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기차를 당장 세워라!
(Stop that train!)"
풍채 좋은 중년의 배우는 기차역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외친다. 때는 2차 대전 시기의 영국. 순회 극단의 단장 Sir(Albert Finney 분)는 배우들과 함께 다른 도시로 이동중이다. 그런데 그들은 기차 시간에 늦었고, 기차는 이제 막 출발하려는 참이다. Sir의 말 한마디에 기차가 멈춘다. 의상 담당 노먼(Tom Courtenay 분)이 역장 붙잡고 아무리 애원해도 안되던 것을 배우는 단번에 해낸다.
피터 예이츠(Peter Yates) 감독의 'The Dresser(1983)'는
영국 극작가 Ronald Harwood의 동명 희곡을 원작으로 한다. 한때 작가는 영국 연극계의 전설적 배우였던 Sir
Donald Wolfit의 의상 담당을 했던 적이 있다. 할우드는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The Dresser'를 썼다. 관객은
영화를 통해 대배우와 무대 뒤 사람들의 삶을 엿볼 기회를 얻는다.
영화가 시작되면 연극 오셀로의 막이 내리고
배우들은 커튼콜을 하고 있다. 그 커튼 뒤, Sir는 배우들을 향해 불호령을 쏟아낸다. 그는 자신이 연기할 때 방해되는 모든
요소들을 지적하면서, 배우들에게 인격적인 모욕을 주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경'으로 불리는 이 남자의 오만불손함과 자기
중심주의는 하늘을 찌른다. 극단의 재능있는 중견 배우 옥센비는 그를 '폭군'으로 부르기까지 한다. 노먼은 그 폭군 Sir의 충실한
의상담당이다. 말이 의상담당이지, 실제로 그는 Sir의 온갖 뒤치다꺼리를 하는 하인이나 다름없다. 그의 주인은 주체하기 힘든
변덕에다 폭언과 모욕 또한 일상적이다. 그런데도 노먼은 그 모든 것을 감내한다. 그것도 진심으로, 애정을 가지고 마치 어린 아이를
보살피듯 한다.
노먼이 매혹된 것이 Sir이라는 인물과 그 재능인지, 아니면 연극이라는 예술 세계에 대한
동경인지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다. 어쩌면 둘 다 일 수도 있다. 분장에 필요한 밀가루를 구하기 위해 시장을 찾은 그는 가게
주인으로부터 '아가씨'라는 소리를 듣는다. 노먼의 말투와 행동은 매우 여성스럽고 다정다감하다. '동성애자'라는 그의 성 정체성에
대한 암시는 노먼과 Sir의 관계를 더욱 복합적으로 만든다. 노먼이 Sir에게 보여주는 모든 것들은 표면적으로는 '연극 예술'에
대한 헌신처럼 보인다. 노먼의 목표는 Sir의 불안과 고통을 달래어 어떻게든 무대에 오르도록 만드는 일이다. 무대 위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위대해 보이는 대배우는 시시때때로 광기에 사로잡힌다. 그가 도심 한복판에서 괴성을 지르며 난동을 부릴 때, 이 광인
배우를 달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노먼이다.
관객들은 무대 위 Sir의 리어왕 연기에 찬사를 보내며 감탄한다.
하지만 그 무대 뒷편에서 Sir가 보여주는 행태는 오만과 독선으로 가득 차 있다. Sir는 극단을 이끄는 권력자로서 배우들 위에
군림한다. 이 지독한 이기주의자인 대배우는 주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입힌다. 그는 또한 단원들의 예술에 대한 열망을 자신에
대한 절대적 복종으로 교묘하게 이용할 줄도 안다. 그에게 하인처럼 매여 있는 노먼, 오랫동안 Sir를 흠모하며 노처녀로 늙어버린
무대 감독 매지, 배역을 얻기 위해 Sir에게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지는 신인 여배우, Sir의 한마디 칭찬에 기뻐하는 나이든
조역 배우... Sir가 지배하는 무대 뒤의 세계는 서글픔과 함께 추악함이 존재한다.
노먼은 늘 바지 뒷주머니에
브랜디 병을 넣어두고 수시로 홀짝거린다. Dresser의 대배우에 대한 헌신은 절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만은 아니다. Sir와
함께 하면서 느끼는 모멸감과 자괴감을 견디기 위해 노먼은 알콜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 점은 노먼과 Sir의 관계에 내재된
착취적이고 병적인 일면을 드러낸다. 노먼은 Sir이 쓴 자서전의 감사 서문에 자신에 대한 언급이 빠져있음을 알고 분노한다.
Sir에게 노먼은 Dresser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자신을 Sir의 예술적 동반자로 믿고 싶었던 노먼의 바람은 그렇게
산산조각난다. 영화 'The Dresser'는 무대 뒤의 숨겨진 삶을 찬찬히 펼쳐서 보여준다. 예술이 아름답고 위대하게 빛나기
위해, 때로 거기에 몸담은 이들의 삶은 파괴적으로 소모된다. 그것은 노먼 뿐만 아니라, 그가 Dresser로 헌신한 대배우에게도
적용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Peter Bogdanovich 'Noises Off(1992)' 리뷰
영화
'Noises Off(1992)'도 무대 뒤의 만화경 같은 인생을 그린다. 이 영화의 원작을 쓴 이는 영국의 극작가
Michael Frayn. 감독 Peter Bogdanovich는 이 영화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다. 하지만 영화의 흥행은
처참히 실패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예술과 삶의 경계에 대한 흥미로운 탐구가 들어있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noises-off-1992.html
***앨버트 피니 주연 'Saturday Night and Sunday Morning(1960)'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6/saturday-night-and-sunday-morning-1960.html
****피터 예이츠 감독의 'The Friends of Eddie Coyle(1973)'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friends-of-eddie-coyl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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