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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리오 메뎀이 보여주는 스페인 근현대사의 예리한 절단면, Vacas(Cows, 1991)

 

  외신에서 아주 가끔씩 스페인의 바스크 분리 독립 운동과 관련된 소식을 들을 때가 있다. 그때마다 스페인의 오랜 지역적 정서와 결합된 일부 극렬 정치집단인가 보다 생각했었다. 아마도 스페인 근현대사에서 '스페인 내전'에 대해서 약간만 알고 있는 정도의 외국인의 시각에서 본다면 대부분 그렇게 여길 것이다. 훌리오 메뎀 감독의 1991년작 'Vacas(Cows, 1991)'은 바스크 지방의 두 집안의 가족사를 통해 스페인 근현대사를 성찰한다. 영화는 4개의 챕터로 나누어 전개된다. 1. 1875년 3차 칼리스트 전쟁(The Third Carlist War), 2. 도끼(1905년), 3. 불타는 구덩이(1차 세계 대전), 4. 숲속의 전쟁(스페인 내전). 주인공 마누엘 역은 배우 까르멜로 고메즈가 맡았는데,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들의 3대에 걸친 역을 소화해 낸다.

  이 영화를 이해하려면 스페인 근대사의 칼리스트(카를로스파)들에 대한 개관적 지식이 필요하다. 1883년 스페인의 페르난도 7세가 사망하자 3살된 딸 이세벨 2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이들이 왕실의 후손인 카를로스 백작을 왕위에 올리려고 전쟁을 일으켰다. 무려 3차례에 걸친 칼리스트 전쟁은 스페인의 복잡한 정치적 지형을 만들어 냈다. 결국 칼리스트들은 패배했지만, 바스크 지방의 칼리스트들은 바스크 자치주의를 
주장하는 쪽으로 분화했다. 왕당파에서 반 공화주의, 극우 보수주의로 변화한 칼리스트은 스페인 내전에서는 프랑코 편에 선다. 프랑코가 그들이 원하는 자치권을 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칼리스트들을 경계하던 프랑코는 그들을 철저히 이용해먹고 탄압했다.


  영화 'Vacas'의 첫 장면은 도끼로 나무를 패는 남자의 모습에서부터 시작한다. 날이 바짝 선 도끼로 무지막지하게 나무를 찍어내리는 이 긴장감은 영화 내내 유지된다. 첫 번째 챕터는 3차 칼리스트 전쟁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마누엘은 이웃 카르멜로를 전장에서 만난다. 총격으로 죽은 카르멜로의 피를 얼굴에 묻혀 죽은 척 했던 마누엘은 구사일생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30년이 지나고 노인이 된 마누엘은 나무 쪼개기의 달인이 된 아들 이그나시오과 손녀딸들을 보며 노후를 보낸다. 그는 주로 소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내는데, 소는 그가 전장에서 도망쳤을 때 숲에서 처음으로 본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가 그리는 소는 음울한 기운을 내뿜으며, 피를 흘리고 있다. 소는 이 집안에서 일어나는 주요한 사건들의 말없는 목격자이다. 훌리오 메뎀은 '소'를 역사의 무심한 방관자로 설정한다.

  나무 쪼개기 달인으로 온 나라에 이름이 알려지는 이그나시오와는 달리 그에게 시합에서 패배한 이웃 카르멜로 집안의 후안은 더욱 적대적이 된다. 후안은 이그나시오와의 사이에서 사생아 페루를 낳은 여동생 카탈리나에게 목숨의 위협을 가하며 근친상간까지 시도한다. 한적한 시골 마을의 두 집안을 얽어맨 감정의 골과 정신병적 징후는 정파들의 전쟁으로 얼룩진 스페인 근현대사의 단면을 떠올리게 만든다. 지배 계급의 피비린내 나는 정치적 암투는 민중의 삶을 뒤흔들고 망가뜨린다. 미국으로 떠난 페루는 사진 기자가 되어 고향을 찾지만, 마을의 숲은 내전의 전장터가 된다. 삼촌 후안은 칼리스트로 프랑코의 정부군에 합류해 마을 사람들을 학살한다. 마누엘을 불구로 만들었던 참혹한 전쟁의 그림자는 그렇게 스페인 내전까지 이어진다. 그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도망치는 것 뿐이다. 유럽이 전쟁 중이던 시기에 이그나시오는 카탈리나와 미국으로 도망쳤고, 삼촌의 호의로 겨우 목숨을 건진 페루는 연인인 이복 여동생 크리스티나와 프랑스로 갈 것을 생각한다.

  'Vacas'에서 '소'와 함께 또 다른 목격자로 등장하는 사물은 '사진기'이다. 마누엘은 사진기를 접하고 틈만 나면 가족과 숲속의 동식물을 카메라에 담는다. 비공식적으로 기록되는 민중의 역사, 마누엘의 손자 페루가 종군 사진 기자로 다시 고향에 돌아오는 것은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페루는 마을 숲속의 전투 장면을 카메라에 담는다. 어떤 면에서 훌리오 메뎀은 자신의 첫 장편 영화에 스페인의 근현대사에 대한 영화적 성찰을 남긴 셈이다.

  그가 바라본 스페인의 고통스런 역사는 뿌리깊은 적의와 불화에서 뻗어져 나온 병든 가지들이다. 훌리오 메뎀은 그 모든 것을 상징적인 이미지로 보여준다. 죽어가는 것을 모두 삼켜버리는 숲속의 오래된 그루터기, 마누엘이 만든 붉은 모자(칼리스트들의 모자)를 쓴 죽음의 사신 허수아비가 휘두르는 길다란 낫, 영화는 그런 이미지들과 함께 소리에도 집중한다. 숲속 장면에서 들리는 사람의 거친 숨소리, 나무를 찍어내는 도끼 소리, 그 소리들은 관객을 긴장시키고 불안하게 만든다. 때로 어떤 영화들은 우리가 잘 모르는 낯선 나라의 역사 속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Vacas'를 만나는 관객들은 훌리오 메뎀이 영화적으로 예리하게 절단한 스페인 역사의 한 단면을 보게 된다. 


*사진 출처: dvdbe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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