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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린 영화들 특집: Leave No Trace(2018), Bait(2019), Isabella(2020), The Father(2020), Attica(2021)

말 그대로, 영화를 보고 글을 쓰려다가 쓸 말이 별로 없어서 그냥 버려둔 영화들 특집이다. 


1. Leave No Trace(2018)

  데브라 그래닉(Debra Granik)의 2018년작 영화. 이라크전 참전 군인 윌은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다. 그는 국립 공원 깊은 산속에서 13살 딸과 함께 살아간다. 평화로운 일상의 어느 날, 공원 관계자들은 무단 점거를 이유로 부녀를 내쫓는다. 윌과 톰은 정부 지원으로 주거지를 지원 받아 사회 적응을 시작한다. 마음의 병 때문에 다시 산으로 떠나려는 윌, 그러나 딸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을 택한다.

  "아빠에게 나쁜 것이 나에게도 그런 건 아냐."

  사람들과 사회를 두려워 하는 아빠에게 딸은 그렇게 말한다. 잔잔하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영화. 산으로 올라가는 아버지와 딸이 작별하는 영화의 마지막은 찡하다. 그 장면은 시드니 루멧 감독의 '허공에의 질주(Running On Empty, 1988)' 결말을 떠올리게 하기도. '언젠가 우린 다시 만날 거야', 폭파 수배범인 부모와 피아니스트의 길을 걸으려는 아들은 그렇게 헤어진다. 'Leave No Trace'는 인물의 감정선을 잘 짚어낸 감독의 연출력이 돋보인다. 딸을 연기한 토마신 맥켄지의 연기가 참 좋다.


2. Bait(2019)

  영국 출신의 감독 Mark Jenkin이 구식 필름 카메라 Bolex 16mm로 찍은 1시간 29분의 장편 극영화. 수익성이 악화되고 있는 어촌 마을. 마을은 관광객들과 외지인들에 의해 잠식되어가는 중이다. 영화는 외지인과 내지인의 경제적인 갈등, 정체성의 문제를 다룬다. 마크 젠킨은 이야기 중심의 내러티브가 아닌, 실험적인 방식으로 쇼트들을 분할하고 접합시킨다.

  IMDb에서 이 영화에 대한 리뷰는 우호적인 것과 혹평으로 양분되어 있다. 1970년대 영화과 학생들의 실험 영화를 떠올리게 만든다는 외국 리뷰어의 혹평도 있다. 그걸 읽으면서 그랬다. '이봐, 한국에서는 2000년대 초반까지 그걸로 영화과 학생들이 영화 찍었어', 하고 웃었다. 마크 젠킨은 번거로운 후시 녹음 작업에, 자기 스튜디오에서 직접 현상까지 해가며 열심히 영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의 열의에 비해서 영화는 영 맥아리가 없다. 중요한 것은 필름이냐 디지털이냐가 아니다. 확실히 이제 이런 아날로그 방식의 실험적인 시도는 더이상 의미가 없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3. Isabella(2020)

  아르헨티나 출신의 감독 마티아스 피녜로(Matias Pineiro)의 영화. 친구 사이인 마리엘과 루치아노는 셰익스피어 연극의 오디션을 두고 서로 경쟁하며 때론 협력한다. 영화는 색면 분할 추상화로 유명한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회화적 이미지를 중심으로 내러티브를 구성해 나간다. 비선형적인 시간 구조를 가지고 있는 이 영화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연극과 현실이 뒤엉키는 가운데 두 인물들 사이의 역학 관계도 변해간다. 감독의 전작들과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에 '이사벨라'를 제대로 보려면 전작을 보아야 한다. 알렝 레네, 자끄 리베트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이 영화도 취향에 맞을 것이다. 알랭 레네의 '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1961)'와 '히로시마 내 사랑(1959)'에 넌더리를 내었던 나에게 이 영화는 괴로운 영화 보기였다.


4. The Father(2020)

  플로리안 젤러(Florian Zeller)는 자신이 쓴 희곡을 가지고 이 영화를 찍었다. 치매를 앓고 있는 노인 앤소니(앤소니 홉킨스 분)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노년의 슬픔과 고독에 관한 이야기. 영화는 치매로 손상된 인지능력을 가지게 된 앤소니가 바라보는 현실을 찬찬히 펼쳐서 보여준다. 그가 바라보는 딸과 사위의 얼굴은 수시로 바뀌고, 자신을 비롯해 그가 말하는 가족과 과거에 대한 이야기는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가 없다.

  마침내 요양원에서 간병인의 도움을 받으며 생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앤소니의 모습은 언젠가 우리 모두가 맞이하게 될 미래이기도 하다. 엄마가 보고 싶다며 아이처럼 우는 노인을 보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앤소니 홉킨스는 영화 속 치매 노인 앤소니이면서, 
 모든 것을 이룬 예술인 앤소니 홉킨스 경으로서 유종의 미가 무엇인지 입증한다. 연기의 달인처럼 보이는 그도 못당해낼 배우를 만난 적이 있기는 하다. 역사극 '겨울의 라이온(The Lion in Winter, 1968)'에서 함께 공연한 캐서린 햅번이다. 햅번은 피터 오툴, 티모시 달튼은 물론이고 앤소니 홉킨스의 존재감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그 영화로 캐서린 햅번은 세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5. Attica(2021)

  Traci Curry와 Stanley Nelson이 만든 이 다큐멘터리는 1971년 9월에 있었던 '아티카 감옥 폭동(Attica Prison Rebellion)'을 다룬다. 비인간적이고 열악한 교도소의 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죄수들은 감옥을 점거했다. 주정부는 무장 진압으로 맞섰고 그 과정에서 수감자와 교도관들이 죽어나갔다. 50년이 지난 시점에서 당시 수감자들을 비롯해 교도관의 가족, 법률가, 방송 관계자들이 사건에 대해 증언한다. 이전에도 아티카를 다룬 다큐가 있었지만, 이 다큐는 다양한 관계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수감자들과 교도관의 가족들은 주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했고, 그것은 2000년대 초반에서야 거액의 합의금으로 마무리되었다. 실제 진압 작전에 참여해 살상을 저지른 주정부군을 비롯해 명령을 내린 이들 가운데 처벌을 받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티카 폭동을 계기로 미국 교도소의 여건은 표면적으로는 나아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레이건 정부 시대 들어서 범죄와의 전쟁으로 교도소와 수감자 관리는 더 엄격해졌다. 오늘날 미국은 교도 행정을 적극적으로 민영화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수감자에 대한 노동력 착취와 비인격적인 처우 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폭압적이고 인종차별적인 아티카 진압 유혈극이 일어난지 50년. 이 다큐는 과연 미국이 그 사건에서 무엇을 배우고 얼마나 나아졌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사진 출처: hotcorn.com      Bolex 16mm로 'Bait'를 찍고 있는 감독 Mark Jenkin



**사진 출처: altenateendi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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