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오프닝부터 눈길을 끈다. 히치콕의 '사이코(Psycho, 1960)'를 본 이들이라면 검정 바탕에 기하학적인 도형들이
멋지게 배열되는 오프닝 타이틀을 기억할 것이다. '새장 속의 여인(Lady in a Cage, 1964)'의 오프닝 타이틀도
그에 못지않게 강렬하다. 마치 관객들에게 앞으로 볼 이 영화에 대한 선명한 단서를 제공하는 것 같다. 영화를 본 이들은 이 영화가
보여주는 폭력성과 잔혹성에 놀라게 된다. 1960년대에 이렇게 대담하고 노골적으로 폭력과 광기에 대해 다루었던 영화가 있었던가?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아도 이 영화는 기괴한 불안함과 두려움을 안겨준다.
부유한 힐야드 부인(올리비아 드 하빌랜드 분)은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골절상을 입은 후로 집에서 이동하기 쉽게 엘리베이터를
설치했다. 그런데 아들이 주말 휴가를 떠난 사이, 전기에 문제가 생겨서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던 힐야드는 그대로 갇혀 버린다.
엘리베이터에 있는 비상벨을 누르면 집밖에서 경보음으로 들리게 되어있는데, 독립기념일 행사로 시끄러운 거리에서 그 소리를 듣는 이는
아무도 없다.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노숙자 술꾼 조지는 힐야드의 집을 기웃거리다 침입하게 되고, 힐야드가 갇힌 것을 보고는 크게
도둑질을 할 기회로 여긴다. 조지는 매춘부 세이디를 불러서 같이 집을 털기로 한다. 그런 그들을 불량배 3인방이 몰래 뒤따라
온다. 랜들(제임스 칸 분), 일레인, 에시는 조지와 세이디를 제압하고 힐야드의 집을 난장판으로 만든다. 힐야드는 필사적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빠져나가려고 애를 쓰지만, 공중에 매달린 새장이 되어버린 그곳에서 나갈 방법이 없다. 자신들의 얼굴을 보았다는
이유로 조지와 세이디, 힐야드를 모두 죽이겠다고 선언한 랜들. 과연 힐야드 부인은 이 엄청난 재앙에서 목숨을 건질 수 있을까?
영화 '대부(1972)'에서 콜레오네 가문의 장남 소니로 나왔던 제임스 칸은 이 영화가 실질적인 데뷔작이다. 당시 24살의
제임스 칸은 미친 것 같은 폭력성과 잔혹성을 지닌 인물 랜들을 연기한다. 랜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상스럽기 짝이 없고, 온
집안을 헤집으며 일으키는 난동에서는 살기가 뿜어져 나온다. 힐야드는 그런 랜들을 '짐승'이라고 부른다. 랜들은 힐야드를 마음껏
조롱하고 모욕을 주면서 금새라도 죽여버릴 것처럼 위협한다. 값비싼 장식품과 귀금속에 둘러싸여서 시를 읊고, 화병의 꽃이나 신경쓰며
살아온 힐야드의 일상은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모한다. 휴가를 떠난 아들, 길거리의 행인, 경찰, 그 누구도 힐야드를 도울 수
없다. 게다가 애지중지 아끼던 아들은 엄마의 지나친 애정에 더이상 함께 있을 수 없다며 편지를 써놓고 가버렸다. 랜들이 읽어준
아들의 편지는 힐야드를 극도의 공황 상태로 몰아간다.
'새장 속의 여인'에서 힐야드 부인에게 닥친 재난은 부유한 중산층이 가진 무의식적인 공포를 형상화한다.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안락한 삶이 언제든 원치않는 타자에 의해 위협받고 파괴될 수 있다는 공포. 영화의 도입부에 보이는 이 집안의 화려한 실내 장식들은
침입자들에 의해 무참하게 부서지고 귀중품은 노략질의 대상이 된다. 힐야드가 '짐승'과 '쓰레기'로 부르는 도둑들은 계층적으로는 맨
밑바닥에 있는 이들이다. 술꾼과 매춘부, 불량배, 이들은 모두 힐야드의 안위에는 관심이 없고 크게 한탕해먹을 궁리만 하고 있다.
그 도둑들 사이에서도 위계가 존재한다. 마치 약육강식의 세계처럼 힘없는 술꾼은 곧 죽임을 당한다. 랜들과 일레인, 에시가
저지르는 폭력과 광기의 행동은 시간이 갈수록 도를 더해갈 뿐이다. 이 상황에서 철저하게 무력한 힐야드에게 구조의 손길은 멀기만
하다.
조화롭고 안온하게 보이는 일상의 삶이 언제든 파괴될 수 있다는 공포를 당시의 미국인들은 이미 겪었다.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사태는 미국과 소련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핵전쟁의 위험을 상기시켰다. 그런 정치적 사태에 더해 1964년에 있었던 키티 데이비스
사건은 일상 속에서의 두려움을 극대화시켰다. 새벽에 귀가하던 여성이 주택가에서 칼에 찔려서 죽어가는 데도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다. 35분 동안의 비명과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상당수 불이 켜진 집에서 그 누구 하나 나와보는 사람이 없었다.
낯선 타자에 대한 극단의 공포는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루터 데이비스는 대낮의 고장난 엘리베이터에
갇힌 여성이 당한 범죄 사건에서 설정을 따왔다. 일상은 언제든 범죄와 폭력이 발생할 수 있는 지옥으로 변할 수 있음을 당시의
사람들은 체감했다.
이 영화에는 언제든 폭발할 것 같은 엄청난 폭력성이 시종일관 흘러내린다. 관객들은 엘리베이터 속에 갇혀서 무기력하게 그 폭력과
광기를 목도하는 힐야드 부인이 된다. 1964년에 이 영화가 보여주는 묘사의 수위는 충격적이었고, 그 때문에 '새장 속의 여인'은
결코 호평을 받는 작품은 아니었다. 영국에서는 이 영화를 TV 방영은 물론 극장 개봉도 하지 않았다. 무려 36년 동안 모종의
금지 조치가 이어졌다(indiwire.com 기사 참조). 오늘날의 관객들에게도 이 영화가 보여주는 극대화된 폭력의 정서는 쉽게
익숙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감독 윌터 그라우만은 일상을 틈입하는 범죄가 가져오는 충격과 공포, 두려움을 놀랍도록 생생하게 그려낸다. 그것은 계층적 갈등과 충돌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중산층의 하층 계급에 대한 은밀한 멸시와 두려움은 침입과 상해, 파손과 같은 형태로 구현된다. 마침내 구조된 힐야드 부인의 흐느낌과 절망스런 표정 위로 찍히는 'The End'는 그 악몽과도 같은 일이 언제든 재현될 수 있음에 대한 역설적인 각인처럼 보인다.
*사진 출처: binged.com 힐야드 역의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는 온몸을 내던지는 열연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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