에게 준 반지는 장물이다. 그런가 하면, 살인을 저지른 주범은 훔친 보석을 나누기 싫어서 공범을 죽인다. 나이든 남자는 젊은 여자의 미모에 눈이 멀어 범죄를 묵인한다. 이 도시는 벌거벗은 욕망으로 넘쳐나고 있으며, 그 욕망의 끝은 범죄와 맞닿아 있다. 평화로운 일상의 공간은 언제든 범죄가 틈입할 수 있다. 아이들이 물놀이하는 강에서는 시체가 떠오르고, 도시의 일상적 공간인 도로와 다리는 범죄자가 탈주극을 벌이는 장소가 된다. 젊은 형사 할로런은 자신의 아이가 집앞을 벗어나 근처 큰 도로에 혼자 갔다왔다는 아내의 말에 걱정한다. 이 도시에서 완벽한 안전은 결코 담보할 수 없다.

  '네이키드 시티'는 도시가 갖고 있는 양면성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화려한 쇼윈도, 부유층의 주거지와 대비되는 범죄자가 사는 빈민가가 있다. 고급 병원의 안락한 진료실의 의사와 고층 건물 현장에서 위험한 일을 하는 막노동자는 또 다른 대조를 이룬다. 영화의 마지막, 형사들의 추격을 피해 다리의 맨 꼭대기까지 올라갔던 범인은 추락한다. 밑바닥 인생을 전전했던 범죄자는 비상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을 검거하러 온 형사 할로런에게 전직 레슬러인 자신의 육체를 과시하며 자신은 머리도 좋다고 말한다. 강인한 육체와 좋은 머리를 갖고도 하층민이 생존하기에 이 크나큰 도시는 냉혹하고 비정한 곳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선택한 범죄의 길은 파멸로 이어진다.

  영화의 마지막에 촬영에 협조해준 뉴욕시 당국에 고마움을 표하는 자막이 뜬다. 뉴욕이란 도시는 일찍부터 영화의 상업성에 눈을 떴고, 그것은 곧 정책적 지원과 혜택으로 이어졌다. 뉴욕은 영화 제작시 다른 도시에 비해 적은 세율을 적용한다.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이 많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디파티드(The Departed, 2006)'도 영화 속 배경은 보스턴이지만, 실제 대부분의 촬영은 뉴욕에서 이루어졌다. 뉴욕시가 제공하는 세금 감면 혜택이 그만큼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네이키드 시티'는 줄스 다신의 재능과 독창성이 돋보이는 영화인 동시에 뉴욕이란 도시로의 매혹적이고 놀라운 시간여행이기도 하다.  


*사진 출처: criterion.com


**사진 출처: criterion.com   감독 줄스 다신(Jules Dass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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