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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루카스의 인생 역전, 청춘 낙서(American Graffiti, 1973)

 

  남자는 자신의 첫 영화를 보기좋게 말아먹었다. 낙담하고 있는 그에게 한 영화인이 새로운 영화를 만들 것을 제의한다. 남자의 재능을 알아본 그 사람 덕분에 남자는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이 쓴 초고에 자신의 경험을 잘 섞어서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첫 영화가 망해버린 탓인지 제작비 구하기는 참으로 어려웠다. 마침내 시작된 영화 촬영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서로 친해진 주연 배우들은 숙소에서 술 먹고 난동을 부리는가 하면, 자동차 경주 촬영 장면을 찍다가 스태프 2명이 사망하는 사고도 있었다. 기껏 영화를 찍었더니, 제작비를 대준 영화사는 어째 흥행이 안될 것 같다며 TV용으로 돌리자는 말을 꺼냈다. 우여곡절 끝에 영화가 개봉되었다. 관객들의 입소문을 타고 흥행 대박이 터졌다. 제작비의 무려 180배에 달하는 엄청난 수익을 낸 것이다. 그야말로 '인생은 한 방'이라는 것을 남자는 입증해 보였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조지 루카스, 그와 함께 영화를 제작한 사람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이 영화로 역대급의 수익을 올린 영화사는 유니버설 픽처스다.

  바로 그 영화, '청춘 낙서(American Graffiti, 1973)'는 네 명의 고교 동창생들이 보낸 하룻밤의 여정을 담아냈다. 내일이면 대학이 있는 도시로 떠나는 모범생 커트(리처드 드라이퍼스 분), 대학 진학을 앞두고 여자 친구와의 이별에 고민하는 스티브(론 하워드 분), 자동차 경주에 목숨을 거는 존(폴 르 맷 분), 여자를 사귀고 싶어서 안달이 난 토드(찰스 마틴 스미스 분)는 하룻밤 동안 모험의 여정을 떠난다. 그들의 여정에는 분신과도 같은 소중한 자동차와 신나는 로큰롤 음악, 그리고 디스크 자키 잭 울프의 라디오 방송이 함께 한다. 그 여정이 끝날 때 즈음, 네 명의 친구들은 새로운 '발견'과 '성장'을 이루어 낸다.

  루카스는 자동차광이었다. 그는 자동차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이 영화에 아낌없이 드러낸다. 온갖 종류의 클래식카들이 등장하는데,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자동차를 매개로 대화하고 소통한다. 여자를 유혹하기 위해서 차는 필수적이다. 차가 없는 토드는 스티브가 빌려준 차를 가지고 비로소 데이트를 할 수 있게 된다. 상대방을 조롱하고 도발할 때 이루어지는 대화들도 창문을 연 차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그런가 하면, 마음속 깊은 고민과 감정들을 토로하는 장소도 차 안에서이다. 이쯤되면 자동차는 금속덩어리 기계가 아니라, 마치 생명체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자동차가 영화의 시각을 지배한다면, 1950년대와 60년대를 풍미했던 로큰롤 음악은 관객의 청각을 사로잡는다.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그 시대의 노래들은 이 영화의 주요한 뼈대를 이룬다. 영화의 포스터 문구 '1962년에 여러분은 어디 있었나요?'라는 문구가 꽤나 흥미롭다. 신나는 로큰롤 음악은 그 시대를 살지 않았던 관객들이라 하더라도 영화 속 그 시절로 데려다 놓는다. 영화의 엄청난 흥행에 힘입어 사운드트랙 음반도 대박을 터뜨렸다.

  어떤 면에서 당시의 미국인들에게 이 영화는 지나간 바로 이전 시대에 대한 복기()와도 같았다. 1963년에 케네디가 암살되었고, 이후에 미국은 베트남전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약물에 절은 히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던 것도 그 즈음이었다. '청춘 낙서'속의 네 명의 친구들 이야기는 마치 그러한 혼란과 격동의 시대 직전에 찍은 인물 사진 같다. 그들이 보여주는 온갖 객기와 자유로움은 1962년이라는 시간적 배경을 새삼스럽게 상기시킨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자막은 그 좋았던 시절의 끝을 가리킨다. 작가가 된 커트, 보험회사 외판원이 된 스티브, 자동차 사고로 죽은 존, 베트남전에서 실종된 토드. 청춘의 낙서가 흐릿해지는 10년 후의 이야기는 그러했다. 이 영화의 대단한 흥행 기록은 어쩌면 과거의 향수로 현실의 고단함을 달래려고 했던 당시 관객들의 열망이 반영된 것인지도 모른다. '청춘 낙서'의 대성공으로 루카스는 자신이 만들고 싶은 영화를 비로소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루카스의 '스타워즈'시리즈는 이 영화의 성공 위에 쓰여졌다.

  이제는 50년의 나이를 먹어버린 영화 '청춘 낙서'는 오늘날의 관객이 보아도 흥미롭고 새롭다. 이 영화는 당시 미국 사회의 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되어준다. 또한 할리우드 대스타의 아주 젊은 시절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즐거움을 준다. 이십대의 풋풋한 리처드 드라이퍼스(그는 100명의 오디션 경쟁자들을 제치고 캐스팅되었다)와 함께 진짜 젊은 해리슨 포드(당시에 그는 목수일과 배우를 병행했다)가 나온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조지 루카스다. 이제는 디즈니의 대주주가 되어 안락한 노후를 보내고 있는 그의 진정한 인생 역전은 이 영화, '청춘 낙서'에서부터였다. 


*사진 출처: cinemus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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