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포자(수학 포기자)'라는 말이 있다. 미하일 롬(Mikhail Romm) 감독의 1962년작 '1년의 9일(Nine Days
in One Year)'은 수포자가 아니라 '물포자(물리 포기자)'가 보면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들이 참으로 많이 나온다.
영화의 주인공은 핵물리학자로 그의 주변 인물들도 물리학자들이다. 그들은 결혼식 연회장에서도 중수소의 양과 우주 여행을 주제로
냅킨에 계산까지 해가며 불꽃 튀기는 논쟁을 벌인다. 영화는 과학 연구에 자신의 삶을 내던진 젊은 과학자 구제프의 1년, 그 가운데
9일 보여준다. 그것은 연속적으로 이어진 기간이 아니라, 구제프에게 있어서 중요한 사건이 있었던 날들만을 뽑은 것이다. 미하일
롬은 냉전 시대를 살아가는 핵물리학자의 눈을 통해 과학과 인간의 관계, 과학적 발견과 윤리의 문제를 다룬다.
핵
융합 연구소 연구원인 구제프는 스승 신초프와 함께 실험을 하다 방사능에 피폭되는 사고를 겪는다(1일). 치사량의 방사능에 피폭된
스승은 사망하고, 구제프도 더이상의 피폭은 위험하다는 의사의 경고를 듣는다(2일). 그럼에도 그는 연구에의 열정을 멈출 수가
없다. 구제프와 친구 쿨리코프 사이에서 갈등하던 롤리야는 구제프와 결혼한다(3일). 그러나 일상의 모든 것을 연구에만 쏟는
구제프의 모습에 롤리야는 소외감을 느낀다(4일). 연구에 매진하던 구제프는 마침내 중성자를 발견하는 성과를 거두지만(5일),
그것이 제대로 입증되지 않아서 연구는 답보 상태에 빠진다(6일). 구제프는 아내와 함께 오랜만에 고향집을 찾아 아버지를
만난다(7일). 실험 과정에서 또 다시 피폭을 겪은 그는 병이 심해지며(8일),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한 그는 골수 이식 수술을
기다린다(9일). 영화는 열린 결말로 끝나는데, 그렇게 구제프의 인생에서 힘겨웠던 1년의 시간을 돌아본다.
1960년대 소련이 이룬 과학적 발전은 눈부셨다. 1961년, 유리 가가린은 최초의 우주인으로 지구 궤도 비행에 성공했다. 당시
미국과 소련은 군비 경쟁 뿐만 아니라 과학 분야에서도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1년의 9일'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과학자의 삶을
확대해서 보여준다. 구제프는 학자로서 매우 금욕주의적인 삶의 방식을 고수한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미하일 롬은 연구소와
구제프의 집을 매우 미니멀리즘적인 세트로 구성했다. 연구소에서 특히 눈에 띄는 장소는 연구원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지하 통로이다.
복잡한 전선줄이 얽혀있는 어두운 지하 복도는 연구원들이 서로의 안부를 묻고, 연구의 진행 상황을 논의하는 곳이기도 하다.
과학이라는 신성한 사원을 지키는 사제들처럼 연구원들은 열정적으로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한다. 그런 연구소의 분위기는 구제프의 신혼집
살림살이에서도 볼 수 있다. 가스 스토브와 식탁, 찬장으로 이루어진 단촐한 부엌, 다른 가구가 없는 침실은 정감있는 집이
아니라, 숙식을 해결하는 하숙집 같다는 느낌을 준다.
구제프는 자신의 연구가 핵폭탄과 같은 대량 살상 무기가
아니라 원자력 에너지로 쓰일 거라는 긍정적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가 연구에 매진할수록 아내를 비롯해 주변과 단절된다.
그의 아버지 또한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버지는 구제프에게 중성자 연구가 핵폭탄 제조에 쓰일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구제프도 자신의 연구가 가진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지만, 그는 과학자로서 자신이 해야할 임무를 뼛속 깊이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다.
구제프와 상반되는 지점에 서있는 회의론자 쿨리코프는 이전의 과학 발전이 전쟁 무기 개발(독가스와 원자 폭탄)과 연관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흐루시초프의 '해빙기(Thaw era)'에 만들어진 영화로서 '1년의 9일'은 나름의 균형적인 시각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미하일 롬은 과학 연구에 헌신하는 구제프의 모습을 과학자의 순수한 이상으로 상정한다. 연구소 동료들이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들도 물리학적 주제들로 그들이 일반인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구제프의
과학에 대한 열정은 결국 자신의 목숨까지 담보로 걸게 만든다. 그는 피폭으로 쇠약해져서 수술대에 오른다. 개를 대상으로 치료
성과가 입증된 것이어서, 그가 수술을 해도 산다는 보장은 없다. 영화는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숭고한 과학자에게 암울한 미래를
보여주지 않는다. '해빙기'라고 해서 검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원본에서는 피폭으로 실명한 구제프가 어머니의 묘를 참배하는
장면이 있었지만, 그 장면은 삭제되었다. 어쨌든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인민들에게 희망에 찬 결론을 보여주는 쪽을 선호했다.
이 영화를 만들 무렵, 미하일 롬은 이미 지난 시대의 구세대 감독으로 기억되었다. 그는 VGIK(러시아 국립 영화 학교)에서
타르코프스키와 같은 젊은 세대의 제자들을 길러내는 교육자로서 더 많은 시간을 썼다. 그러나 롬은 이 영화로 자신이 가진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다시 한 번 입증해 보인다. 그가 그린 냉전 시대 과학자의 초상은 오늘날의 시각에서는 다소 경직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1년의 9일'은 독특한 소재로 그가 살던 시대의 과학적 진보에 대한 믿음, 인류애를 가진 과학자들의 열정,
국가 주도의 과학 연구의 한 단면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사진 출처: ru.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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