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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며 걷는 청춘의 시간들,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桐島, 部活やめるってよ, The Kirishima Thing, 2012)

 

  "이담에 내가 감독 되면, 저것들 안써. 그때도 지금처럼 웃음이 나오나 봐라."

  뭔가 학교에서 쩌리들만 모인 것처럼 보이는 영화 동아리의 부원은 자신을 비웃는 여학생들을 두고 그렇게 뇌까린다.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의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The Kirishima Thing, 2012)'는 2009년에 나온 아사이 료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금요일, 학교의 최고 인기남인 키리시마가 갑자기 배구부를 그만 두고 종적을 감춘다. 주말 시합을 앞둔 배구부, 키리시마를 중심으로 뭉치며 다녔던 친구들은 모두 혼란에 빠진다. 모두들 키리시마를 애타게 찾는 가운데, 학교의 아웃사이더들 모임인 영화 동아리의 좀비 영화 촬영이 시작된다. 갑작스런 키리시마의 부재는 아이들의 일상에 균열을 일으키며, 마에다가 리더로 있는 영화 동아리의 촬영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영화는 처음에 키리시마의 소식이 전해진 금요일의 풍경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3번에 나누어 보여준다. 마에다와 영화 동아리 부원들, 키리시마의 여친 리사와 친구들, 키리시마의 절친 히로키를 좋아하는 밴드부 주장 사와지마, 이들은 마치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羅生門, 1950)'처럼 키리시마의 소식을 다른 입장에서 접한다. 영화가 보여주는 이 첫날의 묘사를 통해 관객들은 등장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게 된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키리시마'의 존재는 그들에게 있어 절대적이다. 감독 요시다 다이하치는 '영화 속 키리시마는 말하자면 일본의 천황과 같은 존재'라고 언급했다.

  배구부의 주장 키리시마의 부재로 토요일 시합에서 배구부는 패한다. 아무 말도 없이 연락을 끊고 잠수한 키리시마 때문에 여친 리사는 분노하며 허탈해 한다. 키리시마와 늘 어울렸던 히로키와 친구들은 도대체 뭘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할지 고민한다. 키리시마의 카리스마에 기대어 매일의 일상을 보냈던 그들은 비로소 자신들을 돌아볼 시간을 얻게 된다. 히로키는 자신이 속한 야구부 선배의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재능과 꿈을 돌아본다. 배구부의 키 작은 고이즈미는 키리시마의 자리를 대신하면서 열정만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재능의 부족을 실감한다. 재능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은 또 있다. 배드민턴 동아리의 미카는 배드민턴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던 죽은 언니를 떠올리며 괴로워 한다. 미카는 비슷한 처지의 고이즈미에게 연민을 갖는다.

  영화는 학원물에서 빠질 수 없는 연애도 촘촘히 짜넣는다. 밴드부의 주장 사와지마는 히로키를, 마에다는 좀비 영화 보러 갔다 만난 카스미를 좋아하게 된다. 사와지마가 히로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열심히 연주하는 곡은 엘가의 '사랑의 인사'다. 그러나 히로키는 그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다. 마에다의 경우도 마찬가지. 영화는 그 또래 아이들이 겪는 짝사랑의 내밀한 감정을 잔잔하게 그려낸다. 사와지마와 마에다는 또래 집단의 중심이 아닌, 주변부에 자리한 내성적인 아싸(아웃사이더)의 초상을 보여준다. 마에다의 영화 동아리방이 비춰지는 장면이 흥미로운데, 그곳은 검도부 방의 구석진 한 켠에 자리하고 있다. 그나마 그들에게 학교 생활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동아리 활동이다. 사와지마는 밴드부 주장으로, 마에다는 감독으로 영화 촬영에 최선을 다한다.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는 지금은 일본의 인기 배우로 자리잡은 이들의 신인 시절의 모습들을 즐겁게 볼 수 있다. 또래 집단의 인싸와 아싸에 대한 묘사를 비롯해 연애와 진로에 대한 고민들을 보면서 관객들은 그 나이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분명하게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모든 것은 희미하고 흐릿하게, 그리고 흔들려 보였다. 어쩌면 그렇게 흔들리면서 걸어가는 것이 청춘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나이가 들었다고 해도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기도 하다. 감독이 될 것 같지도 않고, 여배우와 결혼할 일도 생기지 않을 것 같지만,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때문에 영화를 찍는다는 마에다의 말은 청춘의 특권에 대해 떠올리게 만든다. 그 시간은 먹고 사는 일에 매몰되지 않은, 어쩌면 좋아하는 것과 온전히 머물 수 있는 인생의 짧은 순간인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asianwiki.com



**영화의 마지막에 마에다가 학교 옥상에서 좀비 영화를 찍을 때 흘러나오는 음악은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Lohengrin)' 2막에 나오는 '엘자의 대성당의 행렬(Elsa's Procession to the Cathedral)'이다. 사와지마의 밴드부 연주로 들려지는 이 곡은 마에다가 찍는 음울한 좀비 영화와 기묘하게도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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