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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와 타자, 낯선 땅의 기억: Memoria(2021)

 

  스코틀랜드인 제시카는 낯선 나라 콜롬비아에 잠시 머물고 있다. 여자의 여동생은 원인 모를 병으로 현지 병원에 입원했다. 여자는 한밤중에 이상한 소리에 깬다. '쿵, 쿵'하며 건물을 뒤흔드는 기분 나쁜 소리. 하지만 여자는 그 소리가 자신에게만 들린다는 것을 알아챈다. 그 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제시카는 사운드 디자이너를 만나본다. 낯선 도시의 일상, 소리의 근원을 찾아나선 제시카의 여정은 어느 산속 시골 마을에 이른다.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주민은 제시카가 들었던 소리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말하는데...

  'Memoria'는 태국 출신의 감독 아피찻퐁 위라세타쿤(Apichatpong Weerasethakul)의 2021년작이다. 그는 이전의 자신의 영화에 대한 태국 정부의 검열에 항의하며 태국에서의 영화 제작을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동성애자인 감독은 영화를 '자식'으로 표현하며, 자신의 아이를 건드리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런 그가 해외에서 만든 첫 영화가 'Memoria'이다. 콜롬비아에서 촬영되었고, 주연은 틸다 스윈튼이 맡았다.

  영화를 보다가 살짝 졸았다. 러닝 타임 136분. 자신을 괴롭히는 소리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한 제시카의 여정은 느리고 명상적이다. 감독은 이 영화를 보다가 관객이 잠드는 건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Memoria'는 관객을 끊임없이 각성시키고 긴장시키는 영화가 아니다. 매우 천천히 흘러가면서 관객을 제시카가 머무는 낯선 나라 콜롬비아의 풍광, 사람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소리'들 한가운데로 이끈다. 제시카를 잠들지 못하게 만든 기괴한 소리부터, 사운드 디자이너가 제시카의 이야기를 듣고 재현해내는 소리, 우연히 만나서 듣게 되는 재즈 연주 악단의 소리, 깊은 삼림의 소리... 이방인으로서 제시카는 소리로 '콜롬비아'라는 낯선 나라의 시간과 공간, 역사의 주변부를 탐색해 나가는 존재이다. 이 영화에서 소리는 중요한 내러티브의 축이다.

  "그건, 당신의 기억들이 아니야(They are not your memories)."

  제시카가 듣고 느끼는 것들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이 남자는 사기꾼도, 주술사도 아니다. 제시카는 그가 자신의 팔에 손을 대었을 때, 끔찍한 비명 소리와 총소리며 참혹한 사건과 관련된 어떤 소리들을 듣는다. 그런데 그것은 전적으로 내면으로 듣는 소리이며, 바깥 풍경은 고요하고 평온하기만 하다. 제시카는 남자가 가진 기억과 소리를 감각적으로 지각한다. 시골 농부 에르난은 'antenna'라는 단어로 제시카에게 일어난 일을 설명한다.

  영화 속에서 제시카가 보게 된 고고학 발굴팀의 원주민 두개골은 주술의식에 의해 살해된 흔적을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낯선 타국 콜롬비아에서 제시카가 느끼는 두려움과 불안은 단지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칼 융(Carl Jung)의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 개념과 맞닿아 있다. 이는 개인의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한 공동체적 신념과 가치체계를 의미한다. 제시카는 그곳 사람들의 집단 무의식에 자신의 정신적 안테나로 '접속'하는 것이며, 에르난과의 만남은 그것을 확인시켜 준다.

  제시카가 에르난을 통해 들었던 소리들은 분명히 콜롬비아의 지난한 내전의 기억과 연결되어 있다. 1964년부터 시작된 콜롬비아 내전은 나라 전체를 피와 살육의 진창으로 만들었다. 2016년, 마침내 내전은 정부군과 FARC(콜롬비아 무장 혁명군)의 휴전으로 끝나는 듯 했다. 그러나 남은 전쟁의 불씨는 다시 불붙고 있다. 복잡하게 분파된 무장 군사 세력들이 토착화 되면서, 폭력과 범죄는 이 나라 사람들의 삶을 끈질기게 옥죄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제시카는 에르난의 집 창문을 통해 거대하고 오래된 숲을 응시한다. 바람 소리와 새 소리, 구름으로 가득찬 회색 하늘, 평온하게 펼쳐진 그 풍경 속에는 피와 살육의 기억이 잠들어 있다. 그렇게 스며든 고통의 역사는 그 땅의 사람들 뿐만 아니라 그저 잠시 머무는 이방인의 내면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영화 'Memoria'는 이제 타국에서,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언어로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감독의 내적 여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미국내 배급을 맡은 배급사 'Neon'은 이 영화를 스트리밍이나 DVD의 형태로 선보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오직 영화관 상영으로만 관객과 만나겠다는 뜻이다. 과감히 수익성을 포기하고 그러한 결정을 내린 배급사의 결단이 놀랍게만 보인다. 확실히,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이 'Memoria'에서 풀어내는 소리와 영상의 깊이를 담아내기에 TV 화면은 적합하지 않다. 잔잔하게 깔리는 불안 속에 기이한 평화로움과 고요함이 공존한다. 영화는 소리의 근원을 찾아가는 이방인의 여정을 통해 낯선 땅의 자연과 역사성에 대한 성찰을 보여준다.



*사진 출처: en.unifranc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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