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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환상의 경계: City of Pirates(1983), After Hours(1985), Stranger than Fiction(2006)

 

1. 망명자 감독이 써내려간 초현실주의적 'Vanitas', City of Pirates(1983)

  정신분석학 입문 강의의 첫 번째 과제물은 '자유 연상(Free association)'에 따라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어내는 것이었다. 자유 연상, 말 그대로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그 어떤 통제나 검열없이 털어놓게 함으로써 무의식에 접근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러한 정신분석학적 도구를 발빠르게 수용한 것은 초현실주의자들이었다. 프랑스의 작가로 초현실주의를 주창한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은 무의식의 표현을 위한 '자동 기술법(automatic writing)'을 착안해냈다. 비현실적 환상으로 채워진 영화 세계를 보여주는 칠레 출신의 감독 라울 루이즈(Raúl Ruiz)의 '해적들의 도시(City of Pirates. 1983)' 시나리오도 그런 방식으로 쓰여졌다. 라울 루이즈는 자신에게 떠오르는 무의식적 사고들을 종이 위에 무작정 써내려갔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영화를 찍었다.

  영화는 '해외의 땅, 종전 1주일 전'이라는 의문의 자막으로 시작된다. 이시도르(Isidore)라는 이름의 젊은 여자는 어느 섬에서 어머니, 의붓아버지와 살고 있다. 이시도르는 불안과 우울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관객들은 그 이유들 가운데 하나가 의붓아버지의 성추행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괴로워하는 이시도르는 방에 숨어든 어린 소년 말로를 만나게 된다. 가족들이 모두 살해당했다는 말로는 이시도르에게 약혼을 제안한다. 어린 약혼자 말로, 버려진 성에 사는 또 다른 추방자 토비, 이시도르는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기이한 여정에 나서는데...

  자동기술법에 따라 쓰여진 시나리오를 관객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영화는 라울 루이즈의 머릿속에서 일어났던 생각의 파편들을 이어붙인 것이다. 100편이 넘는 영화를 만든 이 다작 감독은 결코 대중적인 작품을 만든 이는 아니었다. 이 감독에게 있어서 생의 결정적인 사건은 칠레의 정치적 격변이었다. 피노체트의 쿠데타는 라울 루이즈가 칠레를 떠나 프랑스에서 살도록 만들었다. 이 영화를 보면 망명자로서 그가 느끼는 조국에 대한 부채의식, 무지막지한 독재자에 대한 분노가 느껴진다. 영화 속에서 반복되는 피와 칼의 이미지가 그것을 입증한다.

  이시도르의 어린 약혼자 말로는 가족들을 살해하고 값비싼 보석들을 훔쳐서 달아난 사이코패스 살인마로 나온다. 소년은 이시도르의 의붓아버지를 살해하고, 이시도르에게 자유를 선물한다. 어떤 면에서 고통받는 이시도르는 감독 자신의 영화적 자아일 수도 있다. 라울 루이즈는 고국을 떠나 타국에서 창작 활동을 이어가는 자신의 상황을 조난자, 내지는 해적들에 의해 납치된 비운의 승객으로 여겼던 것인지도 모른다. '해적들의 도시'는 영화 속에서 그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시도르는 섬을 떠나지 못하고, 영화가 끝날 무렵에는 해골에 가까운 모습으로 나이를 먹고 늙어간다.

  이 영화를 줄거리로 파악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무익하다. 라울 루이즈는 다양한 색들을 사용한 필터로 촬영된 바다의 풍경들, 살바도르 달리와 같은 초현실주의 회화에서 차용된 이미지들로 내러티브를 만들어 나간다. '해골'의 이미지가 여러 번 등장하는데, 이것은 이 영화가 일종의 '바니타스(Vanitas, 유한한 인생의 허무함을 일깨워주는 그림)'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라울 루이즈는 변화시킬 수 없는 조국의 현실에 대한 무력감과 고통, 독재자를 향한 독설을 뒤틀린 환상의 세계로 표현한다. 그는 망명한 예술가로서의 책무를 잊지 않았다. '해적들의 도시'는 해외의 땅에서 내면의 전쟁을 치루는 자신에 대한 보고서인 동시에 조국 칠레를 향해 쏜 비탄의 화살이기도 하다.


2. 작가와 등장인물의 만남, Stranger than Fiction(2006)

  라울 루이즈의 '해적들의 섬'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그린 매운 맛 영화라면, 마크 포르스터의 2006년작 'Stranger than Fiction'은 순한 맛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주인공 해롤드 크릭(윌 패럴 분)의 일거수 일투족을 설명하는 내레이션과 함께 시작된다. 국세청 직원으로 오로지 숫자와 씨름하며 정해진 규칙대로 사는 그의 삶에는 '재미'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이상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자신의 행동을 실시간으로 설명하는 여자의 목소리 때문에 해롤드는 미쳐버릴 것 같다. 게다가 그 목소리는 해롤드의 죽음을 예고한다. 정신과 의사에게 찾아갔더니, 조현병(정신분열증; 주요한 증상은 환청, 환각을 비롯해 망상과 같은 이상 지각이다)이라고 말한다. 자신은 절대로 미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해롤드는 문학 교수에게서 도움을 구하는데...   
 
  해롤드에게 들리는 목소리는 전지적 시점의 내레이터, 즉 해롤드를 주인공으로 글을 쓰는 작가이다. 영화는 두 개의 이야기가 동시에 진행된다. 한 축에는 글을 쓰다 막힌 작가 카렌(엠마 톰슨 분)과 글쓰기를 돕는 출판사 직원 페니, 그리고 또 다른 축에는 카렌이 써내려가는 해롤드의 삶이 자리한다. 평행선을 달리며 결코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은 작가와 등장인물은 해롤드가 자신의 예고된 죽음을 거부하면서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해롤드는 결코 죽고 싶어하지 않는다.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고,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고, 그렇게 자신이 정한 규칙들을 깨가며 삶을 즐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작가와 등장인물과의 만남, 영화 'Stranger than Fiction'의 플롯은 무척 기발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새롭지도 않다. 루이지 피란델로(Luigi Pirandello, 1867-1936)의 희곡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에는 작가가 창조한 희곡 속 등장인물들을 두고 모델이 된 실제 인물들의 싸움이 리허설 장면에서 펼쳐진다. 현실과 허구를 오가는 이 독특한 희극은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진짜인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영화 속에서 작가 카렌이 만들어낸 등장인물 해롤드는 진짜 현실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카렌은 그때까지 써냈던 소설의 주인공에게 늘 그러했듯 죽음으로 끝을 내려한다. 해롤드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작가를 찾아가 결말을 바꾸라고 부탁하는 것 뿐이다. 그런데 해롤드는 그 작가가 누구인지 모른다. 해롤드가 작가를 찾아가는 여정, 그것이 이 영화를 흥미롭게 만든다.

  'Stranger than Fiction'은 작가가 만들어낸 등장인물이 실제의 삶을 살고 있다는 설정으로 관객들을 유인한다. 여기에 해롤드의 로맨스, 작가의 존재를 특정해 나가는 추리의 과정, 등장인물에게 신과 같은 작가의 현실적 고뇌가 겹쳐진다. 관객들은 그 모든 이야기가 말도 안되는 소설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영화가 설계한 환상의 세계 그 자체에 몰입하게 된다. 과연 카렌은 삶과 죽음, 그 둘 중 어떤 것을 해롤드에게 선사할 것인가? 이야기의 완결성을 생각한다면 해롤드는 죽어야 하고, 해롤드의 새로운 인생을 위해서라면 어떻게든 삶을 이어가게 해야한다. 여러분이 카렌이라면 해롤드의 운명을 어떻게 써내려갈 것인가? 이 영화는 작품성과 흥행 모두 좋은 성과를 냈다. 마크 포르스터는 소설과 현실을 오가는 독특한 이야기를 대중적인 입맛에 맞추어 무난하게 연출했다.


3. 마틴 스콜세지가 그려낸 뉴욕 환상 특급, After Hours(1985)

  어렸을 적에 TV에서 방영된 '환상 특급'이라는 외화 시리즈는 참으로 기괴하고 놀라운 이야기로 가득차 있었다. 마틴 스콜세지의 1985년작 '특근(After Hours)'을 보면서 그 '환상 특급'을 떠올렸다. 영화는 평범한 직장인이 경험한 악몽과도 같은 하룻밤의 모험담을 그렸다. 늘 판에 박힌 지루한 일상을 살아가던 데이터 입력자 폴은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매력적인 여성 마시와 데이트를 하기 위해 소호(Soho)를 찾는다. 총알 택시 기사의 난폭운전에 20달러를 잃은 것부터 어째 조짐이 좋지 않다. 어떻게든 마시를 꼬셔보려는 폴의 시도는 무산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돈이 없어서 지하철도 못탄다. 다시 마시에게로 돌아와 보니, 여자는 죽어있다. 그 와중에 절도범으로 몰린 그는 분노한 소호 자경단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과연 그는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이 영화를 만들 무렵의 마틴 스콜세지는 무척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의 이전 작품들은 비평적으로는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흥행 수익 면에서는 그렇질 못했다. 그 때문에 그는 제작사들에게 'box-office bomb(흥행 실패작)' 양산자로 여겨졌다. 제작사들의 외면을 받는 괴로운 시기에 스콜세지는 독립 영화를 만드는 심정으로 'After Hours'를 후다닥 만들었다. 그를 움직인 것은 매력적인 시나리오였다. 조셉 미니언의 각본에 스콜세지가 수정을 가한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처음에는 결말도 정해져 있지 않았다. 촬영 내내 스콜세지는 지인들에게 결말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엔딩은 정말이지 꽤 괜찮다.

  영화의 주인공 폴이 대변하는 중산층 인텔리 직장인의 작은 일탈은 예기치 못한 사건들로 이어진다. 시작은 '헨리 밀러(Henry Miller, 외설적인 내용의 소설로 유명)'의 소설책에서부터 였다. 카페에서 그 책을 읽고 있는 폴에게 마시가 접근한다. 처음에 폴의 머릿속에는가볍게 하룻밤 보낼 상대를 찾을 심산이었다. 그렇게 해서 마시가 머무는 조각가 친구 키키의 집이 있는 소호에 가게 된다. 그러나 소호에서 만나는 여자들은 모두 폴의 성적인 추동(sexual drive)을 좌절시켜 버린다. 죽어버린 마시, 도난범으로 모는 카페 여종업원 줄리, 폴을 추적하는 자경단을 이끄는 게일, 그를 자경단에게서 숨겨준다며 급기야 회반죽으로 움직이지도 못하게 만들어버린 준까지. 폴의 수난은 그렇게 이어진다.

  마틴 스콜세지는 폴이 겪는 성적인 좌절감에 더해 실존적 위기를 덧붙인다. 마시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폴은 키키가 있는 클럽 베를린에 들어가려고 한다. 그러나 험악한 인상의 클럽 문지기는 다른 사람은 입장시키면서 폴은 들어갈 자격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부분은 스콜세지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소설 '심판'의 일부분에서 따왔다. 법정으로 들어가기 위해 갖은 애를 쓰지만 문지기에 의해 번번히 거부당하는 남자의 이야기. 그처럼 폴도 클럽 베를린과 소호의 구성원이 되지 못한다. 억지로 우겨서 들어간 클럽에서 그는 강제로 삭발을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그곳은 폴에게 악몽과 같은 경험을 선사하는 끔찍한 공간이 된다.

  그렇게 영화는 '소호'라는 장소에 일탈과 공포, 불안정성과 과격함을 부여함으로써 비현실적 공간으로 만든다. 영화의 마지막, 폴은 결국 아침 일찍 열리는 직장의 철문을 통과해 사무실 자신의 자리에 앉아서 주변을 둘러본다. 그것은 단지 소호에서 직장으로의 공간적 이동이 아니라, 환상에서 현실로의 복귀이며 정체성의 회복을 의미한다. 'After Hours'는 마틴 스콜세지의 필모그래피에서 상대적으로 과소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스콜세지가 선사하는 기기묘묘, 요절복통 '환상 특급'인 이 영화의 매력을 좀 더 많은 관객들이 발견하길 바란다. 

  

 

*사진 출처: usa.newonnetflix.info


**사진 출처: slantmagazine.com      영화 '특근(After Hours)', 영화 음악을 맡은 하워드 쇼어의 클래식에서부터 다양한 팝 음악에 이르는 선곡, 오리지널 스코어가 무척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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