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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거리의 끝에서, 데드 엔드(Dead End, 1937)

 

  오프닝 크레딧에서부터 눈길을 끄는 이름이 등장한다. 각본을 릴리언 헬만이 맡았다. 원작은 시드니 킹슬리의 브로드웨이 연극(1935)이다. 짜임새 있고 극적인 서사를 잘 써내려가는 헬만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매카시즘에 맞서서 의회 증언을 거부한 공산주의자답게(헬만은 그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은 없다) 영화는 좌파주의적 시각으로 도배되어 있다. 사실 제작사와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걱정했던 것은 그런 부분이 아니라 헤이스 코드(Hays code)에 따른 검열이었다. 영화는 등장인물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의도적으로 누락시킨다. 험프리 보가트가 연기한 'Baby Face' 마틴은 악명높은 갱스터이지만 영화 내내 직접적으로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마틴이 오랜만에 다시 만난 예전 여자 친구 프랜은 '매춘부'인데, 거기에 대한 언급도 검열에 걸리기 때문에 분위기로만 제시된다. 이렇듯 이 영화는 수수께끼 풀어가듯 막연한 암시들을 하나하나 짜맞추면서 보아야 한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검열에 통과했음'이라고 자랑스럽게 자막이 나오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촬영을 누가 했는가 하면 그레그 톨랜드가 했다. 그렇다. '시민 케인(Citizen Kane, 1941)'의 그 위대한 촬영 감독이다. 톨랜드가 이 영화에서 보여준 촬영은 그야말로 눈을 정화시키는 느낌이다. 빛과 어둠을 명징하게 조화시키는 톨랜드의 촬영은 예술로서의 영화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영화는 처음과 마지막 장면이 일종의 수미쌍관을 이룬다. 뉴욕의 화려한 고층 건물에서부터 수직으로 하강하는 크레인 쇼트는 East River의 빈민가에서 멈춘다. 영화의 마지막은 그 반대로 빈민가에서 화려한 빌딩이 보이는 공중으로 상승하는 쇼트이다. 톨랜드는 이 영화에서 크레인 쇼트를 자유롭게 구사한다. 이런 쇼트들은 부자와 빈자, 고층 고급 주택과 더러운 슬럼가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뉴욕의 퀸즈보로 다리 근처의 빈민가, 그곳은 강이 보이는 좋은 전망 때문에 부유한 이들의 고급 고층 주택과 맞닿아 있다. 그 거리의 아이들은 미래 갱단의 후보자들이다. 폭력과 욕설이 일상인 아이들 무리의 리더 토미는 누나 드리나와 살고 있다. 드리나는 빈민가의 좋지 않은 환경에서 동생과 벗어나려 애를 쓰지만, 경제 공황의 무거운 그늘 속에서는 하루하루가 버거울 뿐이다. 역시 그곳의 주민인 데이브도 불경기에 간판 그림을 그리며 연명하고 있는데, 그는 바로 코앞의 고급 주택에 사는 케이를 사랑하고 있다. 그런 그곳에 낯선 남자 두 명이 나타난다. 데이브는 어린 시절을 같이 보냈던 마틴을 기억해낸다. '베이비 페이스'란 별칭으로 불리는 그는 어머니와 여자친구를 만나러 그곳에 왔다. 그러나 마틴의 어머니는 보고 싶지 않다며 저주를 퍼붓고, 여자친구는 병든 매춘부로 나타난다. 마틴은 상심하고, 떠나기 전에 부잣집 아이를 납치해서 돈을 뜯어내려고 한다. 그 와중에 토미는 아이들과 함께 부잣집 아이의 옷을 빼앗고 때린다. 아이의 아버지가 나서서 토미를 경찰에 고발하면서 일은 커져가는데...

  빈민가와 바로 인접한 고급 주택이 현실적으로는 가능하지 않겠지만, '데드 엔드'에서는 그것을 거대하고 정교한 세트로 구현해 낸다. 멋진 외관의 주택 출입구는 바로 슬럼가와 마주하고 있으며, 그곳의 출입구는 더운 여름인데도 긴팔의 정장 외투를 걸친 경비원이 지킨다. 개인 풀장이 있는 집에서 프랑스어를 쓰는 부잣집 아이는 칼쓰는 법에 익숙해진 더러운 빈민가 아이들과 대비된다. 생계를 이어가느라 허덕이는 데이브와 드리나의 삶과는 달리, 주택 테라스에서는 파티가 한창이다. 헬만은 아이들의 대사를 통해 경제 공황 시기에도 흥청망청 먹고 노는 부자들을 비판한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그것은 삶의 여건 뿐만 아니라 인생 자체도 판이하게 가른다. 토미를 비롯해 그곳 아이들의 모습은 갱스터 마틴의 어린 시절을 연상하게 만든다. 마틴이 마주하는 비극적 현실은 이미 어린 시절을 보낸 그곳의 거리에서부터 결정되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무도하기 짝이 없으며, 범죄의 길로 들어서는 입구에 서있다.

  그나마 나쁜 길에 빠지지 않고 착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드리나와 데이브의 현실도 비참하기는 마찬가지다. 데이브는 고급 주택에 살고 있는 케이를 연모하지만, 케이는 데이브가 사는 곳에 갔다가 불결하고 비좁은 주거 환경에 경악한다. 헬만은 계급적 차이를 극복할 수 없는 것으로 설정한다. 결국 데이브는 케이를 떠난다. 대신 그는 토미의 일로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드리나 곁에 머물기로 한다. 가난한 자들의 연대, 마치 헬만은 그것만이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현실의 유일한 대안이라고 외치는 듯하다. 헬만의 이러한 좌파주의적 시각은 영화가 만들어진 1930년대 미국의 시대적 상황과 강하게 공명한다. '데드 엔드'는 존 포드의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 1940)'의 대도시 뉴욕 버전 같다. 영화에 깔린 노골적인 좌파주의에 불편해할 관객들도 있겠지만, '경제 공황'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해 볼 때 그것이 결코 과한 것만은 아니다. 많은 이들이 빈곤에 시달렸으며, 열악한 조건의 노동자들은 생존을 위해 투쟁할 수 밖에 없었다. 영화에서 드리나의 직업은 나오지 않지만, 드리나는 파업(picketing)하다 경찰의 곤봉에 맞았다며 이마에 난 상처를 보여준다. 

  마틴이 맞는 비극적 최후는 아마도 그 거리의 삶이 보여주는 최악의 경우일 것이다. 그럼에도 '데드 엔드'는 희미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드리나와 데이브는 경찰에 끌려가는 토미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결심한다. 그들이 슬럼가의 삶에서 벗어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함께 견디어낼 수 있다면 무거운 삶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지지 않을까? 거리의 끝에서 그렇게 가진 것 없는 이들의 이야기는 새로운 미래로 나아간다.


*사진 출처: tc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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