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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집착과 상실, The Lost Moment(1947)

 

헨리 제임스(Henry James)문학의 영화적 변용 2부

 
The Lost Moment(1947), Martin Gabel 감독



*이 글에는 영화 'The Lost Moment(1947)'의 결말이 들어있습니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레베카(Rebecca, 1940)'. 가난하고 별 볼 일 없었던 젊은 아가씨는 부자와 결혼하는 행운을 잡는다. 그리고 남편의 대저택에 입성하는데, 그곳에서 위압적인 여집사 댄버스 부인과 마주한다. 영화 'The Lost Moment(1947)'의 주인공 출판업자 루이스 베너블은 줄리아나 보데로의 집에서 줄리아나의 조카 티나와 마주한다. 수잔 헤이워드가 연기한 티나는 마치 그 댄버스 부인을 연상케 한다. 뻣뻣하고 오만한 태도로 티나가 요구하는 저택의 하숙비는 터무니없이 높지만, 루이스는 기꺼이 지불하기로 한다. 물론 그에게는 나름의 속셈이 있다. 그곳에서 루이스는 유명 작가 제프리 애스펀의 숨겨진 연애 편지를 찾으려 한다. 애스펀의 편지를 받았던 주인공 줄리아나는 이제 백발의 노파가 되어 있다.

  영화 'The Lost Moment'는 헨리 제임스의 '애스펀의 러브레터(The Aspern Papers, 1888)'를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Leonardo Bercovici가 맡은 각색은 제임스 소설의 기이한 변용을 보여준다. 백발의 노파 줄리아나 역을 맡은 아그네스 무어헤드(Agnes Moorehead)는 5시간이 넘는 특수분장을 한 후에 연기를 했다. 거의 살아있는 해골에 가깝게 늙어버린 줄리아나는 마치 사악한 마귀 할멈처럼 비춰진다. 줄리아나의 대저택은 고딕 소설의 음산한 건축물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곳에 편지를 찾기 위해 잠입한 용사 루이스는 곧 자신이 구해야할 대상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어느 날 밤, 루이스는 저택의 버려진 방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티나를 발견한다. 루이스를 반갑게 맞이하는 티나는 스스로를 젊은 날의 이모 줄리아나로 여긴다.

  '애스펀의 러브레터'는 헨리 제임스가 아끼는 작품이었다. 잊혀진 러브레터에 대한 집념으로 출판업자(소설 속에서는 이름이 없다)는 미국에서 베니스까지 여행을 한다. 편지를 꼭꼭 숨기고 내놓지 않는 줄리아나 대신 그는 조카 티타(영화 속 이름 티나)에게 접근하기로 마음먹는다.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영화 속 티나와는 달리 소설의 티타는 아무 매력도 없는 노처녀이다. 곧 티타는 그의 친절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만, 이모의 뜻을 존중한다며 편지를 찾는 일에는 나서고 싶어하지 않는다.

  영화는 애스펀의 편지를 찾고자 하는 출판업자의 집착과 열망을 로맨스와 스릴러 장르에 이식시킨다. 루이스는 티나와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은 모두 줄리아나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 있다. 조카 티나는 젊은 날의 줄리아나에 빙의되어 있으며, 루이스는 줄리아나가 갖고 있는 애스펀의 편지에 매혹되어 있다. 사악한 마녀로 여겨지는 줄리아나로부터 어떻게 달아날 것인가? 놀랍게도 영화 속에서 그 해법은 '화재'이다. 마치 마녀가 불에 화형되는 것을 연상케 하는데, 줄리아나의 실화(失火)로 인한 그 화재로 편지는 모두 불에 타 없어진다.

  원작 소설은 값나가는 편지에 대한 어느 출판업자의 욕망과 윤리적 당위성 사이의 고민이 주된 테마를 이룬다. 편지에 눈이 먼 그는 자신의 신분과 의도를 철저히 숨긴다. 티타의 환심을 사서 편지를 찾는 것도 여의칠 않자, 줄리아나의 방에 침입해서 뒤지기까지 한다. 티타는 그런 그의 기만과 거짓을 드러내며, 편지를 얻고 싶으면 자신의 청혼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줄리아나가 죽은 후 편지는 자신이 물려받았고, 결혼으로 가족이 된다면 편지 또한 그의 것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그 편지들 때문에 못생긴 노처녀와 결혼해서 평생을 살아갈 수는 없다, 고 그는 생각한다.

  내가 당신을 가질 수 없다면, 나도 당신이 원하는 것을 빼앗아 버리겠어. 청혼을 거절당한 티타는 편지들을 모두 불에 태운다. 티타는 자신의 상심을 남자에게 그렇게 되돌려 준다. 헨리 제임스가 그려낸 지독한 욕망과 상실의 변주는 'The Lost Moment'에서는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다. 어떤 면에서 영화는 원작과 전혀 다른 작품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음산한 대저택, 백발의 흉측한 노파, 귀신 들린 미녀, 그 모든 것의 원흉이 되는 노파와 대저택을 불사르는 화재, 그리고 사랑의 완성. 이 기이하기 짝이 없는 고딕 스릴러 로맨스 영화는 당시 흥행에도 실패했고 비평가들에게도 외면받았다.

  과연 이 영화는 버림받아 마땅한 영화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도 원작자 헨리 제임스는 기막힌 각색을 못마땅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설이 그려낸 인간 내면의 어둡고 축축한 욕망을 영화는 다른 장르적 방식으로 비틀어서 보여준다. 영화 속 줄리아나는 애스펀이 떠나갈 것이 두려워 자신이 살해했다고 고백한다. 줄리아나의 고통받는 자아를 대변하는 조카 티나의 정신병적 징후는 줄리아나와 그 젊은 날을 상징하는 편지가 불과 함께 사라짐으로써 치유된다. 이 영화의 감독 Martin Gabel은 오손 웰스와 연극을 함께 했던 동료로 주로 연극 무대에서 활약했다. 그의 유일한 연출작으로 남은 'The Lost Moment'는 헨리 제임스 문학의 기이한 영화적 변용을 보여준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christinawehner.wordpress.com   영화 속 줄리아나로 분장한 Agnes Moorehead가 자신의 사진을 들고 있다.



***영화의 원작 소설 '애스펀의 러브레터(The Aspern Papers)'는 2000년에 번역 출간되었으나 현재는 구할 수 없다. 저작권이 풀린 작품(Public Domain)이므로 영문본은 www.gutenberg.org에서 다운받아서 볼 수 있다.     
 
****헨리 제임스(Henry James)문학의 영화적 변용 1부

The Wings of the Dove(1997)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2/henry-james-1-wings-of-dove-199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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