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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위기를 견디는 여자, 다가오는 것들(L'Avenir, Things to Come, 2016)

 

  "그 여자한테 정원이나 잘 가꾸라고 해. 이렇게 아름다운 정원을 내버려두는 건 죄악이니까."

  남편은 여자가 생겼다고 고백한다. 이 부부는 결별을 앞두고 있다. 나탈리는 해마다 여름이면 남편의 별장이 있는 해안가 마을을 찾았다. 별장의 정원은 나탈리의 애정과 노력이 깃든 곳이다. 이제 나탈리가 그곳을 찾아갈 일은 없을 것이다. 별장에서의 마지막 휴가, 그렇게 25년의 결혼 생활은 끝을 향해 간다. 미아 한센-뢰베(Mia Hansen-Løve)의 영화 '다가오는 것들(Things to Come, 2016)'은 중년의 위기를 마주한 철학 교사 나탈리의 힘겨운 여정을 담는다.

  적어도 남편의 그 말을 듣기 전까지 나탈리의 삶은 괜찮았다. 물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엄마는 나탈리에게 가장 큰 근심거리이다. 이제 생의 마지막에 접어든 나탈리의 모친은 수시로 전화를 걸어 병고와 외로움을 호소한다. 한밤중에, 학교에서 수업을 하다가, 나탈리는 엄마의 호출을 받는다. 몸이 아파서 죽을 것 같다고 구급대를 부르는 것은 일상이다. 구급대원은 나탈리에게 모친을 챙기라며 한소리를 한다. 그 누구보다 딸의 관심과 애정을 원하는 늙은 엄마. 나탈리는 엄마를 돌보는 일에 점점 지쳐간다.

  그런 나탈리에게 남편은 만나는 여자가 있으며, 자신은 곧 집을 나갈 생각이라고 알려준다. 남편은 나탈리와 같은 철학 교사로서 두 사람은 삶과 지성의 공동체를 나름대로 잘 꾸려왔다. 그런데 이제 그것이 무너져 내릴 기세이다. 엄마와 남편, 의지하고 믿었던 가족은 인정사정없이 나탈리를 마구 흔든다. 거기에다 평생을 두고 해온 일도 난관에 부딪혔다. 나탈리의 철학책을 펴낸 출판사에서는 젊은 세대의 가벼운 취향에 맞추라며 은연중에 압박을 가한다. 철학을 진지하고 엄격하게 받아들이는 나탈리는 그런 출판사의 요구가 못마땅하다. 학교에서는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한창이다. 시위 학생들은 나탈리를 꼰대 기성 세대로 치부한다. 일과 가정, 이 중년의 여자는 위기에 처해있다.

  영화에서 나탈리 역을 연기한 배우는 이자벨 위페르(Isabelle Huppert). 이 영화를 찍을 당시 위페르는 65살이었다. 이 뛰어난 배우는 갑작스럽게 다가온 인생의 위기에 불안하게 흔들리는 중년의 나탈리, 그 인물 자체가 된다. 철학을 전공한 젊은 제자 파비안과의 미묘한 관계, 신뢰를 배반한 남편에게 냉담함과 분노를 동시에 표출하는 모습, 끊임없이 자신의 애정을 갈구하는 엄마에 대한 애증의 감정... 위페르는 그 모든 것을 실제 자신의 모습처럼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관객을 나탈리의 삶 속으로 순식간에 들어가게 만드는 놀라운 흡인력은 이 배우의 저력을 가늠하게 만든다. 감독 미아 한센-뢰브의 차분하고 치밀한 연출은 그런 위페르의 연기와 깊이 공명한다.

  자신만을 영원히 사랑할 것 같았던 남편은 다른 여자에게 떠났고, 버겁다고 생각했던 모친도 갑작스럽게 세상을 뜬다. 나탈리는 철학교사로서 학생들의 지적인 성장을 돕는 삶을 살아온 것에서 의미를 찾는다. 나탈리에게 철학은 단지 생계의 수단이 아니라 삶의 중요한 준칙이다. 학생들에게 시민의 자유와 정치 체제에 대해 생각하도록 할 때는 루소(Jean-Jacques Rousseau)를, 어머니의 장례식에서는 인생의 고통을 돌아보며 파스칼(Blaise Pascal)을 이야기한다. 물론 철학적 가르침과 삶을 조화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나탈리는 엄마를 그리워하며 버스 속에서 눈물을 쏟는다. 그러다 우연히 버스 창밖으로 남편과 새 연인을 목격한다. 울음은 허탈한 웃음으로 바뀐다. 아끼는 제자 파비안은 나탈리에게 실천이 결여된 부르주아의 삶을 살고 있다고 비난한다. 나탈리는 인간 관계의 허망함과 삶의 불확실성을 마주한다. 그런 힘든 시기에 나탈리가 의지하는 대상은 철학이 아니라, 엄마가 남긴 뚱뚱한 고양이 '판도라(Pandora)'이다. 그리스 신화의 판도라는 신이 봉인한 온갖 고통과 슬픔의 상자를 여는 여인이다. 그 판도라처럼 나탈리도 뜻하지 않은 중년의 문제 상자를 열어 보게 된다.  

  고양이털 알레르기가 있는 나탈리가 판도라를 부둥켜 안으며 울 때, 관객은 이 냉철한 중년 여성이 삶의 고비를 힘겹게 통과하고 있음을 본다. 다가오는 것들(Things to come). 영화 속 나탈리가 겪는 상실감과 고통은 우리 모두가 지금 마주하는, 또는 먼 미래에 그렇게 될 인생의 보편적 단면들이다. 영화의 마지막, 나탈리는 성탄 저녁에 어린 손주를 어르며 평화로운 미소를 짓는다. 아내, 엄마, 딸로 그렇게 오랫동안 살아온 한 여자. 관객은 이제 나탈리가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한 인간으로 평화를 누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 미아 한센-뢰브는 그렇게 '중년'의 관문을 지나는 여자의 내적 분투와 그 궤적을 담담히 따라간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홍콩의 여성 감독 허안화(Ann Hui)의 '여인 사십(女人 四十, Summer Snow, 1995) 리뷰. 이 영화도 중년 여성의 삶의 위기를 다룬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7/summer-snow-1995.html

 

***이자벨 위페르 주연의 영화 'Home(2008)'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1/ursula-meier-home2008-sister2012-1.html


A Woman Enduring Midlife Crisis,  L'Avenir(Things to Come, 2016)


July 11, 2022

 


  "Tell her to take care of the garden. It's a sin to leave a beautiful garden like this."


  Her husband confessed that he met a woman. The couple was about to break up. Each summer Natalie visited the seaside village where her husband's villa was located. The villa's garden is Natalie's favorite place. Now Natalie won't have to go there. 25 years of marriage are coming to an end. Mia Hansen-Løve 's film 'Things to Come (2016)' tells the difficult journey of Natalie, a philosophy teacher facing a midlife crisis.


  At least until she heard her husband confess, Natalie's life was fine. She had problems, of course. Her mother was the biggest concern for Natalie. Now that she is nearing the end of her life, Natalie's mother calls from time to time to complain about her illness and loneliness. In the middle of the night, while taking classes at her school, Natalie gets a call from her mom. It is common to call paramedics. A paramedic complained to Natalie to take care of her mother. The old mother wanted her daughter's attention and affection more than anyone else. Natalie is tired of taking care of her mom.


  At that time, her husband said that he was dating a woman and he would leave the house soon. Her husband is a philosophy teacher like Natalie, and the two have built a community of life and intelligence in their own way. But now it is on the verge of collapsing. In addition, she ran into difficulties with her work. The publishing company wants Natalie's philosophy book to reform to the taste of the younger generation. Natalie, who takes philosophy seriously and strictly, is not happy with the publisher's demands. Student protests against government policies are in full swing at the school. Protest students dismiss Natalie as an older generation. At work and at home, this middle-aged woman is in crisis.


  The actress who played Natalie in the movie is Isabelle Huppert . Huppert was 65 when she filmed this film. This outstanding actress becomes a middle-aged Natalie who is shaken anxiously by the sudden crisis of her life. Her nuanced relationship with her young disciple, her expression of coldness and anger at her husband. Her feelings of love and hatred for her longing mother... Huppert shows them all naturally as if they were real. She takes her audiences into Natalie's life in an instant and makes it possible to gauge this actress's potential. Director 's calm and meticulous direction resonates deeply with Huppert's acting.


  Her husband left for another woman, and her mother passed away suddenly. As a philosophy teacher, Natalie finds meaning in her life helping students grow intellectually. For Natalie, philosophy is not just a means of livelihood, but an important maxim of life. When she asked her students to think about civil liberties and the political system, she talked about Jean-Jacques Rousseau. At her mother's funeral, she talked about Blaise Pascal looking back at life's pain . Of course, reconciling philosophical teaching and life is not an easy task.


  Natalie misses her mother and weeps in the bus. Then she happens to see her husband and his new lover through the bus window. Crying turns into laughter. Her beloved disciple Fabian accuses Natalie's life of a bourgeois life lacking in practice. Natalie faces the futility of human relationships and the uncertainty of life. In such a difficult time, Natalie relies on not philosophy, but the fat cat 'Pandora' left by her mother. In Greek mythology, Pandora is a woman who opens the box of pain and sorrow sealed by the gods. Like Pandora, Natalie opens an unexpected middle-aged problem box.  


  As Natalie, who is allergic to cat hair, hugs Pandora and cries. The audience sees this rational middle-aged woman struggling through life's hardship. Things to come. The loss and pain that Natalie experiences in the film are universal aspects of life that we all face now or will be in the distant future. At the end of the film, Natalie smiles peacefully as she sees her young grandchildren on Christmas eve. She is a woman who has lived so long as a wife, mother and daughter. The audience now sees Natalie is free from all the burden. And she feels peace as a human being. Mia Hansen-Løve calmly follows the inner struggle and trajectory of a woman who passes through the 'midlife crisis'.  



*Photo source: themoviedb.org


**Review of 'Summer Snow(1995)' by Hong Kong female director Ann Hui. The film also deals with the crisis in the life of a middle-aged woman.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7/summer-snow-1995.html


***Review of 'Home (2008)' starring Isabelle Huppert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1/ursula-meier-home2008-sister2012-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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