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서늘한 사랑의 초상, 비둘기의 날개(The Wings of the Dove, 1997)

 

헨리 제임스(Henry James)문학의 영화적 변용 1부:

The Wings of the Dove(1997), Iain Softley 감독
 


  "밀리는 죽어가고 있어. 그리고 당신의 사랑을 간절히 원하지."

  여자는 남자에게 비밀스럽게 속삭인다. 케이트와 머튼은 연인 사이이다. 현실적인 이유로 결혼을 미룬 둘은 비밀리에 약혼을 하고 주변을 속인다(영화에서는 약혼 사실이 나오지 않는다). 모든 것은 돈 때문이다. 가난한 케이트는 부유한 이모 집에서 기거하고 있는데, 이모는 케이트를 부자 귀족과 맺어주려고 한다. 머튼은 가진 것 없는 글쟁이 기자라서 이모 눈에는 들지도 않는다. 그런 케이트 앞에 미국인 상속녀 밀리가 나타난다. 피붙이 하나 없는 밀리는 죽을 병에 걸려 있다. 그런데 밀리는 케이트의 연인 머튼에게 마음을 뺏긴다. 밀리와 친구가 된 케이트는 속내가 복잡해진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밀리와 머튼을 결혼시키고 유산을 받게 하면 어떨까? 그리고 나서 자신이 머튼과 결혼하면 되지 않은가?

  과연 케이트는 악녀인가? 케이트를 사랑하는 머튼은 정직한 인물로 거짓말을 혐오한다. 그런 그에게 연인 케이트는 다른 여자에 대한 '거짓 사랑'을 강요한다. 그것도 죽어가는 여자를 상대로 유산을 얻어내라고 말이다. 밀리가 원하는 사랑을 주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지 않냐고 남자를 구슬린다. 남자는 연인에 대한 집착과 환멸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공모자가 된다.

  헨리 제임스(1843-1916)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작가였다. 미국인으로 태어났으나 유럽을 동경했고, 결국 영국으로 이주해서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살아생전에 소설과 희곡을 비롯해 많은 작품을 남겼으나 동시대에 명성을 얻지는 못했다. 그는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창작 활동을 해나갈 수 있었다. 그의 작품이 재평가되기 시작한 것은 1940년대에 이르러서 였다. 그즈음 미국 출판계에서 선집 형태로 나오기 시작하면서 헨리 제임스는 새롭게 부각되었다. 연극과 영화로도 여러 번 만들어졌다. '비둘기의 날개(The Wings of the Dove, 1902)'는 무려 9번이나 각색되었다. 1997년에 Miramax에서 제작한 이 영화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소설을 영화로 만들 때 거치는 과정은 '압축'과 '생략'이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헨리 제임스의 문체는 부연 설명이 많고 장황한 만연체에 가깝다. 영문본을 읽다 보면 다시 이전의 문장으로 돌아가서 읽게 될 때가 많다. 영화로 만들어진 '비둘기의 날개'에서는 그런 제임스의 흔적을 기술적으로 삭제해 버렸다. 보수적인 빅토리아 시대에서 시간은 1910년으로 건너뛴다.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등장인물들은 내쳐졌으며, 밀리가 미국 특파원으로 온 머튼을 만나서 반했다는 소설 속 설정도 바꾸었다. 영화에서 밀리는 런던에서 처음으로 머튼을 보게 된다. 영화는 무엇보다 케이트와 머튼의 육체적 끌림에 좀 더 비중을 둔다. 점잖은 빅토리아 시대 소설을 읽었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은 영화의 선정성에 꽤나 놀랄 것이다. 헐리우드의 뻔한 장삿속이 불쾌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원작 소설이 지닌 본질을 망가뜨린 것일까?

  러닝타임 1시간 42분이 정말이지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 1910년대를 충실히 재현한 세트와 의상, 베니스에서 찍은 로케이션 장면들은 눈을 뗄 수가 없다. 늘 관광객으로 미어터지는 베니스에서 어떻게 인파를 통제하고 영화를 찍었는지 내내 궁금해질 정도이다. 영화 '비둘기의 날개'는 헨리 제임스의 소설에 생기와 광채를 부여한다. 무엇보다 케이트를 연기한 헬레나 본햄 카터의 연기가 매혹적이다. 소설 속에서 케이트는 지적이고 아름다운 아가씨로 묘사되는데, 카터는 존재 그 자체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부에 대한 거칠고 들끓는 욕망으로 연인 머튼을 자신의 계획에 동조하게 만드는 케이트. 꽤나 주도면밀하고 냉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남자를 다른 여자에게 밀어내는 속내가 편할 리가 없다. 머튼이 진짜 밀리를 사랑할까봐 두려워진 케이트는 흔들린다. 밀리의 재산을 노리고 결혼을 원하는 마크 경을 부추겨 머튼과 자신의 관계를 밀리에게 알리도록 한 것이다. 마침내 진실을 알게 된 밀리. 머튼의 사랑으로 잠시나마 행복을 느꼈던 밀리는 심한 충격을 받는다. 그럼에도 밀리는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재산을 머튼과 케이트에게 남긴다.

  "우린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We shall never be again as we were!)"

  원하는 돈을 얻게 된 케이트는 행복했을까? 소설은 케이트가 머튼을 향해 외치는 그 말과 함께 끝난다. 세상물정 모르는, 그저 순전하게 빛나는 한 마리 비둘기로 묘사되는 밀리는 자신이 남긴 돈이 두 연인에게 결코 축복이 될 수 없음을 간파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밀리는 사랑을, 머튼은 평생 간직할 아픈 추억을, 케이트는 돈을 얻었다. 헨리 제임스가 그려낸 이 서늘한 사랑의 초상에서는 깊은 슬픔이 베어져 나온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헨리 제임스 문학의 영화적 변용 3부

자아의 각성과 성장, The Heiress(1949)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2/heiress1949.html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

황량하고 고독한 결혼의 풍경, 아내(妻, Wife, 1953)

  *이 글에는 '아내(妻, 1953)'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카가와와 미네코는 결혼 10년차 부부다. 영화는 부부 각자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관객은 결혼 10년 동안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서로 푸념하는 부부의 속내를 듣게 된다. 이 부부에게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그들은 별다른 소통도 하지 않고 얼굴을 바라보는 일도 거의 없다. 아내에게 마음이 멀어진 남편은 사무실의 여직원에게 마음이 기운다. 무뚝뚝하며 돈에 집착하는 아내와는 달리, 여직원 사가라는 사근사근하고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성품을 지녔다. 아내가 아닌 새로운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나카가와. 아내는 남편의 변화를 눈치채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해 남편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한다. 과연 이 부부는 같이 살아갈 수 있을까? '아내(Wife, 1953)'는 나루세 미키오의 '방랑기(1962)' 원작자이기도 했던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의 '갈색의 눈동자'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영화는 위기에 처한 부부를 통해 결혼 생활의 황량하고 고독한 풍경을 그려낸다.   나카가와는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사무실에서 점심으로 먹는데, 밥에서 머리카락이 나온다. 미네코는 확실히 살림에는 별 뜻이 없는 듯하다. 그들 부부의 화해를 위해서 미네코의 친구는 장을 봐와서 식사 준비를 하려고 한다. 그런데 친구가 본 미네코의 주방은 제대로 된 칼도 없고, 그나마 그 칼도 무딘 상태다. 친구는 자취생의 주방 같다고 말하고, 나카가와는 아내의 음식은 맛이 없다고 답한다. 이 아내는 그렇다고 남편의 심기를 잘 헤아리는 것도 아니다. 저녁에 책 좀 읽고 자려는 남편 옆에서 과자를 우적우적 소리를 내며 먹는다. 식사하고 나서는 젓가락으로 이를 아무렇지 않게 쑤시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아내에게 나카가와는 마음이 멀어진다. 그렇다면 미네코의 삶의 낙은 뭘까? 교외에 2층 단독 주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세를 놓아 살림에...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의 삶과 작품 세계를 다룬 다큐 세 편

  1. BBC 다큐 'Francis Bacon : A Brush with Violence(1997)', 1시간19분 2. The South Bank Show 제작 'Francis Bacon(1985)', 55분 3. 미국 휴스턴 미술관(The Museum of Fine Arts, Houston) 제작, Francis Bacon: Late paintings(2020), 55분 * 위 세 편의 다큐들은 모두 유튜브에서 검색 가능함.   1945년, 런던의 전시회에 걸린 그의 삼면화(triptych, 세 개가 이어진 그림으로 주로 가톨릭의 제단화에 쓰였음)는 관객들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2차 대전이 막 끝난 직후여서 사람들은 가급적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들을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화가는 기괴하게 변형된 신체와 인물의 이미지들을 자신의 그림 속에 계속해서 변주해 나갔다. 그는 동성애자였으며, 술과 도박에 빠져 지냈고, 그림으로 누릴 수 있는 명예와 부를 생전에 다 누렸다. 죽어서도 그의 그림을 비롯해 쓰레기 같은 잡동사니 소장품이 엄청난 가격에 팔리고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아마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도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를 무시무시한 이미지로 그려낸 초상 연작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1997년에 BBC에서 제작한 다큐는 화가 베이컨의 일대기와 작품, 그의 주변 지인들의 인터뷰를 충실하게 담고 있다. 이 다큐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화가의 작품 세계에 입문하려는 이들에게 아주 좋은 안내자가 되어준다. 거칠고 폭력적인 아버지와의 불화, 베를린과 파리에서 지냈던 20대 초반의 시절,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시작했던 경력의 초창기,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하는 30대, 그리고 그의 동성 연인들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베이컨은 자신의 성적 지향을 드러내는 것에 무척 솔직했다. 동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