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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DF 2021 상영작 리뷰 3, 단평들 모음

 

1. 표류하는 마을(Floating Village Asylum, 2020)

  태국과 미얀마 국경 사이에 위치한 수상 가옥촌에는 미얀마 난민들이 산다. 오랜 군부 독재와 여러 종족들 사이의 분쟁을 피해 태국으로 피신한 미얀마인들은 물고기를 잡으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그들에게는 먹고 사는 문제 보다 시급한 것이 있다. 모두 무국적자 신분인 그들은 아이들만이라도 나은 미래를 찾기를 바란다. 프리차 스리수완 감독은 4년의 시간을 두고 수상 가옥촌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는다. 물에 떠있는 난민들의 집처럼 그들을 둘러싼 모든 것들은 불안정하기 짝이 없다. 금어기에도 생계를 위해 몰래 물고기를 잡다가 단속에 걸리는 일도 부지기수, 또한 남획으로 고갈되는 어족 자원은 소득에도 영향을 미친다. 아이들은 공교육의 혜택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국적을 얻지 못하면 미래를 생각할 수 없다. 남자들은 태국인이 하지 않는 저임금의 고된 농장일을 하며 생존을 위해 애를 쓴다.

  "고생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진짜 고생이 뭔지 모르지."

  그들이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는 자식들 때문이다. 철모르고 마구 뛰어놀던 아이들은 다큐가 끝날 무렵에는 훌쩍 자라나 있다. 아이들은 마침내 태국 국적을 얻는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희망의 시작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딸에게 13살이 되면 큰 도시에 나가서 돈을 벌어야 한다고 말하는 부모의 모습은 먹고 살아야 하는 삶의 냉엄한 명제를 떠올리게 만든다. 미얀마인이 아닌 태국인으로, 태국 사회의 하부 구조를 이루는 구성원으로 살아갈 가능성이 큰 미래 세대 아이들의 모습은 디아스포라의 또 다른 일면을 보여준다.

*눈길을 끄는 특이한 장면 하나: 아이가 '뇌전증(간질)'으로 의심되는 발작을 일으키는 장면이 있는데, 할머니가 아이에게 하는 주술 의식이 눈길을 끈다. 길다란 칼로 아이의 몸을 여러 번 쓸어내린다. 우리나라의 무속에서도 치병이나 잡귀를 내쫓을 때 그와 비슷한 방법을 쓴다. 동아시아권의 샤머니즘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속성 가운데 한 부분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2. 링사이드(Ringside, 2019)

  시카고, 그 도시에서 특히 거친 곳으로도 유명한 사우스사이드에서 권투로 남다른 미래를 꿈꾸는 아이들이 있다. 독일 감독 안드레 회어만은 두 어린 소년 복서의 성장기를 8년에 걸쳐 기록한다. 케네스 주니어는 엄격한 코치인 아버지의 지도 아래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경력을 쌓아간다. 또 다른 유망주 데스틴 주니어는 놀라운 재능을 가졌으나 잘못된 범죄의 길에 들어서는 바람에 4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한다. 다큐는 가난과 폭력이 지배하는 주변 환경 속에서 하층 계급의 흑인 소년이 복싱을 통해 어떻게 인생을 바꾸어가는지 영상 사회학적 보고서처럼 보여준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여러 번 다루어진 익숙한 주제이다. 이미 이전에 사회학자 로익 바캉(Loïc Wacquant)은 시카고 사우스사이드의 흑인 사회와 복싱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를 저서 'Body and Soul(2004)'로 내놓은 바 있다.

  케네스 주니어는 방 한 칸짜리 집에서 자신의 방이 있는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한다. 복싱에서 보여준 그의 가능성은 그에게 밝은 미래를 약속한다. 아버지 케네스는 자신의 훈련과 교육이 아들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고 자부심을 피력한다. 전직 마약상인 또 다른 아버지 데스틴은 아들의 4년 옥바라지를 하며 재기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복싱 말고는 그들에게 다른 대안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다큐는 그들이 사는 사우스사이드가 어떤 곳인지 두 번의 장례식을 통해 보여준다. 체육관에서 훈련하고 나오다 총에 맞아 죽은 흑인 복서들은 사우스사이드에 만연한 폭력이 어떤 것인가 입증한다.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생존과 직결되어 있다. '링사이드'는 시카고 빈민가 복싱 클럽을 통해 인종과 빈곤, 스포츠가 가지는 의미를 성찰하게 만든다.
 

3. 요양원 비밀요원(The Mole Agent, 2020)

  비밀 임무를 띄고 요양원에 잠입한 스파이가 있다. 그의 나이는 무려 83세. 세르지오 할아버지는 탐정 사무소의 구인 광고를 보고 갔다가 면접에 합격한다. 그에게 맡겨진 임무는 요양원에서 자신의 어머니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딸의 의문을 해소해 주는 일이다. 여느 입소자들처럼 들어간 그는 요양원 할머니들을 관찰해서 매일 탐정 로물로에서 보고한다. 이 특별한 비밀 요원은 타고난 친화력과 이해심, 분별력으로 곧 요양원 할머니들의 좋은 친구가 된다.

  세르지오는 다양한 사연을 가진 할머니들이 대부분 가족들의 외면으로 외로움과 슬픔 속에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매일 엄마를 애타게 찾는 치매 할머니, 가족들이 보고 싶다며 우는 할머니, 자신이 지은 아름다운 시를 읽어주는 할머니, 세르지오에게 남자 친구가 되어줄 수 있냐고 정중하게 묻는 할머니... 다큐는 젊은 세대들에게 아직 가보지 않은 노년의 풍경을 비감하지만, 나름의 따뜻함이 있는 수채화 풍경처럼 펼쳐놓는다. 무엇보다 비밀 요원 세르지오 할아버지가 보여주는 인간적 매력은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타인에 대한 남다른 배려심과 존중의 자세, 뛰어난 공감 능력, 분별력과 지혜는 좋은 노년이 무엇인가를 그 자체로 보여준다. 극영화적 설정을 도입한 이 독특한 다큐는 초반의 지루함을 견딜 수만 있다면 훈훈한 감동을 선사한다.


4. 그들이 부른 내 이름(They Call Me Babu, 2019)

  '바부(babu)'라고 불리던 여성들이 있었다. 다큐는 1940년대,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의 식민 통치를 받던 시기에 네덜란드인들의 가정부로 일했던 여성들의 삶을 돌아본다. 네덜란드인들은 그들을 '바부'라고 불렀다. 당시에 촬영된 자료 화면에 '알리마'라는 바부 여성의 삶을 영화적인 방식으로 결합시켰다. 아들만 위하던 아버지로부터 엄마와 함께 떨어져 나와 살던 소녀 알리마는 네덜란드 가정의 보모로 들어간다. 알리마는 주인의 어린 아들을 자신의 자식처럼 보살피며 그들이 네덜란드로 잠시 이주했을 때 그곳까지 따라가서 노예의 삶을 살았다.

  다시 돌아온 고국에서의 삶, 2차 대전이라는 시대적 격변을 거치면서 네덜란드인들은 물러나고 그 자리에 일본인들이 들어온다. 자료 화면 속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본어와 일본 노래를 부르는 인도네시아 아이들을 보면서 한국 관객들은 더 착잡한 심정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제국주의 일본의 폭압적 행태는 모든 식민지에서 같은 방식으로 재현된다. 다큐는 일본의 패망과 인도네시아 독립을 아우르는 역사적 사건까지 개관한다. 영화적 설정이기는 하나, 감독 산드라 베렌즈는 학술 연구와 함께 자신이 직접 인터뷰한 인도네시아 바부 여성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데에 공을 들였다. 식민지 백인들의 노예로 살아야했던 하층민 바부 여성의 삶을 통해 관객들은 제국주의의 그늘을 돌아보게 된다.


**EIDF 2021에 대한 개인적인 총평:


  그다지 새로운 것도, 나쁠 것도 없는 영화제였다. 나로서는 초창기의 참신하고 활기있었던 EIDF, 그 중간의 침체기를 떠올려 보면 그나마 중박은 쳤다는 느낌이다. EIDF는 이제 해외에서 화제가 된 신작 다큐들을 소개하는 대표적 통로로서는 안착했다. 하지만 과연 EIDF 자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프로그램이 뭐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늘 의문이 든다.


  무엇보다 유감스러운 점은 이전에는 페스티발 기간 동안 무료로 볼 수 있었던 D-BOX가 올해는 유료로 전환되었다. 공지에는 그 이유가 EBS '내부사정(이라고 읽고 돈 문제로 나는 해석한다)'이라고 되어 있다. 영화제의 수익성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공영방송의 다큐 영화제라는 취지에 걸맞게 영화제 기간 동안에는 무료 상영이 맞다고 본다. 재방송으로 관객들이 다시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오직 유료의 D-BOX로 볼 수 있는 방법은 상당한 아쉬움을 남긴다. 급변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다큐 제작자들이 다양한 주제와 접근 방식으로 다큐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점은 좋았다.


***사진 출처: fotogramas.es  '요양원 비밀요원'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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