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자신의 인생에서 크게 터질 한 건을 기다리며 산다. 여자 친구에게 대단한 거물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하는 이 남자의
이름은 해리 파비안. 그러나 현실은 도시의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고 있다. 뒷골목 큰 술집 실버 폭스 클럽에 손님 물어다 주는
것으로 푼돈이나 버는 파비안에게 인생 역전의 기회는 찾아올 기미가 없다. 돈 떨어지면 클럽 가수 여자 친구의 지갑이나 뒤적거리는
일상. 그러던 어느 날, 레슬링 경기장에서 엿들은 대화가 파비안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다. '네이키드 시티(The Naked
City, 1948)'에서 뉴욕을 배경으로 느와르를 찍었던 줄스 다신은 1950년, 런던을 배경으로 도시에 얽힌 욕망의 변주곡을
들려준다. '밤과 도시(Night and the City)'는 그의 헐리우드 경력을 마감하는 작품이었다. 매카시즘은 이 재능있는
감독을 미국 밖으로 내몰았다. '밤과 도시'는 시대의 광풍이 이후 미국 영화에 끼친 크나큰 손실을 헤아려 보게 만든다.
해리 파비안은 허풍쟁이 사기꾼이다. 멀끔한 외모에 대단한 화술을 지닌 그는 맘만 먹으면 누구든 속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도시의 뒷골목 세계에서 파비안은 하수(下手)일 뿐이다. 그는 자신의 주변 상황 그 어느 것도 통제할 수 없다. 클럽 소유주 필은
파비안을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 신세라며 조롱한다. 아내 헬렌이 자신을 떠나 파비안과 함께 할 거라는 것을 알고 필은
파비안을 파멸시키기로 결심한다. 필은 파비안의 레슬링 사업에 돈을 댄다. 파비안은 전설적 레슬러 그레고리우스가 프로모터 아들
크리스토와 불화한 틈을 파고든다. 파비안은 그레고리우스를 내세워 레슬링 프로모터로 나서려고 한다. 사업 자금을 회수하겠다는 필의
압박에 파비안은 크리스토의 레슬러 스트랭글러(Strangler)를 도발해서 그레고리우스의 제자 니콜라스와 싸우게 만든다. 그러나
경기도 하기 전에 스트랭글러는 니콜라스의 손목을 부러뜨리고, 그레고리우스는 스트랭글러와 맞붙다 체력을 이기지 못하고 죽음에
이른다.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한 크리스토는 파비안에게 현상금을 내걸고, 파비안은 필사적으로 도망치는데...
리처드 위드마크가 연기한 파비안은 정말로 놀랍다. 입만 열면 거짓말을 쏟아내는 이 남자는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며 성공에 대한
강박을 가지고 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추동하는 물질적 욕망에 끌려다니는 인물이다. 영화의 후반부, 크리스토의 현상금 때문에
쫓겨다니는 파비안은 어둠이 깔린 런던의 뒷골목을 달리고, 또 달린다. 위드마크는 신들린 듯한 달리기 실력을 보여준다. 그는 달리는
장면을 위해서 체중을 감량하기까지 했다. 줄스 다신은 '네이키드 시티'에서 그가 보여주었던 특기를 더 심화시킨다. 전후 재건이
진행되던 런던의 가려진 부분을 하나 하나 열어 보인다. 비좁은 골목과 끝없이 이어진 계단들, 폐허가 된 건물, 영화는 제목 그대로
'밤'의 도시를 탐구한다.
이 도시에는 파비안처럼 결코 채워지지 않는 욕망들이 끓어오르고 있다. 탐욕스러운 클럽 소유주 필은 젊은 아내의 마음을 얻지 못해
불행하며,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늙은 남편 곁에 머무르는 헬렌은 자신의 클럽을 열고 싶어한다. 프로모터 크리스토는 아버지의
바램과는 다른 쇼 같은 경기로 돈을 그러모은다. 줄스 다신은 그런 인물들이 추구하는 욕망의 충돌을 그레고리우스와 스트랭글러의
레슬링 장면으로 극화시킨다. 거대하고 강인한 육체들이 뒤엉켜 죽일 듯이 싸우는 이 장면을 파비안과 스트랭글러의 매니저는 긴장과
흥분 속에 지켜본다. 노쇠한 레슬러가 자신의 모든 힘을 쥐어짜내 최후를 맞기까지의 그 과정에는 돈에 사로잡힌 도시 뒷골목 인물들의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
파비안이 이루고자 했던 허황된 욕망들은 결국 강물에 가라앉는다. 마치 줄스 다신의 도시 탐구 보고서 같은 두 영화들에서 도시는
좀처럼 희망과 낙관을 허락하는 곳이 아니다. 죽기 직전 높은 다리 꼭대기에서 도시를 내려다 보았던 '네이키드 시티'의 살인범처럼,
자신을 쫓는 이들을 피해 밤새 달렸던 파비안은 부둣가에서 새벽의 런던을 바라본다. 그 도시는 파비안을 늘 목마르게 했고,
헐떡거리며 달리게 만들었다. 그 질주는 죽음으로 멈춘다. '공산주의자 색출'이라는 마녀 사냥을 피해 유럽으로 도망친 줄스 다신은 이
영화가 헐리우드에서 찍는 자신의 마지막 영화라는 통보를 받았다. 파비안의 죽음에는 줄스 다신의 경력 단절이라는 공포가 투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영국으로 도피했다 미국으로 가서 의회 증언대에 섰던 에드워드 드미트릭과는 달리 줄스 다신은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유럽에서 자신의 영화 경력을 계속 이어갔다. '밤과 도시'는 이 감독이 가진 영화적 재능은 일시적인 시련에 수장되지
않을 것임을 보여준다. 리처드 위드마크의 뛰어난 연기를 비롯해 프란츠 왁스만이 맡은 영화 음악도 이 영화에 빛을
더한다.
*사진 출처: criteri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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