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일본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뭔가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게 된다. 식민지 조선은 일제의 수탈로 고통받는 시기인데, 영화
속 일본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또한 메이지 유신으로 일찍부터 근대화를 이룩한 일본 사회의 모습이 꽤 서구적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1937년작 '숙녀는 무엇을 잊었는가(淑女は何を忘れたか, What Did the Lady Forget?)'에서도 당시 일본이 구가한 물질적 풍요의
단면을 보게 된다. 영화는 대학 교수 미야와 아내 토키코, 그리고 부부의 자유분방한 조카 세츠코가 만들어내는 집안의 소동을 코믹한
터치로 담아낸다.
학교에서는 근엄한 교수이지만, 집에서는 깐깐한 아내에게 눌려 지내는 미야에게 오사카의 조카 세츠코가 찾아온다. 이 조카는 담배도
피우고 운전도 할 줄 알며, 술도 잘 마신다. 숙모 토키코는 세츠코가 아직 성년의 나이가 되지 않았다며, 그런 조카를 못마땅하게
바라본다. 도쿄에 온 김에 실컷 놀고 싶은 세츠코는 골프 여행을 간다던 삼촌을 꼬드겨 게이샤들이 있는 술집에서 진창 퍼마신다.
술에 취해 돌아온 세츠코를 토키코는 나무라지만, 세츠코는 무시해 버린다. 한편 미야는 제자 오카다의 집에서 뭉개면서 아내의 간섭
없는 주말을 보내지만, 그의 거짓말은 곧 들통이 난다. 제멋대로인 조카와 남편의 거짓말에 화가 난 토키코는 남편을 몰아붙인다.
세츠코는 삼촌에게 남자의 강한 모습을 보이라며 충동질하고, 마침내 미야는 아내에게 반기를 드는데...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세대 간의 갈등이다. 오즈가 그려내는 신세대 여성은 세츠코가 대표한다. 멋진 양장을 한
세츠코는 모든 것에 솔직하고 거리낌이 없다. 세츠코는 삼촌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담배를 피운다. 게이샤들의 공연을 관람하며 술을
마시는 세츠코의 모습은 젊은 남성처럼 보일 정도다. 자신의 물건을 게이샤들에게 선물로 주고, 술을 더 따르라며 호기를 부린다.
집에 온 삼촌의 제자 오카다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줄도 안다. 이 여성에게 숙모 토키코의 모든 것은 답답하고
억압적으로 보인다.
토키코는 부잣집 마나님의 위세를 보여준다. 부를 때 대답을 잘 하지 않는 하녀에게 대답 똑바로 하라고 매번 주의를 준다. 돈깨나
있는 친구들 불러서 차마시고 노닥거리는 것이 토키코의 일상이다. 그들 사이의 대화는 서로의 외모와 차림새에 대한 은밀한 허세와
질투가 깔려 있다. 말 잘 들어주는 남편처럼 조카도 고분고분했으면 좋겠는데, 그게 먹히질 않는다. 게다가 남편은 그런 조카를
오냐오냐 하고 있다. 골프 여행 간다고 속이고는 어디서 뭘 했는지도 말을 안해주는 남편에게 화가 치미는데, 이 남편이 조카 앞에서
자신의 뺨을 때린다. 과연 오즈 야스지로는 이 명백한 폭력적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까? 놀랍게도 토키코는 남편의 사과에
누그러진다. 게다가 남편의 손찌검은 애정의 표현이라며 친구들에게 자랑하듯 말한다. 오늘날의 관객들에게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장면이지만, 우리는 1937년에 만든 영화를 보고 있다는 점을 상기해야만 한다.
이 영화는 오즈 야스지로의 후기 영화들에서 보이는 여러 주제들과 촬영 기법들의 원형을 담고 있다. 세츠코와 토키코로 대비되는
신구 세대의 서로 다른 가치관은 미야의 제자 오카다와 어린 과외 학생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오카다는 토키코의 부탁으로 토키코
친구 아들의 수학을 가르치게 되는데, 중학교 수학 문제에도 쩔쩔매서 아이들에게 대학 나온 거 맞냐는 놀림을 당한다. 이 어린
악동들은 어른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오즈의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재현되는 세대간의 갈등, 그리고 낮은 각도로 바닥에 카메라를 놓고
찍는 것도 일관되게 나타난다. 그렇게 찍은 쇼트에서 인물의 얼굴이 잘리게 보이는 것도 오즈는 신경쓰지 않는다. 공간에 대한 정교한
탐구를 비롯해 오즈 야스지로 영화의 팬이라면 흥미있게 볼 수 있는 여러 요소들이 보인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밋밋하며, 현대적인 정서와는 거리가 있다. 뺨을 맞은 아내는 남편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반성한다. 아내에게
손찌검을 한 남편은 겉으로는 사과했지만, 부부 사이의 주도권을 되찾아왔다는 데에 나름의 만족감을 느낀다. 이 남편은 조카에게도
부부 사이는 솔직한 진심보다는 속내를 숨기고 자신의 뜻대로 조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충고한다. 수긍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츠코는
오카다에게 자신들이 결혼하게 되면 그렇게는 못살 것 같다고 말한다. 어쨌든 미야와 토키코 부부의 애정은 깊어졌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평온한 밤을 맞이하는 부부의 만족스런 표정을 보여준다. 차례차례 꺼지는 집안의 불빛 속에 고요한 침묵이 자리한다. 그렇게
부르주아 가정에 평화가 찾아온다. 그러나 이 평화가 곧 깨진다는 것을 관객들은 알고 있다. 1937년, 일본은 중일 전쟁에
돌입한다. 젊은이들은 전쟁터에 끌려갈 것이며, 세대간의 갈등은 더욱 격화될 터였다. 그런 면에서 '숙녀는 무엇을 잊었는가'는
본격적인 전쟁의 광기에 일본 사회가 휩쓸리기 직전의 순간을 포착한 스냅 사진처럼 보인다.
*사진 출처: criterionchanne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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