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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현대사에 드리워진 소련 지배의 기억, Witchhammer(Kladivo na čarodějnice, 1970)

 

  '마녀 망치(Witchhammer)'란 용어는 중세 시대 마녀 사냥의 교본이 되었던 '말레우스 말레피카룸(MALLEUS MALEFICARUM)'에서 나왔다. '마녀를 심판하는 망치'란 뜻의 그 책은 마녀와 이단의 색출과 고문에 대한 자세한 방법이 실려있는 책이다. 극단적이고 교조주의적인 신념에 의거해서 기술된 그 책은 중세 마녀 사냥 광풍의 중심에 자리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감독 오타카르 바브라(Otakar Vávra)의 1970년작 'Witchhammer(Kladivo na čarodějnice)'는 1670년대 모라비아 지방에서 있었던 마녀 사냥을 다룬다. 영화의 원작은 1963년에 출판된 Václav Kaplický의 동명의 소설로, 감독 자신이 시나리오 작업을 맡았다. 바브라 감독은 원작 소설과 함께 남아있는 실제 재판 기록도 참조했다.

  사건은 거지 노파의 성체(聖體, 사제에 의해 축성된 빵) 은닉 시도가 들통나는 데에서부터 시작한다. 거지 여인은 산파가 아픈 소의 우유가 잘 나오게 소에게 먹일 성체를 갖다 달라고 했다며 실토한다. 그러나 소식을 들은 여영주 백작 부인은 다른 신성모독 사건이 있는지 종교재판을 열어 알아보라며 지시한다. 백작 부인의 참모는 종교 재판관 보블리그를 초빙할 것을 권유한다. 여관이나 운영하면서 은거하고 있었던 보블리그는 백작 부인의 승인하에 마녀재판을 시작한다. 보블리그는 가혹한 고문으로 얻은 자백으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화형대에 올린다. 처음에는 가난하고 늙은 여자들이 마녀로 몰렸지만, 나중에는 영지의 돈 있는 상공업자와 유력 인사들이 마녀로 고발당한다. 교구 사제 라우트너는 보블리그의 무자비하고 부당한 마녀 사냥을 우려하며 주교와 관리들에게 재판의 중단을 요구한다. 그러나 라우트너의 요청은 거절당하고, 보블리그는 그런 라우트너를 마녀들의 수괴로 몰아간다.

  중세 시대 마녀 사냥은 단지 신앙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당시 지배계급들에게 꽤나 매력적이고 유용한 돈벌이였다. 제조업과 상업으로 부를 축척한 상공업자들은 주요한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그들이 마녀 사냥으로 화형 또는 추방이 되면 그 재산을 빼앗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회적으로 취약한 지위의 여성을 비롯해 막대한 유산을 받은 부유한 미망인들도 마녀 사냥의 올무에 걸려들었다. 영화 속에서 지역을 다스리는 백작 부인은 보블리그의 잔혹한 고문과 재판에 대한 주변의 우려를 묵살한다. 마녀로 몰린 이들에게서 빼앗은 재산이 그대로 자신의 소유가 되기 때문에 무고한 사람이 얼마나 죽어나가든 백작 부인은 관심이 없다. 여영주는 탐욕스럽고 비열한 보블리그에 대한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런 백작 부인의 의도를 잘 아는 보블리그는 영지의 부유한 이들을 마녀 재판정으로 소환한다.

  바브라 감독은 마녀 재판정의 혹독한 고문과 보블리그와 귀족들의 연회장면을 이어붙여서 그것을 반복해 보여준다. 피와 울부짖음이 가득한 마녀 재판의 일과를 보낸 보블리그와 그 일당들은 무지막지하게 먹어대며 탐식의 극한을 보여준다. 보블리그는 자신에게 부여된 권력을 맘껏 휘두른다. 자신을 경멸하는 신부 라우트너와 하녀 수잔나를 마녀로 몰아가는 데에도 거침이 없다. 들판에는 점점 더 많은 화형대가 들어선다. 공포와 두려움을 조장하며 영주와 귀족은 대리인 보블리그와 결탁한다. 보블리그가 보여주는 탐욕과 위선, 잔혹성은 수탈자로서의 지배 계급의 본질적 특성을 대변한다. 바브라 감독은 마녀 재판정에서 행해지는 고문과 폭력을 통해 1950년대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정권 수립 과정에서 있었던 소련의 지배적 역할을 부각시키고자 했다. 2차 대전 이후 체코는 소련 주도 하에 스탈린 주의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며 공산화되었다. 그 결과 당시 체코에서는 공산 정권에 반대하는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숙청이 자행되었다. 소련의 체코 지배는 1968년 프라하 침공으로 정점에 이른다. 당시 관객들에게 마녀 사냥을 다룬 이 영화는 소련이 체코에 저지른 만행에 대한 은유적 비판으로 받아들여졌다. 영화를 불편하게 생각한 체코 공산 정권은 이 영화를 20년 넘게 상영 금지시켰다.

  그러나 바브라 감독 자신은 영화가 1968년에 있었던 프라하 침공을 비판하는 의미를 갖는다고 말한 적은 없다. 체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서 그는 철저한 공산주의자였으며, 정권에 영합하는 영화들을 꾸준히 만들었다. 그가 소련에 반대한 일로 일시적 시련을 당했던 것은 맞지만, 어디까지나 민족주의적인 시각에서 외세인 소련을 비판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바브라 감독의 존재는 체코 영화계의 빛과 어두움을 보여준다. 그는 결코 체제 저항적인 작가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 영화가 가진 정치적 은유는 어디까지나 제한적 함의를 갖는다. 

  'Witchhammer'는 중세의 마녀 사냥이란 역사적 사건이 어떻게 오늘날의 계급과 정치적 문제의 알레고리로 기능하는가의 한 예를 보여준다. 아서 밀러의 '크루서블(The Crucible)'이 1950년대 매카시즘에 대한 은유였듯, 'Witchhammer'는 체코슬로바키아의 현대사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진 소련의 폭압적 지배를 마녀 재판정에 빗대어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 또한 일방향적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다. 트럼프 정권 시기에 이 영화를 보았던 어느 미국 관객은 'Witchhammer'를 이민자들과 소수인종을 차별하고 탄압하는 정치 권력자들의 횡포로 받아들였다. 2021년의 한국 관객들은 이 영화를 이전의 해석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영화 텍스트의 비평적 지평은 그렇게 새롭게 확장될 수 있다.   


*사진 출처: blueprintreview.co.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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