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정의 시작
여학생은 유명한 감독의 다큐멘터리 제작 워크숍에 참여했다. 그는 자국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명성이 높은 사람이었다. 감독은
하나의 주제를 제시했다. 타인의 귀중품을 습득한 후에 댓가없이 돌려준 선행자에 대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감독이 제시한
뉴스 매체 기사를 보고 그것을 참조했다. 하지만 여학생은 자신의 고향에 내려가서 직접 그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친구가 그 지역에서 화제가 된 어떤 죄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Shokri라는 이름의 죄수가 휴가를
나왔다가 돈가방을 발견해서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고 했다. 여학생은 그 이야기를 다큐로 만들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렵게 교도소에서 촬영 허가를 받고, 미담의 주인공 Shokri를 인터뷰했다.
어렵사리 완성된 44분짜리
다큐멘터리를 나중에 수업시간에 제출했다. 2년 뒤에 여학생은 감독이 제작하고 있다는 영화에 대한 소식을 듣는다. 놀랍게도 자신의
다큐멘터리에서 나온 이야기에 살이 붙여진 극영화였다. 감독이 만든 그 영화는 2021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다.
여학생은 감독을 상대로 표절 소송을 냈다. 감독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여학생을 명예 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테헤란 법원에
접수된 이 재판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일단 하급심은 감독이 제기한 명예훼손 소송을 기각했다(기사 출처:
hollywoodreporter.com).
여학생의 이름은 Azadeh Masihzadeh, 그의 다큐는 'All Winners, All Losers(2018)'이다. 이란 감독 아쉬가르 파르하디(Asghar Farhadi)는 자신의 영화 'A Hero(2021)'에서
표절작의 오명을 떨쳐내기 위해 분투중이다. 파르하디는 이미 세상에 보도된 기사에서 아이디어를 취했을 뿐이라며, 표절 혐의를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다(기사 출처: deadline.com). 과연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일까? 표절 여부를 판단하려면 마시자데의
다큐와 파르하디의 영화를 감상하는 일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다행히 마시자데는 자신의 다큐를 유튜브에 직접 올려놓았다(영어 자막이
제공된다). 그렇게 해서 나는 두 개의 작품을 보게 되었다.
2. 다큐와 영화, 같은 점과 다른 점
다큐 'All Winners, All Losers'를 이해하려면 이란의 독특한 혼인 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바로 'Mehrieh'라는
관습이다. 우리말로 '애정'으로 번역되는 이 단어는 일종의 혼인 지참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란에서 신랑이 될 사람은 신부에게
일정한 금액에 해당하는 금화를 약속한다. 그것은 원래 이슬람 율법의 관습에 따라 신부에게 혼수를 사도록 주는 돈이었다. 그러던
것이 나중에는 이혼할 때를 대비해서 아내가 받게될 일종의 위자료 성격을 띄게 되었다.
'Mehrieh'는
결혼전에 신부에게 실제로 건네지는 것이 아니라서 대부분 상징적으로 높은 액수가 매겨진다. 때론 이란의 일반 노동자가 평생을 일해도
갚지 못할 금액이 되기도 한다. 그것이 신부에 대한 신랑의 애정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혼할 때 발생한다. 남자가
혼인식때 약속한 그 금액을 여자에게 지불하지 못하면 그는 범법자가 된다. 말 그대로 감옥에서 '썩어야만 한다'. 2017년에
그렇게 이란의 감옥에 수감된 남자 죄수들은 무려 2200명이 넘는다(기사 출처: thehindu.com).
다큐에서 미담의 주인공 Shokri는 그 mehrieh를 이혼한 아내에게 지불하지 못해서 감옥살이를 하던 중이었다. 그의 원래
직업은 건물의 페인트칠을 담당하는 도장공(塗裝工)이었다. 교도소에서는 솜씨 좋은 그를 여러 공공건물의 도장일에 써먹었다. 이는
영화 'A Hero'의 주인공 솔타니가 죄수이며 도장공이라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솔타니의 죄목은 쇼크리와는
달리 사기죄이다. 솔타니는 처남의 돈을 아주 크게 떼먹었다. 처남은 그 돈을 갚기 위해 딸의 지참금까지 날렸고 그때문에
솔타니에게 이를 갈고 있다. 나는 파르하디가 mehrieh에 대한 언급을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설정을 변경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어떤 면에서 그러한 관습은 이란 사회의 어두운 이면이기 때문이다.
다큐 속 쇼크리가 처한 역경은
관객으로 하여금 이 남자에 대한 동정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그는 휴가를 나왔다가 우연히 돈가방을 발견한다. 그것을 주인에게
돌려주기로 마음먹은 쇼크리는 전단지를 발견 장소 주변에 붙여놓는다. 그리고 근처 은행에 가서도 그 사실을 알렸다. 자신의 연락처는
교도소로 기재해놓았다. 그 부분 또한 영화는 그대로 차용했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영화에서는 죄수의 연인이 돈가방을
발견했다. 현실의 쇼크리가 발견한 돈가방은 곧 주인을 찾았다. 교도소에서는 그 미담을 기사와 방송에 적극적으로 소개했다. 쇼크리는
유명해졌고, 그가 갚지 못한 Mehrieh를 위해 자선단체에서 모금을 하기도 했다. 영화 속 죄수 솔타니도 쇼크리의 여정을 거의
비슷하게 따라간다. 솔타니에게는 더 딱한 사정이 있는데, 이혼남인 그에게는 말을 더듬는 어린 아들이 있다.
그렇게 거액의 돈가방이 주인을 찾아간 미담의 완결본에서 다큐와 영화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향해 달려간다. 쇼크리의 이야기를
취재하던 마시자데는 그 미담의 진실성에 의심을 품었다. 무엇보다 가방 주인에게 돈을 돌려주었다는 과정이 석연치가 않았다. 교도소와
은행 관계자들의 증언이 제각각이었다. 그래서 마시자데는 그 돈가방을 찾아간 여자를 직접 만나보기로 했다. 주어진 정보라고는
진짜인지 알 수 없는 '자라 야쿠비'라는 이름 뿐이었다. 그렇게 자라 야쿠비를 찾는 마시자데의 여정이 다큐의 후반부를 채운다.
영화 'A Hero'에서도 솔타니의 미담은 그 진실성을 의심받는다. 채권자인 처남은 그 모든 것을 솔타니의 자작극이라 여긴다.
형기가 감면된 솔타니는 출옥후에 남은 빚을 갚기 위해 취직을 하려고 한다. 그런데 취업 담당자는 솔타니에게 미담이 진짜라는 명백한
증거를 요구한다. 돈을 받아갔다는 여자는 찾을 길이 없고, 졸지에 미디어에 의해 영웅이 된 솔타니는 거짓말장이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다. 놀라운 이야기꾼인 파르하디 감독은 솔타니의 몰락을 치밀하고도 촘촘히 묘사해 나간다.
파르하디의 전작들 '아름다운 도시(The Beautiful City, 2004)'과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The Separation of Nader from Simin, 2011)'를
보면 이 감독의 관심사를 알 수 있다. 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고통스런 윤리적 딜레마에 직면한다. 'A Hero'의 솔타니는
다시 감옥에 가지 않으려면 말을 더듬는 아들을 내세워 사람들의 동정을 받아야만 한다. 그것만이 그가 처한 곤경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런데 솔타니는 그것을 결국 포기한다. 이 남자의 선의는 곧 매도당하고 잊혀진다.
그렇다면
다큐 속 소크리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마시자데는 돈가방의 주인 자라 야쿠비를 찾아 첩첩산중의 시골 마을까지 찾아간다.
놀랍게도, 자라 야쿠비는 진짜 존재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여성은 너무나도 가난한 양치기 집안의 며느리였다. 자라 야쿠비와 그
가족들은 마시자데에게 돈가방 이야기를 듣고 금시초문이라며 부인한다. 그렇다면 그 모든 이야기는 도대체 누가, 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소크리는 사기꾼인가? 마시자데는 미담으로 풀려났던 그가 다른 돈 문제로 감옥에 갇혀있다는 소식을 전하며 다큐를
끝마친다.
3. 표절인가, 창작인가
영화 'A Hero'가 다큐 'All
Winners, All Losers'의 주요한 부분을 차용했다는 점은 명백하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파르하디가 표절을 했다고
판단을 내리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파르하디는 다큐의 내용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그의 영화는 진실과
거짓의 미묘한 간극, 진실을 호도하는 미디어에 대한 비판을 담는다. 그와는 달리 마시자데의 다큐는 이란 사회의 부조리한 관습과
불투명성을 부각시킨다. 원재료는 거의 비슷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만들어낸 결과물은 다른 셈이다.
그럼에도
파르하디가 권력적 위계를 이용한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그는 마시자데가 자신의 인턴으로 일할 때, 다큐의 아이디어에 대한
양도를 강요했었다(출처: en.wikipedia.org). 일개 인턴 학생과 세계적 명성을 지닌 감독, 그 두 사람의 사회적
위치는 결코 동등하지 않다. 나는 이 사태를 야기한 파르하디의 처신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파르하디가 같은 분야의
동료로서 마시자데의 다큐와 그 원저작성을 존중해주었다면 어떠했을까? 창작자의 자존감에 상처를 받은 마시자데는 투지를 불태우며
소송에 임하고 있는듯 하다. 현재 영화 'A Hero'는 여러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표절 의심작이라는
꼬리표도 함께 달려 있다.
결국 표절 여부는 최종적으로 테헤란의 법정에서 판가름나게 될 것이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관계없이, 영화 'A Hero'가 다큐 'All Winners, All Losers'에서 나왔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 두 작품을 둘러싼 배경에는 창작과 표절의 경계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 자리한다. 나에게는 그 작품들이 담고 있는 이야기
못지않게, 현실의 접혀진 부분을 탐색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감상이 되었다.
*사진 출처: hollywoodreporter.com 다큐의 감독 Azadeh Masihzadeh(오른쪽), 미담 기사의 인물 Shokri(왼쪽)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아쉬가르 파르하디의 영화 리뷰
아름다운 도시(Shahr-e Ziba, The Beautiful City, 2004)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shahr-e-ziba-beautiful-city-2004.html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The Separation of Nader from Simin, 2011)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7/separation-of-nader-from-simin-201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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