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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날 위의 삶, 지방 극단 배우(Aktorzy prowincjonalni, Provincial Actors, 1979)

 

  남자는 잠을 자다 말고 옷을 입고 나갈 채비를 한다. 새벽 2시에 어딜 나가냐고 물으니, 공원에 간다고 말한다. 그는 달밤에 체조하러 가는 대신, 연기 연습을 하러 나간다. 서른 한 살의 지방 극단 배우 크지슈토프는 새로 시작하는 연극 '해방(Liberation)'의 주인공을 맡았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주인공 콘라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다. 지역 연극제 출품작으로 공연될 이 작품을 위해 바르샤바의 유명 연출가가 내려왔다. 중앙 부처와 언론을 비롯해 다른 극단 관계자들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다. 크지슈토프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가진 재능을 보여줘서 이 시시하고 지겨운 지방 극단 배우에서 벗어나고 싶다. 이 남자, 제대로 콘라트 역을 해내어서 지방 탈출에 성공할 수 있을까?

  아그니에슈카 홀란드(Agnieszka Holland)의 장편 영화 데뷔작 '지방 극단 배우(Provincial Actors, 1979)'는 예술적 이상을 가진 연극 배우의 현실적 고민과 좌절을 그린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범상치 않다. 주인공 크지슈토프는 사냥용 장총을 벽에다 걸어놓고 천으로 덮는다. 언젠가 사용될 것 같은 총이 주는 불안한 느낌은 영화 내내 흐른다. 이 영화에 사용되는 음악도 무슨 공포영화에 나올 법한 것으로 시종일관 음울하고 으스스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지방 극단의 그리 크지 않은 무대와 낡은 내부 시설, 크지슈토프와 아내 안카가 사는 비좁은 아파트, 그렇게 대부분 협소한 공간에서 촬영된 영화는 숨막힐 것 같은 답답함을 뿜어낸다. 영화 속 인물들이 보여주는 내적인 우울과 불안, 강박적 공포는 그 모든 것과 절묘하게 감응한다.

  크지슈토프가 연극에 집중하고 매달릴수록, 아내 안카와의 사이는 점점 더 멀어진다. 연기를 공부한 안카는 인형극단 단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자신이 가진 재능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불만족스러운 현실과 이상에 대한 괴리는 안카를 정서불안과 우울에 시달리게 만든다. 남편은 안카가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다. 키우던 고양이가 죽어서 너무나도 마음이 아픈데, 남편이란 작자가 하는 소리가 다른 고양이를 키우자고 한다. 급기야 각방살이를 시작하지만, 방 하나 뿐인 궁색하고 좁은 아파트에서 안카는 부엌에 간이침대를 놓을 수 밖에 없다. 남편은 이 연극 한 편만 잘 되면 이 촌구석을 뜰 것으로 생각하지만, 안카가 보기에는 헛된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지방 극단 배우면 예술과 연기에 대한 열정도 '지방급'인가? 저 인간들은 예술을 모독하고 있다, 고 크지슈토프를 생각한다. 위대한 폴란드의 작가 스타니스와프 비스피안스키(Stanisław Wyspiański)의 걸작 희곡을 제멋대로 잘라먹는 천박한 연출가는 연극을 망치고 있다. 동료들은 배우가 아닌, 월급쟁이 단원으로 잡담과 무성의로 일관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내는 뭐가 그리 힘든지 바가지만 긁는다. 자신은 새벽에 공원에 나가 연기 연습을 할 정도로 최선을 다하는데, 도대체 주변 사람들은 그런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이는 이미 삼십 줄에 접어들었고, 이제 좋은 기회 잡기도 힘들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고민이 심해질수록 연기에 대한 압박도 커진다. 크지슈토프는 어렵사리 초연을 끝마치지만, 정신적으로는 무너질 위기에 처한다.

  면도날 위의 삶. 아그니에슈카 홀란드가 그려내는 예술가의 삶이란 그런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예술적 이상은 저 멀리 도달하기 어려운 곳에 있고, 현실은 비루하기 짝이 없다. 그 둘 사이의 괴리가 가져오는 고통은 언제든 총으로 삶을 끝내버릴 것 같은 불안과 맞닿아 있다. 그런 면에서 주인공 크지슈토프가 연기하는 연극 '해방'의 주인공 콘라트는 다층적인 의미를 갖는다. 연극 속 콘라트는 폴란드를 억압하는 모든 사상과 체제에 맞서 싸우는 고독한 투사로 폴란드의 해방을 가져오기 위해 애를 쓰는 인물이다. 그것을 연기하는 크지슈토프는 예술을 저속하게 만드는 연출가를 비롯해 동료 배우들과 투쟁하고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지방 극단 배우의 삶에서 벗어나 큰 도시로 진출하려고 몸부림친다. 그러나 크지슈토프에게 그 모든 것에서의 진정한 '해방'은 그저 멀게만 느껴진다.

  "결국은 그 모든 것이 시시하고 우스워질 뿐이야."

  연기에 충실하려는 남편에게 냉소적인 아내는 그렇게 말한다. 연극 무대 뒤의 삶 또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중앙 부처에서 내려온 관료와 비평가의 유세, 어느 여배우가 극단 관계자와 잤는지 너절한 소문이나 들먹이는 동료 배우들, 하급 실무 직원들을 멸시하고 하대하는 관행, 그것이 지방 극단 배우 크지슈토프를 둘러싼 현실이다. 아그니에슈카 홀란드는 이 영화에서 인간 운명과 그것에 얽힌 곤경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Kultura, 1979). 예술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지방 극단 배우의 진지한 시도와 연기에의 열정은 무시되고 좌절된다. 그는 배우를 그만 두고 큰 도시로 떠나 살자고 아내에게 말하지만, 정말로 그가 그렇게 살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 말을 듣는 안카의 무심한 표정은 그들 부부의 미래에 대한 기대가 회의적임을 드러낸다.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운명에서 진정으로 벗어날 수 있는가? 영화는 그 모든 것에서의 '해방'이란 실로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여정임을 지방 극단 배우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 


*사진 출처: kino-teatr.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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