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부유하는 도시 청춘들의 비애, 마작(麻將, Mahjong, 1996)

 

  언젠가 아주 흥미로운 뉴스를 본 적이 있다. 가출팸(가출 후 함께 생활하는 무리를 지칭)을 이끄는 한 남자에 관한 것이었다. 삼십 초반의 이 남자는 차량 절도의 달인이었다. 어떤 차라도 그의 손기술 앞에서는 무력했다. 그는 값비싼 차들을 절도해서 자신의 가출팸 구성원들을 먹여살렸다. 일반적으로 가출팸이 성매매와 연계된 다양한 범죄의 온상인 것과는 달리, 그는 자신이 데리고 있던 청소년 아이들을 그저 부양할 뿐이었다. 아이들은 경찰에게 그가 자신들에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으며, 아빠처럼 항상 보살펴주었노라고 진술했다. 아마도 그에게는 어떤 의미에서 가족이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에드워드 양(楊德昌) 감독의 1996년작 '마작(麻將, Mahjong)'에도 그런 가출팸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가출팸에는 의리도 인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거짓말, 사기, 매춘, 폭력으로 점철된 4인조 가출팸의 절망적인 타이페이 생존기를 그린다.

  레드 피시(紅魚), 룬룬, 치약, 홍콩으로 이루어진 가출팸의 리더 레드 피시는 영국인 애인 마커스를 찾아 프랑스에서 온 마르트를 유인해 콜걸로 만들 계획을 갖고 있다. 룬룬은 그런 마르트에게 연민과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레드 피시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돈을 뜯어낸 꽃뱀 안젤라에게 복수하려고 한다. 여자 후리는 재주를 지닌 홍콩을 내세워 안젤라를 유혹하고, 치약은 영적 능력을 지닌 승려로 변장시켜 안젤라의 신뢰를 얻어내려고 한다. 레드 피시의 아버지는 거액의 부도를 내고 잠적했는데, 조폭은 돈을 받아내기 위해 레드 피시를 납치하려고 한다. 그러나 룬룬을 레드 피시로 오인한 조폭들은 룬룬과 마르트를 인질로 삼게 된다. 한편 자신과 어머니를 버린 아버지에 대한 극도의 증오에 사로잡힌 레드 피시는 아버지를 찾아내 분노를 터뜨린다. 이 가출팸은 계획한 사기극을 성공시켜서 그럴듯한 가족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타이페이의 4인조 가출팸에게는 가족이 없다. 레드 피시의 아버지는 10년 넘게 잠적 중이다. 룬룬은 외국인들이 사는 허름한 게스트 하우스가 주거지이지만, 그곳은 집이 아니라 잠깐씩 들리는 장소이다. 이 무리 가운데 가장 입이 더럽고 천박한 치약은 전형적인 양아치다. 홍콩은 남창 노릇으로 돈 많은 여자들에게 기생한다. 이들은 서로 형제같은 존재임을 내세워 홍콩에게 반한 알리슨에게 동침을 요구한다. 레드 피시가 알리슨을 어르고 협박하는 모양새는 영락없는 포주의 모습이다. 이 레드 피시는 아버지의 사기치는 능력을 물려받았음에 나름의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가 그토록 증오하는 아버지가 어떤 면으로 레드 피시에게는 생존의 비법을 알려준 셈이다. 4인조는 자신들이 사람들을 조종하고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쉽고 만만하지 않다.

  마르트를 매춘 사업에 끌어들이려는 계획은 룬룬의 순정 때문에 좌절된다. 안젤라는 홍콩을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공유하면서 모욕감을 안겨준다. 에드워드 양은 안젤라와 동성 친구들이 홍콩에게 억지로 음식을 먹이며 홍콩을 지배하는 모습을 통해 레드 피시가 알리슨에게 보여주었던 착취적 성적 위계를 정확히 전복시킨다. 돈과 권력을 지닌 이들의 위력 앞에 이 4인조 가출팸이 가진 사기 능력은 그저 조잡스럽고 한심해 보일 뿐이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아마도 영국인 건축가 마커스와 외국인 포주 진저로 대변되는 타이페이의 외국인들은 자신들의 나라에서는 별 볼 일 없는 쩌리들이겠지만, 이 낯선 동양의 도시에서는 지배자처럼 거들먹거린다. 마커스는 마르트에게 19세기의 제국주의가 21세기에도 지속될 거라며, 타이페이는 곧 자신들의 무대가 될 거라 장담한다. 이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레드 피시의 가출팸은 하부 구조에 자리한다.

  가출팸의 초짜이자 막내라고 할 수 있는 룬룬이 보여주는 마르트에 대한 순정은 마르트에게 비웃음을 산다. 홍콩의 애정을 갈구하는 알리슨이나 마커스의 애정을 확인하려는 마르트는 반복해서 '날 사랑해?'라고 묻지만, 그들이 원하는 사랑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비정하고 거대한 도시에서 사랑을 비롯해 그 어떤 따뜻한 인간적 감정은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뿐이다. 에드워드 양은 그런 도시의 삶에서 과연 애정과 상호간의 보살핌을 전제로 한 진정한 가족이 존재할 수 있는가 묻는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으로 레드 피시의 가족은 결정적으로 해체되며, 그 여파는 레드 피시의 가출팸으로 이어진다. 그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가진 것 없는 밑바닥 청춘들의 유사 가족은 그렇게 붕괴된다.

  레드 피시의 4인조가 머물렀던 곳에 치약은 자신이 그러모은 새로운 구성원들을 데려온다. 그러나 사기 치는 재주도 머리도 없는 치약이 꾸려갈 가출팸의 미래는 불투명해 보인다. 그들은 결코 가족이 될 수 없으며, 머무는 공간 또한 집이라고 할 수 없다. 그저 먹고 자는 합숙소 같은 그 곳에는 그렇게 도시의 떠도는 청춘들이 무수히 들고 나게 될 것이다. '마작'에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청춘들의 비애가 담겨있다. 관객들은 그 청춘들의 초상에서 쉽사리 출구를 발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영화의 마지막에 룬룬과 마르트가 나누는 입맞춤은 희망의 한 조각이라기 보다는 곧 사라질 도시의 신기루처럼 보인다.  


*사진 출처: zh.wikipedia.org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

황량하고 고독한 결혼의 풍경, 아내(妻, Wife, 1953)

  *이 글에는 '아내(妻, 1953)'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카가와와 미네코는 결혼 10년차 부부다. 영화는 부부 각자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관객은 결혼 10년 동안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서로 푸념하는 부부의 속내를 듣게 된다. 이 부부에게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그들은 별다른 소통도 하지 않고 얼굴을 바라보는 일도 거의 없다. 아내에게 마음이 멀어진 남편은 사무실의 여직원에게 마음이 기운다. 무뚝뚝하며 돈에 집착하는 아내와는 달리, 여직원 사가라는 사근사근하고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성품을 지녔다. 아내가 아닌 새로운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나카가와. 아내는 남편의 변화를 눈치채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해 남편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한다. 과연 이 부부는 같이 살아갈 수 있을까? '아내(Wife, 1953)'는 나루세 미키오의 '방랑기(1962)' 원작자이기도 했던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의 '갈색의 눈동자'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영화는 위기에 처한 부부를 통해 결혼 생활의 황량하고 고독한 풍경을 그려낸다.   나카가와는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사무실에서 점심으로 먹는데, 밥에서 머리카락이 나온다. 미네코는 확실히 살림에는 별 뜻이 없는 듯하다. 그들 부부의 화해를 위해서 미네코의 친구는 장을 봐와서 식사 준비를 하려고 한다. 그런데 친구가 본 미네코의 주방은 제대로 된 칼도 없고, 그나마 그 칼도 무딘 상태다. 친구는 자취생의 주방 같다고 말하고, 나카가와는 아내의 음식은 맛이 없다고 답한다. 이 아내는 그렇다고 남편의 심기를 잘 헤아리는 것도 아니다. 저녁에 책 좀 읽고 자려는 남편 옆에서 과자를 우적우적 소리를 내며 먹는다. 식사하고 나서는 젓가락으로 이를 아무렇지 않게 쑤시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아내에게 나카가와는 마음이 멀어진다. 그렇다면 미네코의 삶의 낙은 뭘까? 교외에 2층 단독 주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세를 놓아 살림에...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의 삶과 작품 세계를 다룬 다큐 세 편

  1. BBC 다큐 'Francis Bacon : A Brush with Violence(1997)', 1시간19분 2. The South Bank Show 제작 'Francis Bacon(1985)', 55분 3. 미국 휴스턴 미술관(The Museum of Fine Arts, Houston) 제작, Francis Bacon: Late paintings(2020), 55분 * 위 세 편의 다큐들은 모두 유튜브에서 검색 가능함.   1945년, 런던의 전시회에 걸린 그의 삼면화(triptych, 세 개가 이어진 그림으로 주로 가톨릭의 제단화에 쓰였음)는 관객들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2차 대전이 막 끝난 직후여서 사람들은 가급적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들을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화가는 기괴하게 변형된 신체와 인물의 이미지들을 자신의 그림 속에 계속해서 변주해 나갔다. 그는 동성애자였으며, 술과 도박에 빠져 지냈고, 그림으로 누릴 수 있는 명예와 부를 생전에 다 누렸다. 죽어서도 그의 그림을 비롯해 쓰레기 같은 잡동사니 소장품이 엄청난 가격에 팔리고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아마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도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를 무시무시한 이미지로 그려낸 초상 연작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1997년에 BBC에서 제작한 다큐는 화가 베이컨의 일대기와 작품, 그의 주변 지인들의 인터뷰를 충실하게 담고 있다. 이 다큐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화가의 작품 세계에 입문하려는 이들에게 아주 좋은 안내자가 되어준다. 거칠고 폭력적인 아버지와의 불화, 베를린과 파리에서 지냈던 20대 초반의 시절,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시작했던 경력의 초창기,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하는 30대, 그리고 그의 동성 연인들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베이컨은 자신의 성적 지향을 드러내는 것에 무척 솔직했다. 동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