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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금광 도시의 영화적 연대기, Dawson City: Frozen Time(2016)

 

  1978년, 캐나다 유콘에 위치한 소도시 Dawson City에서는 오래된 건물의 해체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랫동안 도시의 체육관으로 쓰였던 건물의 지하 동토층에서는 무더기로 매몰된 필름들이 발견된다. 무려 533개에 달하는 무성 영화 필름 릴들이 물과 시간의 힘을 견뎌내고 세상과 만나는 순간이었다. 도대체 왜 그 필름들은 버려졌을까? 다큐멘터리 제작자 Bill Morrison은 필름이 잠들어 있던 도슨 시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며 그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캘리포니아의 Gold Rush는 1850년대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일어났다 사그라 들었다. 하지만 미국민들의 일확천금에 대한 열망은 결코 잠들지 않았다. 1896년, 알래스카에 걸쳐 있는 유콘 강(Yukon River)에서 또 한 번의 거대한 금 열풍이 불었다. 'Klondike Gold Rush'였다. 미 전역에서 금을 찾아 나선 사람들이 그야말로 물밀듯이 몰려들었다.

  잭 런던 또한 금을 찾아 나선 이들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금을 찾는 행운은 소수의 사람들의 것이었고, 잭 런던은 몸만 상하고 빈손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는 그때의 경험을 소설로 써냈다. '야성의 부름(The Call of the Wild, 1903)', '화이트 팽(White Fang, 1906)'은 그 시절의 산물이었다. 앤소니 만 감독의 1954년작 영화 'The Far Country'도 바로 '클론다이크 골드 러시'를 배경으로 한다. 제임스 스튜어트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확장된 서부의 공간 속에 부패한 사법 권력과 개인의 대결, 공동체적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도슨 시티는 그 열풍의 중심지에 세워진 도시였다. 다큐는 간결한 자막과 공문서, 뉴스 릴, 도슨 시티의 무성 영화들에서 발췌한 장면들로 도시의 연대기를 구성해 나간다. 거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Alex Somers가 담당한 음악, 그리고 사운드 디자인이다. 마치 굽이치는 물결처럼 그 모든 자료들이 역동적인 소리와 함께 엮어져 있다. 가끔 좋은 영화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 보는데,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그것은 좋은 흐름을 가진 영화이다. 그런 면에서 이 다큐는 꽤 괜찮은 리듬감을 갖고 있다. 

  금과 사람들로 흥청거리는 도시에서 도박과 매춘, 여관 사업은 아주 잘 나가는 사업이었다. 트럼프 가문의 거대한 부는 도슨 시티에서 벌인 그 사업에서부터였다. 그러나 금의 소진과 함께 도시는 급격한 쇠퇴기에 접어든다. 1900년대 초, 도슨 시티는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가면서 활기를 잃었다. 그럼에도 록펠러 가문에 의해 대규모의 기계식 채굴 사업이 진행되었고, 도시도 유지될 수 있었다. 체육관을 비롯해 레크리에이션 센터가 들어섰다. 나중에 영화 센터로 변모한 체육관은 그 시기에 무성 영화 제작의 요람이었다. 초창기 무성 영화는 온갖 것들을 다 찍었다. 아이들과 자연, 서커스, 마라톤 대회, 경주, 비행기와 배, 해외의 온갖 인종과 풍물에 관한 것까지. 그 자료들은 '움직이는 사진'인 영화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흥분과 열망을 보여준다. 곧 영화는 '기록'에서 발명된 '이야기'로 나아간다.

  초창기 질산염 필름(nitrate film)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인화로 인한 화재의 위험성이 크다는 데에 있었다. 영화관을 비롯해 필름 보관소의 대규모 화재는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다. 도슨 시티에서도 잦은 화재로 필름이 소실되곤 했다. 그럼에도 이 도시는 일종의 필름 수장고의 역할을 떠맡게 되면서 계속해서 필름들이 쌓여갔다. 개봉 영화가 2년에서 3년을 떠돌다 마지막에 도착하는 곳이 도슨 시티였다. 배급업자들은 영화들의 최종 종착지인 이 외진 북부 도시에서 필름을 찾아가지 않았다. 너무나 많은 필름들이 보관할 곳을 찾지 못해서 버려졌다. 유콘 강에 내던져 지고, 때론 불태워 졌으며, 땅에 파묻혔다.

  필름들이 그렇게 버려지는 장면과 함께 무성 영화 속 장면들이 제시된다. 비탄과 놀라움을 보여주는 여인들의 표정은 다큐를 보는 관객들의 마음과 같다. 체육관의 수영장 바닥을 메꾸는 데에도 필름들이 들어갔다. 다큐는 도시의 역사를 개관하면서 영화사, 미국사의 주요한 사건들을 훑어 나간다. 1914년의 노동자들의 파업과 1차 세계 대전의 시작, 1917년의 흑인들의 차별 반대 시위, 토키(talkie)의 보급과 함께 시작된 유성 영화의 등장, 2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사건들. 그 기간 동안 도슨 시티는 작은 시골 도시로 변모했다. 1950년대에 그곳의 인구는 900명 정도에 불과했다.

  1957년, 칸 영화제에서 상영된 단편 다큐 한 편이 도슨 시티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환기시켰다. Colin Low와 Wolf Koenig가 만든 'City of Gold(1957)'는 초창기 도슨 시티에서 살았던 사진가 Eric A. Hegg의 사진 자료로 도시의 역사를 개관한다. 카메라의 'zooming'과 'panning'을 통해 사진을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만드는 이 다큐의 기법은 훗날 미국 역사 다큐멘터리 제작자가 된 Ken Burns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잊혀진 금광 도시의 진정한 보물은 여전히 땅 밑에 숨겨져 있었다. 1978년, 건물 해체 과정에서 발견된 무성 영화 필름은 복원과 보존 작업을 거쳤다. 무성 영화 시대의 소중한 자료를 품었던 도슨 시티는 다시 한번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빌 모리슨은 '필름'이라는 도구를 통해 금광 도시의 연대기를 독창적으로 직조해 나간다. 금을 향한 사람들의 지독한 열병으로 세워진 도시, 무성 영화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복원과 재생에 이르는 역사적 과정은 사뭇 감동적이다. 결국 이 다큐가 보여주는 것은 시대를 관통하는 '영화'라는 매체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이다. 황금에 대한 선망은 이야기를 영화로 남기려는 예술적 열망과 비슷하다. 그렇게 도슨 시티는 그 열망을 화석처럼 보존한 곳으로 남았다.      

 


*본문에서 언급한 작품들

Jack London의 소설: 야성의 부름(The Call of the Wild, 1903), 화이트 팽(White Fang, 1906)
The Far Country(1954): Anthony Mann 감독 
City of Gold(1957): Colin Low과 Wolf Koenig 제작, 단편 다큐 21분(유튜브에서 볼 수 있음)


**사진 출처: filmlinc.org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금을 찾으러 가는 여정, 1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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