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미국에서 '사라(Sarah)'라는 제목의 소설책이 나온다. 작가의 이름은 Terminator.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가명으로 출판된 이 책은 파격적이고 선정적인 내용으로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매춘부 엄마를 둔 어린 소년의 학대와 상처 가득한 성장기를 그린 소설이었다. 역시 그 해에 출판된 단편 소설 모음집 'The Heart Is Deceitful Above All Things'도 호평을 받으면서, '터미네이터'란 이름의 작가에 대한 궁금증은 커져 갔다. 그리고 마침내 이듬해인 2000년 5월, 익명의 작가는 세상 밖으로 나온다.
그의 이름은 'JT LeRoy', 제레마이어 터미네이터를 줄인 'JT'로 불리는 17세의 소년은 단번에 천재 소설가로 떠오른다.
염색한 긴 머리, 선글라스, 독특한 옷차림으로 나타난 JT는 어린 시절의 성적 학대, 마약 중독, 성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예민하고 불안한 예술가로 대중에게 비춰졌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문학계 뿐만 아니라 패션, 영화, 음악계의 유명인들과 교류하는
셀럽이 된다. 영화 감독 구스 반 산트는 JT가 쓴 '사라'를 영화로 만들려고 했다. 이탈리아의 유명 감독 다리오 아르젠토의
딸인 아시아 아르젠토는 JT의 또 다른 책을 바탕으로 영화를 찍는다. 커트니 러브, U2, 위노나 라이더 같은 이들도 JT와 알고
지냈다. 그런데 이 잘 나가는 젊은 작가에게는 비밀이 있었다. 제프 퓨어차이그(Jeff Feuerzeig) 감독의 2016년작
다큐 'Author: The JT LeRoy Story(2016)'는 작가 JT 르로이를 둘러싼 거대한 사기극의 전모를 보여준다.
다큐는 로라 알버트란 이름의 여성이 들려주는 이야기로 진행된다. 여자는 어린 시절에 이혼한 부모로 인한 불행한 성장기, 위탁
가정에서의 생활, 폰섹스 전화 상담원으로 생계를 유지했던 이십대 초반을 회고한다. 그런데 이 여자는 자신을
'스피디(Speedie)'라는 별칭으로 소개한다. 우울과 불안에 시달리던 여자는 청소년 전화 상담 프로그램을 통해 정신과 전문의의
상담을 받는다. '터미네이터'란 가명의 소년으로 상담을 받았던 스피디는 의사로부터 글쓰기를 해보라는 권유를 받는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단편 소설들을 유명 작가들의 연락처를 알아 내어 보내버린다.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은 첫 소설
'Sarah'가 출판된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계속 발표한 소설이 인기를 끌자, 여자는 어떤 식으로든 세상에 나올 궁리를 해야만 했다. 당시 동거하던
남자 친구 제프에게는 '사반나'라는 이름의 여동생이 있었다. 뚱뚱한 자신의 외모에 콤플렉스를 지닌 여자는 사반나를
'터미네이터'로 소개한다. 곧 이 이름은 'JT 르로이'로 바뀐다. 그렇게 스피디의 현실 아바타 'JT'가 탄생한다. 여자는 남자
친구 제프와 함께 공동 매니저로 'JT'의 모든 것을 관리하며 함께 한다. 이 기가 막힌 사기극은 무려 5년 동안 이어졌다.
대중 매체와 유명인들은 'JT'의 모든 것에 열광했고, 덩달아 매니저 노릇을 하던 여자는 음악하는 남친 제프와 함께 꿈꾸던
음반까지 낸다. 여기에서 여자의 이름은 '에밀리 프레이저'로 또 바뀐다. 'JT'는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Elephant,
2003)'의 제작 과정에도 참여한다. 물론 모든 것은 그 여자 로라 알버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각색과 작사 작업, 매니저,
가수, 의상 코디네이터... 여자는 자신의 아바타 'JT'와 함께 하는 동안 문화계에서 자신의 입지를 넓혀간다.
다큐 내내 유명인들과 'JT'의 통화 내용이 담긴 녹음 테이프가 재생된다. 로라 알버트는 'JT'를 가장한 목소리로 전화 통화를
했고, 그것을 다 녹음해 놓았다. 중간 중간 삽입된 애니메이션 장면들과 알버트의 자필 메모들도 이 다큐의 독창성과 사실성을
배가시킨다. 거기에 자신의 사기극을 차근차근 되짚어 회고하는 로라 알버트는 전문 배우 뺨치는 연기력까지 보여준다. 이 여자는 물론
'사기(hoax, scam)'라는 단어를 전적으로 부인한다. '해리성 정체성 장애(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라고 부르는 '다중 인격 장애'도 인정하지 않는다. 다양한 가명의 사용은 예술가에게 용인된 표현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단지,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대리인을 내세운 것이 죄가 되냐고 묻는다.
다큐는 현실과 예술적 속임수의 불분명한 경계선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로라 알버트와 시누이, 동거남 제프로 구성된 이
희한한 가족 사기단의 좋은 날은 2005년, '뉴욕 매거진'의 폭로 기사로 끝나버린다. 더는 역겨운 사기극을 볼 수 없었던 제프
친구의 제보 때문이었다. 로라 알버트는 'JT 르로이'의 이름으로 회사까지 차렸는데, 가명을 내세워 영화사와 계약한 일로
고소당했다. 소송은 거액의 합의금을 지불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폭로 이후 잠시 휘청거리기는 했지만, 로라는 자신의 글재주로
재기에 성공하며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한동안 잠적했던 'JT' 아니, 사반나는 나중에 공연 예술을 전공해서 행위 예술가가
되었다. 5년 동안 보여준 놀라운 연기력이 새로운 인생의 진로를 결정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로라 알버트는 대중을 기만한 사기꾼인가, 아니면 예술적 아바타를 내세워 자신만의 방식으로 창작 활동을 한 작가인가?
'Author: The JT LeRoy Story'는 관객들에게 예술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하도록 만든다. 작가가 쓰는 소설은
현실을 모방하지만, 사실이 아닌 허구의 세계를 그린다. 로라 알버트는 자신이 써낸 소설처럼 자신의 또 다른 존재도 그렇게 만들어
냈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의 상처가 자신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강변하는 이 뛰어난 연기자이자, 사기꾼이며, 작가인 여자의 이야기는
놀랄만큼 흥미롭다. 2018년,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JT LeRoy'가 개봉되었다.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JT', 로라 던이 알버트를 연기했다. 영화는 혹평 속에 흥행에 참패했는데, 아마도 보는 내내 손에 땀을 쥐게하는 이 다큐의
존재 때문이었을 것이다. 철저한 자료 조사, 독창적인 구성, 깊이있는 성찰까지 갖춘 이 다큐는 좋은 다큐가 무엇인지 스스로
입증한다.
*사진 출처: theguardian.com 'JT'와 로라 알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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