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에릭 로메르의 영화적 청사진, 사자 자리(Le Signe Du Lion, The Sign Of Leo, 1962)

  

  'mooch'라는 영어 단어가 있다. 속어로 쓰이는 이 단어는 남에게 무언가를 뜯어낸다는 뜻으로 쓰인다. 예를 들면 담배 한 개피 얻는 것, 빈대를 붙는 행위 같은 것들을 총칭한다. 그다지 좋지 않은 어감의 단어인데, 에릭 로메르의 '사자 자리(Le Signe Du Lion, 1959)'를 보는 내내 그 단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주인공 피에르는 가진 돈이 다 떨어져서 어떻게든 자신의 친구와 지인들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파리 시내를 헤매고 다닌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뜨거운 한여름의 파리에 그가 빌붙을 친구들은 모두 어디론가 떠났다. 해외 출장을 가거나, 더위를 피해 휴가지로 가버렸다. 명색이 작곡가로 파리 문화계에 나름의 인맥을 갖고 있는 피에르는 노숙자로 전락한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에릭 로메르의 장편 데뷔작 '사자 자리'는 별자리의 운명을 믿는 남자 피에르의 천국과 지옥을 그린다.

  피에르(제스 한 분)의 천국은 한 장의 전보에서부터 시작된다. 후사가 없는 부자 친척 아주머니의 부고는 피에르에게 파티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와도 같다. 조카인 자신에게 상속이 될 거라 믿는 피에르는 친구들을 죄다 불러 모아 흥청망청 파티를 연다. 그저 그런 작곡가로 파리 생활을 겨우 겨우 버티던 이 독일계 미국인은 자신의 별자리인 사자 자리가 이 엄청난 행운을 가져다 주었다고 믿는다. 술, 음악, 여자 친구, 거기다 객기 넘치는 한 밤의 총질까지 피에르의 자축 파티는 날이 새도록 이어진다. 그런데 별자리의 운명이 피에르를 배반한 것일까? 유언장에 적힌 상속자는 피에르가 아닌 다른 사촌이었던 것. 피에르는 그렇게 천국에서 지옥으로 추락한다. 가진 책들을 팔아 끼니를 해결하고, 나중에는 숙박비를 내지 못해 허름한 호텔에서도 쫓겨난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면서 파리의 지인들을 수소문하며 다니는 피에르. 거는 전화마다 어디론가 떠나서 없다는 대답만 듣는다. 단벌 양복 바지에는 청어 통조림 뜯다가 흘린 기름이 묻어 있고, 수중에는 정말이지 땡전 한 푼도 없다. 그는 푹푹 찌는 7월의 파리를 무작정 걷는다. 피에르의 행색은 시간이 갈수록 그가 지나쳐가는 파리의 거지와 노숙자를 닮아간다.

  에릭 로메르는 다큐멘터리적인 구성으로 피에르의 몰락을 그려낸다. 6월 22일에 부고 전보로 시작된 피에르의 행운은 7월 13일에는 유언장 내용을 알리는 전보에 의해 끔찍한 불운으로 귀결된다. 그때부터 시작된 피에르의 처절한 파리 생존기는 노숙자의 삶으로 이어진다. 로메르는 피에르가 헤매고 다니는 파리 시내 곳곳의 풍경과 사람들을 회화적으로 배치한다. 나들이 나온 연인들과 가족들, 유람선의 관광객들, 카페의 여유로운 사람들... 피에르의 눈에는 자신만 빼고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 보인다. 쓰레기통을 뒤지고, 물건 훔치다 들켜서 망신당하고, 강가에 떠내려온 과자 봉지 건지려고 애를 쓰고, 피에르는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결코 육체 노동을 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 룸펜 예술가에게 몸을 쓰는 일은 생존 선택지에 없다. 피에르의 몰락은 너무나도 처절하게 그려지지만, 거기에는 로메르만의 유머 감각이 느껴진다. 로메르의 세계에서 운명과 우연의 힘을 늘 발견했던 관객들이라면 어딘가에서 터질 피에르의 인생 한 방을 기다리게 된다.

  로메르는 피에르에게 닥친 행운과 불운을 시간에 따른 이미지로 변주한다. 피에르가 노숙자가 되기까지의 행색의 변화는 그 점을 잘 보여준다. 땀에 절은 양복, 면도를 하지 못해 덥수룩해진 수염, 지워지지 않는 바지의 생선 기름 얼룩을 보면서 관객들은 피에르가 가진 것 가운데 그나마 온전한 것이 신발이라는 점을 인지하게 된다. 그때, 카메라는 터벅터벅 걷고 있는 피에르의 뒷모습과 함께 구두를 보여준다. 그러고 나서 얼마 안가 피에르의 구두는 돌부리에 채여 터져 버린다. 로메르의 세계는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으며, 운명론이 지배하는 그 세계에서 돌발적인 변수와 일탈까지도 조화에 기여한다. 완전 거지꼴로 노숙자가 되어버린 피에르가 친구에게 발견된 것은 카페에서 자신의 곡을 바이올린으로 연주할 때이다. 그 친구가 전한 소식은 피에르가 믿는 사자 자리의 행운이 결코 허황된 미신이 아님을 입증한다.

  이 영화에 쓰인 음악은 프랑스의 현대 음악 작곡가 Louis Saguer의 바이올린 소타나이다. 음울하고 날카로운 바이올린 선율은 피에르의 몰락을 따라가며, 그가 처한 운명의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데에 기여한다. '사자 자리'는 1959년에 만들어졌으나 3년 뒤에야 개봉할 수 있었다. 영화는 상업적으로 철저히 실패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후 로메르가 만들어갈 거대하고 기이하며 아름다운 영화 세계의 전주곡으로 남는다. 피에르의 인생역전을 그린 '사자 자리'에는 그렇게 로메르의 영화적 세계에 대한 청사진이 담겨 있다.  
 


*사진 출처: listal.com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전후 일본 영화(Post-war Japan Movie, 1946-1955) 3편: 전후 일본 사회가 마주한 고통과 혼란,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

    노로는 고등학교 선생이다. 그는 과속을 하는 트럭을 피하려다 손을 다친다. 그가 받는 빠듯한 봉급으로 단칸 월세방 돈 내는 것도 힘든데 병원비까지 나가게 생겼다. 그는 학교에서 그의 봉급을 올려주길 기대한다. 하지만 깡패같은 고등학교 이사장은 노로에게 야간 고등학교 강의까지 더하라고 강권한다. 천성이 유약한 노로는 '아니오'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다.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 노로. 그는 자신의 제자가 권유한 반정부 시위에 나가보기로 한다. 시위대는 경찰의 강경대응으로 무참히 진압되었다. 노로는 경찰서에 끌려갔다가 겨우 풀려난다. 하지만 이 일을 빌미로 이사장은 노로를 해고한다. 전후의 어려운 시절, 노로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이치카와 곤(市川崑, Kon Ichikawa) 감독의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는 고등학교 선생 노로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후 일본 사회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원작이 되는 만화가 있다. 만화가 요코야마 타이조(横山泰三)는 1950년부터 1953년  마이니치 신문(毎日新聞)에 4컷 만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를 연재했다. 4컷 만화에 담긴 날카로운 사회비판적 메시지 때문에 만화는 연재 중단의 압력을 받았다. 이치카와 곤은 그 만화에서 영화의 주요한 소재를 차용했다.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는 명확한 서사 대신에 다양한 등장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영화의 그러한 구성은 전후 일본 사회의 여러 면면들을 부각시킨다.    노로는 다친 손의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간다. 그런데 의사는 노로의 몸을 진찰하더니 '영양실조'라면서 잘 먹어야 한다고 처방을 내린다. 젊은 의사는 환자들 대부분이 제대로 먹지 못해 건강이 좋지 않다고 말한다. 노로가 의사에게 손을 치료받고 싶다고 하자, 의사는 병원의 X-ray 기계가 고장나서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장면은 전후

Shirley Clarke의 실패한 타자성 탐구, Portrait of Jason(1967)

  1. 이상한 나라의 Jason Holliday   한 남자가 자신을 소개한다. 자신의 이름이 Jason Holliday라고 말한 그는 본명이 Aaron Payne이라고 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 유명한 재즈 연주자)와도 안다고 말하는 그는 자신이 가진 직업을 줄줄이 늘어놓는다. 그가 말한 직업들 중에는 남창(whore)도 있다. 손에 술잔을 든 그는 심부름꾼(houseboy)으로 시작한 자신의 인생 역정을 늘어놓는다. 미국의 독립 영화 제작자 Shirley Clarke는 1966년 12월 3일, 자신이 머물던 첼시 호텔(Hotel Chelsea) 펜트 하우스에서 제이슨 할러데이의 인생 이야기를 주제로 다큐를 찍었다. 저녁 9시에 시작된 촬영은 12시간 동안 이어졌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Portrait of Jason(1967)'이다.   제이슨은 술에 취해 기분이 아주 좋아보인다. 화면 밖에서 목소리로만 들리는 셜리 클라크는 제이슨에게 질문을 던지며 그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도록 유도한다. 마치 인형극의 조종하는 사람(puppeteer)처럼 클라크는 제이슨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려는 것 같다. 흑인이며 동성애자이기도 한 제이슨에게 미리 준비해놓은 소품으로 작은 공연을 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소품 가방에서 꺼낸 모피 목도리를 두르고는 제이슨은 여성스럽고도 우스꽝스러운 제스처를 취하며 킬킬거린다. 제이슨이 원하는대로 술과 담배가 계속해서 제공된다. 시간이 갈수록 술에 취한 제이슨의 말소리는 알아듣기 어렵게 뭉그러진다.   러닝 타임 1시간 45분의 이 다큐 'Portrait of Jason(1967)'은 보면 볼수록 기이하다. 관객은 'Jason Holliday'라는 인물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도록 초대받지만, 다큐가 끝나고 나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가장 큰 이유는 제이슨이 가진 뛰어난 공연자(performer)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