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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를 풍미한 축구 스타의 빛과 어둠, Diego Maradona(2019)

 

  "축구는 속임수(feinting)의 기술이죠."

  1986년 멕시코 월드컵 8강전, 영국과 아르헨티나 전에서 그가 넣은 두 개의 골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 유명한 '신의 손'에 의한 것이었다. 마라도나는 한 손과 머리를 사용해서 골을 넣었는데, 그 순간을 놓친 주심은 골로 인정했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비열한 속임수도 마다하지 않는 그에게 오명과도 같은 별명이 붙게 된 이유였다. 아시프 카파디아는 '세나(Senna, 2010)', '에이미(Amy, 2015)'에 이어 '디에고 마라도나(Diego Maradona, 2019)'를 내놓으면서 그의 유명인 3부작에 마침표를 찍었다. 다큐는 현대 축구사의 상징적인 아이콘인 마라도나의 축구인생을 돌아본다. 카파디아는 수백 시간의 자료 화면을 추리고 추려서 마라도나의 흥망성쇠를 극적으로 재구성해서 보여준다. 이 다큐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마라도나의 첫 에이전트의 놀라운 안목 덕분이었다. 그는 두 명의 카메라맨을 고용해서 마라도나를 따라다니며 찍게 했다. 그렇게 남은 필름들과 마라도나의 아내 클라우디아의 개인 비디오 소장 자료가 더해지면서 다큐의 사실성은 세밀하고 풍성해졌다.

  다큐의 첫 도입부는 강렬한 비트의 음악과 함께 정신없이 내달리는 스포츠카의 내부 장면에서부터이다. 마라도나가 타고 있는 차는 이제 막 어딘가에 도착한다. 나폴리, 그가 FC 바르셀로나에서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고 빈 손으로 오게 된 도시였다. 1984년 7월, 마라도나가 왔을 당시 SSC 나폴리는 리그 순위 밑바닥을 전전하는 약체 팀이었다. 거기에다 지역적으로도 낙후된 나폴리는 이탈리아에서 마치 불가촉천민과도 같은 취급을 받았다. 다른 도시 사람들은 나폴리를 이탈리아의 하수구, 시궁쥐로 부르며 조롱하고 모욕했다. 그런 그곳에 마라도나는 세리에 A리그 우승을 2번이나 안겨준다. 그는 나폴리에서 신과 같은 존재였다. 나폴리에서의 활약과 함께 1986년 조국 아르헨티나의 멕시코 월드컵 우승은 마라도나 인생의 정점을 이룬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빈민가 출신의 가난한 소년은 오직 축구공 하나만으로 세상을 평정했다.

  카파디아의 전작 다큐의 주인공들이 영광의 순간을 지나 비극적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것과는 달리, 마라도나에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다큐 초반부에 나온 펠레의 청년 마라도나에 대한 짧은 언급은 예언이 된다. 펠레는 마라도나의 정서적 불안정성을 지적한다. 축구장에 서있으면 인생도, 골칫거리도, 그 모든 것도 잊게 된다고 말한 마라도나는 축구 이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약점 투성이의 인간이었다. 자신의 친자를 30년 동안 인정하지 않고 모른 척 했으며, 복잡하고 문란한 사생활은 황색언론의 먹잇감이었다. 결국 마약으로 점철된 선수 경력 후반기를 지나며 마라도나는 몰락한다. 마라도나의 마약 공급책인 나폴리의 토착 마피아 Camorra의 줄리아노 일가는 그런 마라도나의 추락에 일조한다. 도시의 성인에서 마약 사범으로의 급전직하, 거기에 더해진 자격 정지 징계는 마라도나의 인생을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몰아간다. 그는 나폴리에서 도망치듯 떠나야 했고, 망가진 경력은 복구되지 못했다.

  다큐는 마라도나의 인생 전부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화려한 전성기에 이어진 몰락을 대비시켜 마라도나라는 인물의 인생을 영화처럼 편집한다. 카파디아는 다큐 어디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비디오와 필름으로 찍은 마라도나의 개인 자료 화면과 과거 경기 장면을 설명하는 이는 마라도나 본인과 그의 누나, 아내, 개인 트레이너와 축구 해설가들이다. 이 다큐에서 그나마 주목할만 것은 음악이다. 빠른 비트의 전자 사운드로 작곡된 음악들이 다큐의 긴장감을 팽팽하게 유지시킨다. 그런 음악과 함께 다채롭게 편집된 경기 장면들에 축구 팬들이라면 '넘나 재밌는 것'이라며 열광하리라. 그러나 비평적 차원에서 나는 그런 열광을 보낼 수는 없다. 카파디아는 좋은 이야기꾼(storyteller)은 될 수 있겠지만, 작가로서의 독자적인 관점은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이 다큐에서 그가 직접 찍은 장면이 하나라도 있는지 모르겠다. 굳이 좋게 평가하자면, 카파디아가 가진 감독으로서의 역량은 이야기가 될 만한 것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그것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나폴리를 떠난 마라도나는 갑자기 13년 후인 2004년의 아르헨티나 토크쇼로 순간이동한다. 그 후의 인생 하반기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자료 화면으로 제시될 뿐이다. 쿠바의 카스트로를 비롯해 남미의 여러 정치인들과 친했던 마라도나의 정치적 면모에 대해서는 그 어떤 언급도 없다.

  아마도 언젠가 관객들은 마라도나에 대한 또 다른 다큐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이 인물이 보여준 인생역정은 너무나도 극적이고 흥미진진해서 이야기로서의 매력이 있다. 그는 언더도그였던 소속팀을 정상에 올리고, 포클랜드 전쟁에서 영국에 무참하게 패배한 조국의 자존심을 회복시켰다. 마라도나 인생의 대부분은 분명 축구장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것은 보다 복잡한 현실의 정치적 외연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가 마약 문제로 자격 정지를 당한 처분조차도 축구계 내부의 정치 역학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마라도나의 인생은 스포츠와 정치, 스타와 파파라치 언론의 공생과 같은 측면을 돌아보게 만든다. 카파디아는 그런 마라도나의 인생 한 부분을 절묘하게 편집해서 보여준다. 독창성은 없지만, 그가 만든 이 다큐에는 떨치기 힘든 매혹적인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사진 출처: parsi-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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