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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초크의 어설프고 기이한 사형제 다큐, Into the Abyss(2011)

 

  "그건 마치... 내 어깨에 얹힌 커다란 짐짝을 치운 것 같은 기분이었죠."

  시종일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던 여자는 그 말을 할 때는 차분하고 평온한 표정이었다. 여자는 동네의 십대 살인범들에 의해 어머니와 남동생을 잃었다. 두 명의 살인범들은 각각 종신형과 사형을 선고받았다. 약물주사형으로 사형을 받은 마이클 페리의 마지막을 참관한 심정을 여자는 그렇게 대답했다. 베르너 헤어초크 감독의 2011년작 다큐 'Into the Abyss'는 실제 살인 사건의 관련자들을 인터뷰하며 사형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공포 영화를 잘 못보는 사람이라면 밤에 이 다큐를 보는 것은 피해야 한다. 살인 사건 직후 경찰이 촬영한 현장 화면은 꽤나 강렬한 정서적 충격을 주기 때문이다. 헤어초크는 십대 살인범들이 저지른 참혹한 범죄를 직접적으로 설명하거나 언급하는 대신, 수사 담당 경찰관의 증언과 경찰측에서 촬영한 현장 화면으로 제시한다. 사실은 때론 영화적으로 가공된 그 어떤 무시무시한 장면 보다 공포스럽다.

  다큐는 사형 집행이 임박한 마이클 페리를 헤어초크가 인터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십대 사형수는 해맑은 표정으로 천국으로 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무고한 세 명의 사람을 죽인 살인범이다. 그런데 천국으로 갈 날을 꿈꾼다고? 페리는 도대체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알 수 없다고, 마치 살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처럼 말을 이어간다. 억울한 누명을 쓰기라고 했단 말인가? 그런데 그의 공범 제이슨 버켓도 같은 말을 한다. 자신은 전적으로 죄가 없으며, 누군가와 술을 진창 마셨는데 일어나 보니 살인범이 되어있었다며 인터뷰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관객들은 에롤 모리스의 '가늘고 푸른 선(The Thin Blue Line, 1988)'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살인 사건의 증거는 너무나도 명백하며, 페리는 검거되어서 자신의 범죄에 대해 인정하고 자백했다. 다큐의 시작부터 헤어초크는 사형제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페리와의 인터뷰에서 표명하는데, 그가 고른 이 사건은 결코 관객의 연민과 동정을 끌어낼 수 없다. 헤어초크는 잔혹한 살인자의 존재와 관계없이 사형제 자체의 부당함에 대해 호소하는 방법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Into the Abyss'는 시적이고 은유적인 제목이 붙은 6개의 단락으로 나누어 구성되어 있다. 50대 가정주부와 그의 아들, 아들의 친구가 살해된 살인 사건의 개요가 먼저 제시된다. 그리고 가족을 잃은 피해자들, 살인범의 지인과 그 가족, 살인 집행을 맡았던 전직 교도소 직원들, 종신형을 받은 제이슨 버켓과 옥중 결혼한 여성과의 인터뷰가 이어진다. 모든 인터뷰는 헤어초크가 진행했으며, 그는 화면에 나오지 않고 오직 목소리로만 등장한다. 헤어초크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자신이 원하는 답을 이끌어내기 위해 때론 집요한 면모를 보인다. 제이슨 버켓과 옥중 결혼한 여성에게는 버켓의 손이 어떻게 생겼는지 표현해 보라고 한다. 결혼한 수감자라고 해도 포옹만이 허용되는데도, 어떻게 임신이 가능했냐며 그 방법을 캐묻는다. 이 나이들고 노련한 감독은 결코 강압적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인상도 주지 않는다. 어머니와 남동생이 죽은 여자는 사건 이후로 전화받는 것이 무서워서 전화를 쓰지 못한다고 말하는데, 헤어초크는 그런 것을 직면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헤어초크의 인터뷰는 정서적인 면에 치중해서 진행되기 때문에 이야기의 본질에서 종종 벗어난다. 특히 자신의 범행을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제이슨 버켓에게 그의 인터뷰는 공개적인 영상 탄원서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런 버켓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40년을 보낸 죄수로 가난과 범죄가 어떻게 자신과 가족의 삶을 망쳤는지 진술한다. 아버지의 진술은 실제로 법정에서 버켓이 사형이 아닌 종신형을 받는데 기여했다. 헤어초크는 약물과 범죄로 얼룩진 하층민 범죄 가족의 이야기를 사형제 반대의 입장을 구축하는데 영리하게 써먹는다. 그럼에도 관객들에게는 사람을 죽이고도 종신형이 억울하다며 강변하는 이 사이코패스 범죄자를 보는 일은 상당히 역겹다. 이 다큐는 정말로 기이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는데, 흉악한 살인범들에게 팬레터를 보내는 열혈 추종자들이 있으며 그들 가운데 일부는 결혼에 이른다는 사실이다. 버켓의 아내도 그런 경우로 이 여성은 버켓과 첫 면회에서 본 무지개를 운명적 계시라고 말하며, 그의 무죄를 믿고 사면을 위해 애쓰고 있다.

  과연 사형제에 찬성하는 사람이 이 다큐를 보고나서 사형제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돌아설까? 어머니와 남동생을 잃은 여성은 모든 생명이 존중받아야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런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고 말한다. 남동생을 잃은 또 다른 피해자는 사건 직후 여동생을 교통사고로 잃었다. 그가 눈가에 새긴 2개의 눈물 문신은 잊을 수 없는 슬픔을 보여준다. 정서적으로 피폐해진 피해자들의 삶, 그 어떤 반성도 없는 뻔뻔한 살인범들, 사형 집행인들이 겪는 심리적 갈등과 고통, 'Into the Abyss'에는 이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 엉켜있다. 나는 헤어초크가 도대체 이 다큐를 무엇 때문에 만들었을까 생각했다. 사형제에 반대한다는 감독의 신념은 확고하지만, 그가 이 다큐를 통해 하는 이야기들에는 일관된 방향성이 없다. 다큐의 제목처럼 그 또한 어두운 심연 속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이 다큐의 그러한 난삽함은 국가의 사법적 살인 제도인 사형제에 복잡하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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