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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다 요지(山田洋次, Yamada Yoji) 감독의 영화 속 목소리들(Voices)



고향(同胞, The Village, 1975)
학교(学校, Gakko, 1993)
어머니(母べえ, Kabei: Our Mother, 2008)
작은집(小さいおうち, The Little House, 2014)



1. 1970년대 농촌 청년의 목소리: 고향(同胞, The Village, 1975)
 
  내가 가지고 있는 글쓰기 책에는 소설을 잘 쓰기 위한 여러가지 비법들이 적혀 있다. 그 가운데 한 가지는 누군가에게 들려주 듯이 쓰라는 것도 있다. 사람의 온기를 지닌 목소리. 영화에서는 그것이 작중 화자의 내레이션이 된다. 뛰어난 이야기꾼이며 역사적 통찰력을 가진 일본의 감독 야마다 요지는 그 '목소리'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1975년작 영화 '고향(同胞, The Village)'은 이와테현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영화에서 관객들에게 내레이션을 들려주는 주인공은 마을 청년회 회장 타카시이다. 그는 고단한 농촌의 삶에 지쳐있다. 그런 그에게 도쿄 극단의 히데코가 찾아온다. 히데코는 마을 주민들에게 단합의 기회가 될 거라며 뮤지컬 공연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히데코의 제안은 좋지만, 공연비 65만엔을 티켓 판매로 마련해야 하는 상황은 청년회에 부담으로 다가온다. 과연 이 시골 마을에서 극단의 공연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내성적이고 소심한 타카시는 자신이 사랑하는 아가씨에게 고백도 못하고 있다. 그에게는 부인과 사별한 후 두 딸을 키우는 형과 어머니가 있다. 농사와 목축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농촌의 삶은 버겁고 힘들다. 마을 젊은이들에게 도쿄는 꿈의 도시이다. 농사에 마음에 없는 그에게 형은 닥달을 하고, 좋아하는 여자는 도쿄에서 살겠다며 떠나버린다. 1970년대 일본은 고도 성장으로 이룬 경제적 발전과 함께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비대해진 도시의 기능과 생산 인력의 충원을 담당한 것은 농촌과 도시 근교 지방의 젊은이들이었다. 영화 속 타카시와 마을 청년들은 생계 때문에 몸은 농촌에 매여 있지만, 마음은 도시로 향해 있다. 야마다 요지는 거센 도시화의 물결에 직면한 농촌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농촌 청년 타카시의 목소리를 택한다.

  러닝타임 2시간 7분 동안 전반부에는 공연을 올리는 문제를 두고 토론하는 청년회의 모습, 후반부에는 마을에서 이루어지는 도쿄 극단의 뮤지컬 공연이 펼쳐진다.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적 양식이 혼합된 이 독특한 영화가 강조하는 것은 자연과 함께 하는 농촌의 삶, 그 소박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이다. 노래와 연극, 탭댄스와 춤이 결합한 극단의 뮤지컬 공연의 제목은 '고향(ふるさと)'이다. 농촌이 싫어 떠났던 청년들이 결국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의 극을 보며 주민들은 울고 웃는다. 청년회의 젊은이들은 공연을 올리기까지 자신들이 애썼던 과정을 통해 정체성을 새롭게 하고 삶의 의지를 다진다.
 
  "실패는 두렵지만, 실패하더라도 시도해보는 것이 낫다구."

  영화는 두 개의 삶을 병치시킨다. 도시로 떠나 중국 음식점 직원과 미용사로 살아가는 외롭고 고단한 삶과 아름다운 자연 속에 공동체적 유대를 이루는 고향의 삶. 무엇이 더 낫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다만 야마다 요지는 농촌의 삶이 젊은 세대들에게도 충분히 가치있고 의미있는 것일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그것은 히데코가 이끄는 도시 극단의 예술적 열정에 의해 일깨워진다. 그렇게 영화 속 타카시의 목소리에는 감독 자신이 동시대의 일본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실린다. 야마다 요지의 영화를 통한 이러한 사회적 관심사와 발언은 '학교(学校, Gakko, 1993)'에서도 나타난다.


2. 일본 사회 주변인들의 목소리: 학교(学校, Gakko, 1993)

  야마다 요지 감독을 시리즈의 대가로 알린 영화는 '남자는 괴로워(男はつらいよ, 1969–1995)'연작이었다. 무려 48부작에 이르는 이 영화적 대장정은 방랑 상인 '토라상'의 모험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매 편마다 소박하고 유쾌한 에피소드로 구성된 이 영화가 어떻게 그토록 오랫동안 이어질 수 있었을까? 거기에는 전후 중장년층 관객들의 티켓 파워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즐겁게 변주되는 토라상의 이야기는 과거에 대한 추억과 함께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연작으로 이야기를 구성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이 감독은 1993년에 처음으로 선보인 '학교(学校, Gakko)'를 4편까지 이어간다. 그 시리즈의 첫 번째 영화는 야간 중학교 교사와 그의 제자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문맹인 재일 조선인 김 어머니, 알콜중독자 아버지와 함께 사는 비행 소녀 유키, 건물 청소일로 생계를 잇는 카즈, 학교 가기를 거부하는 여중생 에리코, 중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를 둔 장, 뇌성마비로 의사소통이 불편한 오사무, 막노동을 하며 경마에 빠져 사는 이노상, 그리고 담임 쿠로이 선생. 영화는 그들의 이야기를 차례대로 펼쳐보이며 관객을 낙오자들의 '학교'로 데려간다. 이 영화에는 여러 주인공들이 각자의 내레이션으로 쿠로이 선생과의 만남이 어떻게 그들의 인생을 바꿔놓았는지를 들려준다. 2시간이 넘는 이 영화를 결코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 목소리들이다.

  이 영화의 리얼리티는 야간 중학교 졸업생들의 수기를 엮은 원작에서 나온다. 야마다 요지는 그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일본 사회의 주변부를 조망한다. 쿠로이 선생이 지도하는 학생들은 일본 사회에서 열외적인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보면 보이지 않는 차별과 냉대 속에 놓인 이들, 그런 그들을 돕는 쿠로이상은 따뜻한 마음과 올바른 신념을 가진 교육자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무언가를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존재가 아니다. 스스로 배우고 싶다는 의지를 일깨우는 것,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그의 학생들은 인생을 바꿀 내면의 힘을 얻게 된다.

  과연 배움이 우리 인생을 구원할 수 있는가? 영화는 가난한 하층민 이노상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통해 관객에게 그러한 질문을 던진다. 무더운 여름날, 쿠로이 선생은 이노상의 집을 방문한다. 그런데 찜통같은 이노상의 집 창문은 닫혀있다. 쿠로이 선생이 창문을 열자 지나가는 기차의 굉음이 들린다. 소음 때문에 문도 열지 못하고 사는 이노상의 열악한 주거 환경, 그런 곳에서 막노동으로 살아온 그는 중병에 걸렸음을 알게 된다. 그를 진단한 의사는 이노상의 몸은 '그가 살아온 험한 삶의 흔적'으로 가득하다고 쿠로이상에게 말한다. 그의 부고 소식을 듣고 학생들은 그가 야간 중학교에서 보낸 1년이 무슨 의미가 있었는가를 두고 이야기를 나눈다. 이노상은 과연 그 시간이 행복했을까에 대해.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쿠로이 선생이 학생들에게 던지는 그 질문은 감독이 관객들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여러분은 과연 '돈'이 아닌, 대답할 다른 무언가를 갖고 있는가? 우리 모두는 '인생'이라는 학교에서 그 대답을 찾아가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실존적 의미에 대한 성찰과 함께 야마다 요지는 '학교'에서 사회의 하층민들과 주변인들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영화는 그들 또한 일본 사회의 구성원이며,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3. 전쟁을 관조하는 여성의 목소리: 어머니(母べえ, Kabei: Our Mother, 2008), 작은집(小さいおうち, The Little House, 2014)

  야마다 요지는 일본의 과거사와 관련해 올곧은 목소리를 내는 사회적 원로이기도 하다. 영화 '어머니(母べえ, 2008)'와 '작은집(小さいおうち, 2014)'은 일본의 과거 침략 전쟁에 대한 감독의 비판적 성찰을 보여준다. 야마다 요지는 두 영화에서 모두 여성의 목소리를 통해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영화 속 여성들은 차분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전쟁이 각자의 삶에 남긴 상흔에 대해 털어놓는다. 두 영화는 침략 전쟁의 병참 기지로서 '국내 전선(Home Front)'의 일본 여성들이 감내해야 했던 고난이 미시사적 관점에서 구술된다.

  영화 '어머니(2008)'는 1984년에 노가미 테루요가 발표한 '아버지의 레퀴엠'이라는 단행본을 원작으로 한다. 원작자는 일본의 제국주의 전쟁을 비판했던 자신의 아버지가 수감된 후에 가족이 겪은 고난을 써냈다. 영화에서 내레이션을 들려주는 이는 막내딸 테루미이다. 9살 테루미는 12살 언니, 그리고 엄마와 함께 감옥에 있는 아버지가 풀려나기만을 기다린다. 사상범으로 체포된 아버지는 전향을 거부하고, 혹독한 수감 생활을 감내한다. 아버지의 제자 야마자키, 고모 히사코는 2년이란 시간을 가족과 함께 하며 힘이 되어준다.

  러닝타임 2시간 12분은 꽤 긴 시간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그다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야마다 요지는 이야기가 갖는 힘을 잘 알고 있는 감독이다. 아버지의 제자 야마자키가 가족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일련의 사건들, 어머니의 친척 아저씨가 여름에 와서 지낸 이야기, 경찰인 외할아버지와 어머니와의 갈등. 그런 이야기들 중간중간에 야마다 요지는 일본의 뒤틀린 국수주의와 천황제의 폐해를 부각시킨다. 거리에서는 사치가 죄악이라며 귀중품을 국가에 헌납하라고 캠페인을 벌인다. 기차역에서는 전쟁터로 떠나는 군인을 배웅하며 천황 만세를 외친다. 어머니가 선생으로 있는 초등 학교에서는 천황의 생일을 기념하고 아이들에게 그 은혜를 칭송하게 한다.

  영화 '어머니'에서 묘사되는 당시 일본인들의 모습은 집단적인 최면에 걸린 것처럼 보인다. 어머니가 참석한 반상회에서 마을 대표는 천황궁을 향해 절을 하자고 하는데, 천황이 별장에 머무르니 그쪽을 향해 절해야 한다며 논쟁이 벌어진다. 잡화상의 주인은 진주만 습격 소식을 듣고, 드디어 일본이 미국을 무찌르게 되었다며 크게 반색한다. 외부인의 시각에서는 미쳐 돌아가는 나라이지만, 당시 일본인들에게 그것은 거대한 제국주의적 이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온전한 양심과 합리적 이성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비판적으로 살았던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영화 속 테루미의 아버지는 결국 2년 만에 옥사한다(실제 원작자의 아버지는 전향 후 석방되어 나중에 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징집된 야마자키는 군함의 침몰로, 히로시마에 있던 고모 히사코는 원폭으로 사망한다.

  '어머니(2008)'에서 어머니를 연모하는 야마자키의 감정은 매우 절제되어 있고, 그것은 영화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이와는 달리 '작은집(小さいおうち, 2014)'의 경우에는 로맨스가 극의 내러티브를 이끈다. 이 영화도 원작이 되는 소설이 있다. 야마다 요지는 2010년에 나카지마 쿄코가 발표한 동명의 소설을 읽고 영화화하기로 결심했다. 1935년에 시골 출신의 타키는 도쿄 중산층 가정의 하녀가 된다. 영화는 노인이 된 타키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적어 내려가는 글에 따라 전개된다. 타키가 화자가 되어 들려주는 이야기는 주인 마님의 불행한 사랑 이야기이다.

  이 영화의 러닝타임도 2시간 17분으로 역시 길다. 아마도 요즘 관객들에게 이러한 긴 호흡의, 이야기 중심의 영화는 지루하게 느껴질 것이다. 게다가 주인 마님 토키코와 이타쿠라의 불륜이라는 것도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타키가 토키코에게 품는 연모의 감정을 비롯해 중성적 매력을 지닌 토키코의 친구까지, 영화의 동성애적 코드는 기이한 자기검열처럼 삭제되어 있다. 아마도 노감독에게 그런 부분의 묘사는 영 내키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실 이 영화는 로맨스 보다 당시 전쟁이 중산층 계급에 미친 영향을 흥미롭게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타키의 주인은 완구 회사에 다니는데, 그는 계속되는 일본의 전쟁 소식에 흥분한다. 일본의 식민지가 확장되면 그의 회사가 팔 수 있는 장난감 시장이 커지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노년의 타키는 자신이 쓴 자서전을 대학생 조카 켄지에게 읽어준다. 타키는 1937년 중일 전쟁 시기 일본이 난징을 함락했을 때의 축제 분위기를 적는다. 하지만 켄지는 난징에서는 대학살극이 벌어지고 있었다고 지적하며 그 기억이 맞느냐고 반문한다. 침략 전쟁이 극에 달했을 무렵에 돈까스를 배달시켜 먹었다는 이야기도 켄지에게는 생뚱맞다. 타키는 조카가 모르는 그 시절의 암시장에 대해 들려준다.

  전쟁이 온나라를 쥐어짜내고 있었지만, 가진 사람들에게는 견딜만 했던 것이다. 야마다 요지 감독의 이 영화는 어딘지 모르게 제임스 아이보리의 '남아있는 나날(The Remains of the Day, 1993)'을 떠올리게 만든다. 영화는 2차 대전 시기에 부유한 귀족 가문의 충복으로 일하는 집사장 스티븐슨의 시선으로 상류층의 일상을 포착한다. 나치와 연계되면서 몰락하는 주인, 맹목적인 충성을 보였지만 결국 회한만 남은 노년의 집사장. 스티븐슨처럼 타키도 평생 독신으로 산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고독사였다.

  야마다 요지의 이 씁쓸한 전쟁 로맨스 영화에는 감독의 명확한 역사적 인식이 담겨져 있다. 영화의 마지막, 조카 켄지는 타키가 그토록 아꼈던 토키코의 아들 쿄이치와 만난다. 쿄이치는 전쟁 시기의 일본인들은 모두 원치 않은 선택을 강요받았다고 회고한다. 자발적으로 전쟁에 나섰던 이들조차도 자신이 원치않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시대. 그러나 과연 전쟁을 지원하고 수행했던 일본 국민들에게 원죄를 묻는다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조곤조곤하고 명징하게 울리는 여성의 목소리를 통해 관객은 천황과 군국주의에 대한 광신으로 점철된 침략 전쟁의 이면과 마주하게 된다.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사진 출처: asianwiki.com


***사진 출처: asianwik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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