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데뷔작 '로저와 나(Roger and Me, 1989)'는 여러모로 흥미있는 작품이다. 이런 저런
직업을 전전하다 백수로 고향에 돌아온 무어는 GM(제너럴 모터스)의 공장 폐쇄와 인력 감축으로 고향 플린트가 경제적으로 몰락한
것을 보게 된다. 그는 GM의 최고 경영자 로저 스미스를 만나서 이야기라도 들어보자, 하고 카메라 하나 들고 길을 나선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 다큐는 이후 다큐멘터리 제작에 있어서 축복이자 동시에 저주처럼 작용했다. 이전까지 대상과의 객관적 거리를 중시했던
다큐멘터리 제작 경향은 무어가 보여준 참여적이고 적극적인 인터뷰, 영화적 재구성과 같은 방법들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이른바
경멸적 의미로 'Moore Kids'라고 불리는 새로운 세대의 다큐 제작자들이 비슷한 다큐들을 쏟아냈다. 아마도 그 대표적인
작품을 꼽는다면 모건 스펄록의 '슈퍼 사이즈 미(Super Size Me, 2004)'일 것이다.
2021년 EIDF 상영작인 사카하라 아츠시 감독의 '옴 진리교: 지하철 사린 사건과 나(Me and the Cult
Leader, 2020)'를 보면서 느낀 감정은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 듯한 기시감이었다. 영문 제목도 '나와
사이비 교주'이며, 사카하라 감독은 마이클 무어가 '로저와 나'에서 썼던 야구 모자 비슷한 모자를 쓰고 나온다. 1995년, 일본
도쿄에서 옴 진리교의 지하철 독가스 테러 사건으로 13명이 사망하고 6000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했다. 감독 사카하라 아츠시는
당시 그 지하철을 타고 있다가 사린 가스에 노출되어 회복할 수 없는 후유증에 시달리게 된다. 그는 알레프(Aleph)로 이름을
바꾸고 여전히 활동 중인 옴 진리교의 실체에 접근해 보기로 결심한다. 2015년, 1년여의 노력 끝에 알레프의 중요 인사인 홍보
담당자 아라키와의 만남이 성사된다. 감독은 아라키와의 짧은 여행을 계획한다. 이 다큐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그 두 사람의
여행 기록을 담았다.
천인공노할 테러를 저지른 종교 단체가 어떻게 이름을 바꾸고 여전히 신도를 끌어들이며 활동할
수 있는 것일까? 일본 정부는 사건 이후 지속적으로 옴 진리교 단체를 감시해왔지만, 헌법에 명시된 '사상과 종교의 자유'는
침해할 수 없는 기본권으로 옴 진리교에도 해당된다. 사카하라 아츠시는 분노와 고통, 그리고 궁금증을 가지고 아라키와 과거로의
여행을 떠난다. 우연의 일치로 그들은 같은 교토 출신으로 명문 교토 대학의 1년 선후배 사이였다. 그들의 고향 교토와 모교의
교정을 돌아 보며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한다.
다큐에서 보여지는 사카하라 아츠시는 매우 활달하고 직설적인 인물이다. 그와는 달리 아라키는 내성적이며 거의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사카하라와 아라키는 같이 음악을 듣고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며 기묘한 우정을 쌓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교주 아사하라 쇼코를 옹호하는 아라키를 보며 사카하라는 분노한다. 아라키에게 피해자들에 대한 사죄의 참회의 감정을 느껴야 한다고
압박해가는 감독의 모습은 어떤 부분에서는 관객들에게 이질감을 불러일으킨다. 과연 아라키에게 과거의 그 사건에 대해 어떤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테러 사건 1년 전에 출가(가족과 주변과의 연을 끊고 입회하는 것을 의미)했지만 아라키는 테러 사건과는 관련이
없는 인물이며, 단지 그의 잘못이 있다면 아직까지 잘못된 종교적 망상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점일 것이다.
사카하라 감독은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아라키에게 사과를 요구한 이유는, 사과가 아라키의 내면적 각성을 이루고 아사하라의
망령에서 벗어나게 할 거라는 희망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다큐에서도 엿볼 수 있듯, 감독은 완고하고 충실한 추종자인 아라키에게
연민과 우정의 감정을 갖고 있다. 사실 다큐는 '가해자/피해자'의 대립적 구도에 집중하기 보다는, 이들의 현재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이비 교주'의 사악한 영향력을 통찰하게 만든다. 사카하라와 아라키가 나누는 대화를 통해 관객들은 그 두 사람의 순탄치
않았던 인생 역정을 듣게 된다. 사카하라는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아내될 사람이 옴 진리교 신자라는 고백을 듣는다. 결혼을 취소하지
않았지만, 결국 그 결혼은 1년 반만에 끝난다. 아라키는 어린 시절의 잦은 병치레, 극도로 예민하고 내성적인 성격,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탐구심을 가졌던 자신의 성장 과정을 들려준다. 교주 아사하라와의 만남은 아라키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다. 어떤 면에서
아라키가 끈질기게 사카하라의 사과 요구를 거부하며 교주를 옹호하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 전부가 부정당한다는 느낌
때문일지도 모른다.
"거기에서부터 시작이었군요, 우리 두 사람은."
두 사람은 자신들의 모교를
돌아보면서 교주 아사하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사카하라는 리무진을 타고 교정에 들어온 아사하라에게 '날아봐,
날아보라구(아사하라는 공중부양 능력이 있다고 공언했다)!'고 외쳤던 일화를 들려준다. 그러자 아라키는 학교에서 교주를 만난 것은 그
1년 뒤였는데, 친구로부터 아사하라에게 날아보라고 소리질렀던 사람에 대해 들었다고 말한다. 아라키의 그 이야기를 듣고 사카하라는
기이한 인연의 시작을 되새겨본다.
사카하라가 다큐를 찍은 것은 2015년이었지만, 편집 작업에는 5년이나 걸렸다. 과거의 상처와 마주하는 작업이 그토록 힘들었다고 그는 말했다. 제작사에서 추천한 와타나베 준코가 편집을 하게 되면서 다큐는 긴 기다림 끝에 관객과 만난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그림자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두 남자의 짧지만 내밀한 내적 여정이 잘 담겨진 데에는 편집의 공이 크다. 옴 진리교 교주와 테러의 핵심 관계자들의 사형이 이루어진 것은 2018년이었다. 사카하라 감독은 그 소식이 어느 정도는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 주었다고 말했다. 아라키는 여전히 알레프에 몸담고 있으며, 사카하라 감독의 연락에 응답하지 않는다고 한다. 'Me and the Cult Leader'는 그렇게 과거의 한 인물로 인해 인생의 비가역적인 변화를 겪은 두 남자의 현재를 고통스럽게 응시한다.
*사진 출처: dbox.e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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